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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하 Jun 07. 2022

뜻밖의 여정에서 노년을 꿈꾸어 보다

윤여정의 '뜻밖의 여정'을 보고

노년이 꿈꾸는 대상이 된다는 건.. 정말이지 꿈에도 없을 일이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노년이란 예견되었으나 대비하기 어려운, 대체로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려야 할 불행 혹은 재난쯤으로 여겨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 <은교>(2012)에서 박해일이 연기하는 노년의 소설가 적요는 늙는다는 것에 대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70대의 나이에 욕망을 품는 일을 비난하는 제자 서지우(김무열)를 향해 이렇게 읇조린다. 

"너희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렇게 취급되어온 노년이란 단어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그 단단한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시작하는 대지각변동의 중심에 아카데미상의 배우 '윤여정'이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한국 나이 76세의 그녀가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고 감동시키는 이유가, 그녀의 노년의 나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2년 아카데미상 시상을 위한 윤여정의 미국 방문을 카메라에 담은  <뜻밖의 여정>은 윤여정이 가진 이러한 힘,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이유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나영석 PD의 예능이다. 솔직하게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특히 빛나는 '처음 살아보는' 노년에 대한 태도는, 76세의 나이에도 삶이 우리의 태도에 따라 여전히 새롭고 경이로울 수 있음을, 우리의 노년이 어떤 벌이나 재난이 아니라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뜻밖의 여정'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질곡 많았던 그녀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일상의 말들과 나지막한, 다정한 목소리로.   


오래전 아는 후배로부터 "언니는 늙으면 꼭 윤여정씨 같은 할머니가 될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엄청난 칭찬이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받아들였는데, 이제 생각하면 '내가 무슨, 감히' 쯤의 반응을 하는 게 온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나 기분 좋은 칭찬. (고맙다, 현정아) 나의 '노년'이 그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는 없을지라도 '납으로 만든 옷'은 아니기를. 내 몸에 편안하고 가벼운 린넨 정도의 옷은 될 수 있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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