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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May 26. 2020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질문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울 때 기질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이론을 처음 접했습니다. 사람의 체액이 기질을 결정한다는 그의 해석은 당시에는 ‘황당’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사람들은 4가지 기질로 사람의 성향을 나눴습니다. 체액이 담즙질인 사람은 열정적이고 화를 빨리 냅니다. 우울 기질은 흑담즙을 가진 사람으로 쉽게 화를 내고 예술적 감수성이 큽니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람은 점액질이 많은 사람이고, 행복하고 낙천적인 사람은 다혈질 혈액이 흐르는 사람으로 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성격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겠지요.     


현대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이해할 때, 인격(Personality), 기질(Temperament), 그리고 성격(Character)의 세 가지 개념을 모두 고려합니다.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기질을 유전적 요인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히포크라테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통해 아이에게 흘러간 기질이 잘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큰애를 볼 때 그렇습니다. 양말 봉제선이 발에 맞게 신겨지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큰애는, 손가락 끝에 침 묻혀가며 양말 고쳐 신으시던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모습의 데자뷔입니다. 잘 참다가도 한계에 다다르면 감정선이 큰 폭으로 변하며 동생에게 화를 내는 큰애를 마주하는 건, 가장 싫어하는 제 모습인지라 어지간히 마음이 불편하고 안타깝습니다. 기질은 그렇게 감출 수 없습니다. 우울함 또한 제가 가진 기질 중 하나입니다. 특히 감당하기 버거운 문제 앞에서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접고 제 안으로 침잠하는 우울함이 제게는 있습니다. 30대 중반까지 이 우울함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해서 힘들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저 감정의 흐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은 어느 순간, 자문했습니다.      

‘그래.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렇게 무력하기만 하면 뭐가 나아지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한 ‘NO!’ 우울감에 빠져 있을 이유가 없는 거였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두 가지 방향의 답이 나왔습니다. 먼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보는 방향이었습니다. 

‘당장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아. 그런데 정말 이 문제의 해결방법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내 머리가 우울감 때문에 마비되어 생각해내지 못하는 걸까?’

질문하자 머리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이 문제가 해결 가능한 거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내 안에 답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방법은 가능할까?’     


신기한 건, 질문만 했을 뿐인데 우울감이 옅어진다는 거였습니다. 심지어 문제를 해결할 답은 아직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우울을 떨쳐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눈에 보인 경험이 있습니다. 가만 보니 답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낙담한 제가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에게 감정은 그래서 중요한가 봅니다. 감정이 상해서 낙심하면 모든 일이 부정적으로만 이해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문제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방법이 없다고 큰애가 짜증을 낼 때면, 저는 제가 예전에 경험으로 배운 이 질문을 아이에게 합니다. 직접 체험했기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담아 아이에게 천천히 묻습니다. 

“평아, 그렇게 화를 내면 뭐가 달라질까?”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기분이 상해서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방법이 있는데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걸 수도 있지 않아?”

“해결방법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력감을 짜증으로 투사하며 눈물 그렁그렁한 큰애의 눈동자가, 제 질문을 받고 생각하느라 울음을 멈칫합니다. 생각하고 있다는 거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이는 자신에게 질문할 때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반복해서 경험하며 언젠가는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질문할 겁니다. 질문하면 문제와 관련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답을 찾게 될 거고, 그러면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우울감에 빠진 저를 건져 올린 또 다른 방향의 질문은 이랬습니다. 

‘이 문제는 답이 없을 수 있어. 그래. 난감하지만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답도 없는데 계속 이렇게 주저앉아서 낙담하고 있다고 뭐가 달라져? 기분만 더 나빠지네. 그럼 이 기분을 어떻게 처리하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가 떠올린 건 해결책이라 할 수도 없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종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효과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답이 없다는 답도 하나의 답으로 인식될 때 머릿속에서 일어난 기적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답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주저앉는 건, 갈 길이 멀 때가 아닙니다. 가야 할 길이 멀 때는 사람들이 더 부지런을 내지요. 내적 열정을 불태우며 축지법이라도 쓰듯 앞으로 내달립니다. 더는 갈 길이 없을 때, 발을 어디로 내디뎌야 할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주저앉습니다. 해결방안을 찾지 못한 문제 앞에서 저는 이렇게 짧은 탄식을 뱉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지 뭐!’     


너무 시시한 대답이라 김이 빠지시나요? 하지만 이 말에는 정말 엄청난 능력이 있답니다. 의심되면 한번 조용히 되뇌어 보세요. 세상에는 정말 우리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무력해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우울감에 빠지는 순간,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어쩔 수 없지 뭐!”라고 고백하면, “답 없음”이라는 선택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답이 된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이 말은 큰애가 감정적으로 여유로울 때 하는 선언입니다.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때는 하고 싶은 어떤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요. 아이가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거,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이라는 걸 가르쳐준 것 같아 뿌듯했거든요. 항상 최고의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일 겁니다.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보는 이도 힘이 나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다릅니다. 때로는 현재 얻을 수 있는 차선이 최선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거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느라 헛수고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낙담하거나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지금 내게 허락된 차선이 최선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을 감정회로에 탑재하면 우리 마음은 한층 더 건강해집니다. 이런 현실성은 질문을 통해 습득 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질문해서 얻은 사고력으로도 답이 안 보인다면, 나직이 되뇌어 보세요. 마음이 건강해진답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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