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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하 Feb 14. 2023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이유리, 김서해, 김초엽, 설제인, 천선란 소설집

로빈슨 크루소나 해저 2만 리, 파라오의 비밀?, 홈즈와 루팡이 활약하는 모험과 탐험 혹은 추리 소설에 매료되어 잠 못 이루던 때가 있었다. 눈앞의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다. 이후로 바깥세상에 눈을 뜨고 현실의, 시대적 상황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부터는 그런 책들과 멀어져, 아주 가끔 좋은 SF영화를 통해서나 비슷한 경험을 해볼 따름이었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인식의 경계가 확장되는 그런 가슴 뛰는 경험을. 부족한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는 영화는 이러한 장르에 꽤 괜찮은, 친절한 매체로 보였다.


근래에 접하게 된 젊은 작가들의 SF 소설들은 암울했던 어린 시절 속에서도 행복감을 주었던 그 느낌들을 소환해 주면서 확장해 준다. 먼 미래, 지구 저 편의 어디를 넘어, 이제 우주까지 아우르는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향연들. 감각과 지각에 관한, 몸과 마음에 관한 새롭고도 섬세하며 따뜻한 시선이 선사하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


5인 작가의 소재는 다양하다. 이유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실연 후에 남은 사랑의 감정을 감당하기 버거워진 수진이, 남편의 외도 후 훼손된 관계를 복구하기를 원하는 절친 연인에게 ‘남은 사랑’을 전이해 주는 이야기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들에 탐닉하는 우리는 내면의 감정 문제에 대해서는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생각인데, 그 고통의 감정들을 기체화하여 손쉽게 털어내어 버릴 수 있다면? 동시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타인에게 큰 도움을 주면서 경제적 대가까지 취할 수 있다면? 그렇게 순방향으로만 가는 것 같았던 이야기는 수진이 새로 만난 남자 영욱과 행복한 관계로 나아가려는 찰나에 방향을 튼다. “전 헤어지면 무조건 감정전이를 해요. 얼마나 좋아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고, 저에게는 더 이상 이 사랑이 필요가 없고, 서로 윈윈이잖아요.” 영욱의 말에 잠시 주춤하던 수진이 그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의문부호를 남긴 채.

(다루기 힘든 감정을 쉽게 물질화하여 처분하는 세상이 오면 심리학자, 심리상담사, 정신과 의사들은 할 일이 없어지려나… )


김서해의 <폴터가스트>는 넷플릭스 시리즈물 <지옥>을 연상시킨다. 과거의 기억, 죄의식을 끄집어내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으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 인간의 멸망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건 죄의식이란 것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뜻일까? 현실에선 죄의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도 많던데.


김초엽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인공피부를 다룬다.  


인간의 재료가 달라진다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도 바뀌지 않을까? 우리가 매끈한 가죽과 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까끌까끌한 털로 뒤덮인 존재라면, 혹은 석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잘 부스러지는 존재라면? 인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매끈한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131쪽)


피부가 우리의 본질을 상당 부분 규정하고 있으며 피부를 바꿈으로써 다른 존재가 된다는 설정은, 오래전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떠올리게 한다. 


뼈대


뼈대가 몸 안에 있는 것이 나을까, 거죽에 있는 것이 나을까?

뼈대가 몸 거죽에 있으면 외부의 위험을 막는 껍질의 형태를 띤다. 살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물렁물렁해지고 거의 액체 상태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그 껍데기를 뚫고 어떤 뾰족한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뼈대가 몸 안에 있으면 가늘고 단단한 막대 모양을 띤다. 꿈틀거리는 살이 밖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상처가 수없이 많이 생기고 그칠 날이 없다. 그러나 바로 밖으로 드러난 이 약점이 근육들 단단하게 만들고 섬유의 저항력을 키워준다. 살이 진화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출중한 지력으로 <지적인> 갑각을 만들어 뒤집어쓰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견고해 보였다. 그들은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어떤 상반된 견해가 그들의 단단한 껍질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그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사소한 이견, 아주 사소한 부조화에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세계는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에 민감했고 어떠한 공격에서도 배우는 바가 있었다.

