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it till become it
임금체불이 가져온 파력은 엄청났다. 우리는 회사가 우리에게 돈을 쥐어줄 수 있도록 외주 일에 뛰어들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외주는 나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을 쉴 틈 없이 일하게 만들었다.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일은 연휴인 월요일까지 계속되었다. 데드라인이 촉박했기 때문에 밤새 일을 하다가 해가 뜨고 나서야 자러 갔고, 눈을 잠깐 붙였다가 금세 일어나서 일을 했다. 화요일 0시가 지나고서야 어째 저째 끝을 냈다. 학교와는 달리 실전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은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고 듣기는 했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항상 급하게 진행되는 일들은 원하는 퀄리티만큼의 디자인을 뽑아내기 힘들었다. 짧은 시간에도 원하는 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줄 수 있는 게 '연차가 쌓였다'라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모자랄 때가 많았고, 디자인은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입사원의 '열정'과 '패기' 그런 감정들로 퉁쳐버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화요일 출근을 한 나에게 그런 감정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잠을 못 자 동태눈으로 출근한 나는 디자인이 하기 싫었다. 시간을 쏟아부어도 부족한 결과물들을 생각하니 나는 영 재능이 없는 걸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요.. 제가 왜 디자인을 직업으로 한다고 했을까요. 십 년 전으로 돌아가면 대학생의 저에게 다른 걸 공부하라고 해야겠어요." 대리님께 토로했다. 나는 하루 종일 디자인 대신에 그럼 뭐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디자인만 생각했던 내가 다른 일을 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과연 잘하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싶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워크넷에서 직무적합검사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사회인문학 교수나 연구원이 적합하단다. '아.. 박사님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대학원은 지금 하는 디자인보다 더 힘들 텐데..' 역시 쉬운 일은 이 세상에 없나 보다.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하는 게 답인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디자인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내가 잘하는 일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고, 내가 선택한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느낀 이 순간 내가 잘하는 것은 이 세상 단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구글에게 물었다.
나의 고민은 역시 세상 많은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고민이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그래, 내가 디자인이 아닌 그 무엇을 하든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것이 설령 내가 잘하는 일이 되었더라도. 사실은 내가 현재 직장에서 찐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한 건 얼마 안 되니깐 처음에 다 잘 해낼 수는 없는 법인 거야.'
그렇게 나의 커리어와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웹서핑하던 중 나와 비슷한 고민을 먼저 했던 누군가를 향한 '선배' 디자이너의 응원글을 보았다.
막연하게 '시간이 지나면 잘할 수 있어'라는 글이 아니어서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잘한다고 느껴지는 위치까지 오는 동안 나의 스타일이 어떤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는 일들은 무엇 인지들을 알아가는 부분이 컸다고 말하는 부분이 와닿았다.
그렇다. 잘하는 분야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고, 한 명이 모든 부분들을 잘하기는 어렵다. 내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유난히 못하는 부분만을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있어서, 또는 그 부분이 부각되는 일들을 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렇게 먼저 경험한 누군가의 진심 어린 글을 읽으며 힘이 났다.
나는 나의 디자인하는 스타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학교에서 가르쳐준 건 어도비 툴 사용 방법이 아닌 디자인 싱킹이었기에, 디자인이 누굴 타깃으로 하는지, 문제 정의부터 시작하는 그런 생각하는 디자인에 익숙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내가 생각하며 디자인을 할 때와 안 할 때의 차이가 컸던 것 같다. 입사 후 피피티 디자인은 할 때마다 제일 어려웠다. 반쪽짜리 기획을 주며 냅다 예쁘게만 해달라는 부탁들 앞에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끝없는 그런 디자인 작업에 멘털이 무너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고민을 했고, 나는 새로운 태도를 맘에 새겼다.
Amy Cuddy라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가 2012년 "Your Body Language May Shape Who You Are"라는 제목의 TED Talk 강연에서 한 얘기이다.
Fake it until you become it
영어에는 Fake it until you make it이라는 격언이 있다. 될 때까지 척을 해라는 정도의 뜻인데, 나는 그 격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척해야 한다는 말이 싫었다. 하지만 Amy Cuddy 박사의 강연을 들으며, 내가 지금 이 '혼돈의 카오스'를 살아남는 방법은 내가 디자인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디자인을 못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알아볼 수도 있지만, 내가 잘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며 하다 보면, 진짜 그런 날이 올 테니깐.
그런 의미에서 혹시 어딘가에 나처럼 커리어 중간에서 길을 잃고 오늘을 보낸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 같이 힘내보자고 전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