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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Feb 23. 2024

아빠가 없으면 말이야

한부모가정에서 자란다는 것은

 “에헤이. 그 보여주면 안 됩니더.”

 “아이고. 그래도 마지막인데 애들한테 보여 주야지.”     


  일곱 살, 늦은 가을. 잠시 스쳤던 아빠의 얼굴이 기억난다. 시끄러웠던 장례식장이었다. 아빠 또래의 아저씨들이 모두 검은색 양복을 입고 둘러 서서 한참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아저씨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했고, 다른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 편이 이겼던 것 같다. 때문에 오빠와 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실랑이를 벌이는 아저씨들 뒤에 서 있던 키가 작은 나는 아저씨들의 허리 사이로 관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아빠의 얼굴은 잠을 자듯이 편안해 보였다. 나지막이 혼자 인사했다. '아빠. 안녕.'


 얼마 전, 친한 언니 아버지의 장례식에 갔다. 언니의 아버지는 일흔이 넘어 한동안 지병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가는 길에 언니를 만나면 뭐라고 말해 주어야 좋을지 고민을 했다. 여든, 아흔을 넘긴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보는 세상에 일흔을 넘겼다고 오래 살다 가셨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여든, 아흔을 넘기셨다고 해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싶었다.

 나를 보자 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멀리서 와줘서 너무 고마워. 고생했어."

 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결국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그저 언니를 안아주었다. 늦둥이 막내딸로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언니의 그리움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니도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언니의 어깨를 도닥이는 것뿐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시간이 좀 지난 후, 언니와 부산여행을 갔다. 둘 다 빈티지를 좋아해서 국제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잔뜩 피곤해진 다리 때문에 근처에서 발 마사지를 받고 숙소로 돌아왔다. 포근한 호텔 침대에 앉아 노곤해진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대화는 자연스레 얼마 전에 있었던 아버지 장례식 이야기로 이어졌다. 돌아가신 아빠와 살아계신 엄마, 그리고 각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니가 질문을 했다.    

"아빠가 없어서 어떤 점이 제일 힘들었어?"

 언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면서 아주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대체로 아주 친한 사람들이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엄음판 위에 조약돌 하나 조심스레 올려놓는 것처럼.

 그런 질문과 태도를 만나면 나는 잠시 고민하게 된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저 이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헤아려 대답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까.' 이렇게 고민을 하는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다지 조심스러운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지나가는 누군가가 불쑥 묻는다고 해도 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정도의 간단한 답변이다.

 나도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음. 사실 나는 아빠가 없어서 뭐가 힘들었는지 잘 몰라. 왜냐하면 아빠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가 있는 삶이 어떤 건지 기억이 잘 안나거든. 아빠는 살아계실 때 너무 바빠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었어. 그래서 딱히 기억나는 일도 몇 개 없고."

 "아. 그렇겠다."

 언니는 대답을 하며 조금 당황한 눈빛을 띄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본 상대가 너무 당황하지 않게 얼른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아빠가 없어서 힘든 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집에 엄마밖에 없어서 힘든 점은 있었어. 엄마가 부재하면 집에 어른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린아이에게 어른이 필요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잖아. 끼니를 챙겨 먹는 것부터, 소풍날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가야 하는데 엄마가 너무 바빠 잊어버리고 출근을 해 버렸다던지,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데리러 오라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비를 쫄딱 맞고 집에 가야 한다던지, 뭐 그런 순간들. 그럴 때가 좀 어려웠던 것 같아. 아빠가 그리운지는 몰랐는데, 엄마는 늘 그리웠었어."  

 "아... 그럴 수 있겠네."

 나의 부가적인 답변에 언니의 당황한 눈빛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엄마가 되고, 제주에서 주말부부를 해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 왜 부, 모가 있어야 아이가 태어나는지. 엄마, 아빠가 꼭 필요한 것보다 아이를 키우는데 어른 두 사람은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왜?"

"어른 혼자 집안의 가장이 되면 나도 모르게 약간 독재를 하게 되더라고. 집 안에 서로 협력도 하고 견제도 하는 두 어른이 있다는 건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아."

 언니는 그래도 주말부부는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자기는 잘 살 자신이 있다고 말을 했다.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의 대화들을 한참 더 나누다가 슬슬 알딸딸 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잔쯤 더 마셨을 때, 나도 모르게 속엣말이 튀어나왔다.

 "희한하지? 없는 건 아빠였는데, 늘 그리운 건 함께 살던 엄마였다는 게. 곁에 없던 아빠보다 늘 곁에 있는 엄마가 더 그리웠어. 참. 엄마는 평생 무슨 죄야."

"..."

 언니는 별 대답이 없었다. 대신 말없이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그 밤에 우리는 사이좋게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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