그것을 따지고 들면 그 안에는 어린 시절에 결핍된 욕구들, 유년의 상처들. 그런 것들을 '결혼'을 통해 다시 채우고 치유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숨어 있다. 결혼으로 새 출발 한다는 것도 역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나의 화두였던 이 문장, '나는 나의 부모에게 세상에 대한 도전, 모험, 현실적 지원과 지지를 바랐다.'
오십 년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 듯하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하고 마음속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애를 쓰다 보니, 엉킨 실타래 속에 꽁꽁 묶인 매듭이 몇 개나 손가락에 잡히는 듯했다. 그렇게 어디서부터 꼬였나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습게도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 혹은 우리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
거기 까기 거슬러간다.
돌아보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불안한 환경 속에서 길들여졌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배우고 터득한 것이 '불안에 민감한 것', '결이 맞는 안전한 사람과 환경 속에 있을 것'
결국은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만 나는 언제나 마음 한편에서 용감한 도전과 모험, 자유가 갈급했다.
스스로 족쇄를 채워놓고 언제나 창 너머 저 하늘과 구름을 보며 동경하는 삶을 살다 보니 현실에 대한 만족감이나 감사가 부족할 수밖에. 내게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 특히 남이 가진 것, 남이 누리는 것들이 부러웠다.
이런 나는 스스로 선택한 사랑, 홀딱 빠져 반해버린 20년 전 내 남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바랬던 것일까?
"나는 나의 부모에게 ----하기를 원했다."란 문장을 남편에게도 적용해 본다.
"나는 내 남편이 나에게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지원과 지지해 주기를 바랐다."
똑같다! 내 부모에 대한 바람이 내 남편에게도 역시나 똑같다. 소름 돋게도 그리고 미안하게도...
그러면 현실은? 내 남편은 나에게 경제적 안정을 준다. 본인 스스로 몹시 어려운 환경에 자란 탓에 경제적 안정이 1순위인 사람이니까. 반대로 남편도 결혼 당시 내게 바라는 점이 본인 부모에게 바라는 점과 동일했을 것이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열로 한 부모님을 보며 '젊은 여느 부모들처럼 적절한 돌봄과 경제적 지원을 원했다'는 사람이다. '경제적 지원'에서 순간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남편이 내게 경제적 안정을 주는 반면, 본인의 힘듦을 나에게 과하게 의존한다. 나는 끊임없이 들어주고 얼르고 달래듯 하며 때론 남편인지 아들인지 매니저인지 모를 삶이다. 항상 곁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남편이다. 아니 어쩌면 이 또한 내가 남편이 그렇게 되도록 길들여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자신할 수가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나는 1박 2일의 여행조차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산다.
어쨌든 애초에 우리 부부는 보이지 않는 결로 서로를 알아봤고, 미묘한 응집력으로 뭉쳐 가정을 이뤘다. 각자의 집안에서 겪은 결핍과 아픔, 상처를 덮어주고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이란 마음도 저변에 있었을 테다. 고로 우리의 만남과 인연은 참 흔한 말이지만 우연이 아닌 필연이자 숙명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서사가 담긴 숙명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다. 나도 그렇게 20년째 남편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숙명은 업고 가지만 적어도 내 앞에 운명은 맞서 싸워볼 수 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