- 개미 1, pp. 356~357


(사실.. 그리 어렵게 피부를 바꾸지 않아도, 나이가 드는 일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체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여린 피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굳은살로 뒤덮인 존재로 사는 것이 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 


천선란의 <뼈의 기록>에서도 연관되는 대목이 있다. “뼈가 피부를 감싸는 것이 아닌 피부가 뼈를 감싸는 구조는 비효율적이었으며 생존에도 불리해 보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 천선란의 <뼈의 기록>은 로봇 장의사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다. 안드로이드 장의사 로비스는 죽음으로 인한 육체의 부식과 소멸이 ‘호흡하는 모든 존재의 특권’이자 ‘순환의 고리’이며, ‘인간의 몸이 거대한 생태 일부분임’을 확인하지만 이를 부정하는 인간, 망자와 남은 유족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망자를 헤아리고, 남은 이들을 헤아리는 것. 흉내에 불과하더라도 그건 인간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게’ 제작자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오염’(김겨울)되지 않은 시각과 마음으로, 자연의 일부로서 존엄한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로비스의 위로는 인간의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로비스는 뼈의 말을 읽을 수 있는 안드로이드이므로.


뼈가 하는 말은 더 길고 깊은 삶의 전체다. 오랜 시간 반복되어야만 생기는 굴곡. 로비스는 아직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뼈의 말을 읽었다. 레나는 몸을 쓰는 인간이었다.


로비스는 아직 단단하지 않은 서채호의 몸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 몸은 수억 번의 진화 가능성을 잃었다. 모든 죽음은 이런 식으로 가능성의 상실로, 기회의 소멸로 가는 것일까? 


모미는 영안실 청소를 삼십 년 넘게 해온 동료이다. 영안실이 있는 건물을 벗어난 적 없는 로비스에게 나비의 날갯짓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고, 망자들을 함께 애도하며,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려주며 매일의 인사를 나누던 팔십사 세 노인 모미.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그가 영안실에 들어오자 로비스의 원칙은 흔들린다. 뜨거움을 싫어하던 모미의 몸을 화장으로 끝낼 수 없었던 로비스는 한 때 나비처럼 우주를 날기를 꿈꿨다는 모미의 말을 생각해 내고, 모미를 누인 침대를 끌고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문을 열어 항공우주군 기지로 향한다. 그리고 모미를 우주로 데려가려는 이유를 묻는 첼 대위의 질문에 로비스는 모미의 말을 빌어 답한다. “마음이 하는 일. 몸이 그것을 따랐을 뿐입니다.”


첼과 함께 우주선을 타고 올라 달이 잘 보이는 곳에서 모미의 몸을 떠나보내며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보내는 대목을 읽을 때는 그 찬란한 우주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펼쳐지고 눈물이 났다.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결말이다!

나의 장례도 그에게 맡길 수 있다면, 나의 죽음도, 그리하여 나의 삶도, 존엄해질 것만 같다.


로비스의 전원을 끄기 직전, 로비스는 모미가 이제 성간우주에 돌입했다는 계산을 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227쪽)


설재인의 <미림 한 스푼>은 외계인에 의한 지구 멸망을 배경으로 한다. <지옥>의 ‘화살촉’을 연상시키는 외계인 ‘솜새끼’가 주도하는 난장판 종말의 순간, 끔찍한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던 주경은 기적적으로 생존한다. 그 기적을 가능하게 한 건 지하에 살던 미림의 사랑이다. “J의 결론을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사랑이 묻은 행동에는 막연한 구석이 꽤 있는 법이다.”


5편의 소재와 형식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몸과 마음, 감각과 인식에 대한 동시대성을 공유한 작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섬세하고 탄탄한 장치들은 매우 흥미롭고, 대체로 디스토피아적 전망 속에서도 슬픔이나 곤경에 처한 타인을 헤아리고 위로하며 구원하는 연대 혹은 사랑의 서사들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새로운 소망을 품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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