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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Jul 07. 2023

놀이가 키운 아이

정서의 주춧돌, 봉산마을

 봉산마을.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로 묶여 있어 도시 속에 있음에도 시골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언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 마을 구석구석엔 아침밥만 먹고 집에서 나온 아이들의 놀이가 온종일 가득했다.


 오빠들의 놀이는 언제나 몸을 사용했다.

 동네에 가장 높은 곳은 산과 맞닿아 있었다. 산 아래에는 옆집 아저씨가 항상 놀기 좋게 풀을 바짝 깎아주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은 사시사철 우리의 놀이터였다. 그곳에 삼삼오오 모여 놀다가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매다. 매야!"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하늘에 나타나면 그 새가 진짜 무슨 종류인지는 중요치 않다. 언제나 그 새는 ‘눈알을 파먹는 매’였다. 종이박스를 찢어 길게 만든 음 머리에 뒤집어쓰고 줄줄이 앞사람 허리를 잡고 기차를 만든다.  그리고는 사실 꼬맹이 눈알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눈알 파먹는 매'를 피해 나무가 우거진 숲 속으로 도망을 친다. 도망치는 과정이 야단법석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앞사람 허리를 잡고 가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누군가의 허리를 붙잡고,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눈알 파먹는 매’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없다.

  그때부터는 전쟁놀이가 시작된다. 소나무 숲에 지천으로 널린 솔방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류탄이었다. 맞아도 아프지 않고 심지어 적이 던진 무기를 주워 다시 우리 편의 무기로 쓸 수도 있었다. 각자의 진지에서 상대를 향해 솔방울 수류탄 공격을 퍼붓다 보면 인질을 잡기도 인질이 되기고 한다. 결국 나중엔 누가 누구 편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오빠들 중 누군가가 집에서 가져온 비닐 비료포대로 썰매를 만든다. 비 오면 물썰매, 눈 오면 눈썰매, 평소에는 풀썰매. 오빠들은 꼬맹이들은 하나씩 앞에 태우고 내려간다. 비료 포대 앞쪽에 구멍을 뚫어 묶어놓은 끈은 핸들도 되고, 액셀레이터도 된다. 비료포대 안에 낙엽을 넉넉히 넣어야 그날 밤 꼬리뼈가 무사하다는 사실도 오빠들에게 배다. 아직 어린 오빠들의 미숙운전으로 넘어져 풀밭에 구르기도 하고, 그러다 생채기가 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울면 안 된다. 오빠들은 울면 집에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언니들의 세상은 몸보다는 입을 잘 사용해야 한다.

 미미인형과 핑크 루비가 박힌 왕관을 들고 이웃 언니의 집을 찾으면 이미 동네 언니들이 모여 있었다. 언니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오빠들의 세계보다 조금 더 어려웠다. 언니들은 아직 어린 나를 문간에 세워두고, 받아 줄지 말지 한참 동안 의논을 한 후에 겨우 들여보내준다.

 "오늘 언니들 말 잘 들어야 해."

 반드시 그러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고개를 크게 끄덕여야 무탈히 입장할 수 있다. 언니들은 이미 제일 예쁜 이불을 펴놓고 미미들을 눕혀 재우고 있다.

“엄마랑 아빠는 사고로 죽었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살고 있어.”

 어느 소꿉놀이나 예외 없이 엄마는 늘 죽었다. 엄마가 살아 있으면 소꿉놀이가 진행이 안 됐던 모양이다. 내가 데려온 미미도 함께 재우는 사이 언니들은 새롭게 들어온 미미의 이름과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세팅한다. 잠에서 깨어난 미미들은 늘 요구사항이 많다. 미미가 오늘 회사에 가야 해서 화장을 한다. 물론 화장은 미미가 아우리가 한다. 주로 엄마들에게 버림받은 희한한 색의 섀도와 립스틱이 화장품의 전부였기 때문에 화장을 마친 모습은 우리 집 강아지도 못 알아볼 얼굴이다. 미미들이 배가 고프면 마당에 온갖 잡풀을 뜯어와 냄비에 넣고 끓인다. 조미료 통에 있는 각종 양념들을 때려 넣어 끓이다 냄새에 구역질이 나서 모두 집 밖으로 도망친 적도 있다. 그러다 진짜 배가 고프면 언니들은 라면을 끓여 주거나 김에 밥을 싸주었다. 늘 모자란 양이였지만 항상 꿀맛 같은 점심이었다.   


 친구들과의 세상은 주로 빨래터에서 이루어졌다.

 빨래거리를 들고 냇가로 나가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가면 비슷한 나이의 또래 친구들이 모여 있다. 엄마들은 집에 세탁기가 있어도 굳이 빨래터에 나와 빨래를 했다. 아마 그곳은 엄마들에게도 즐거운 놀이터였었던 것 같다.  널찍한 빨래터에서 조금만 윗물로 오르면 작은 웅덩이들이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고 시원했던지. 여름에 엄마들은 그 물에 수박을 띄워 놓고 빨래를 하곤 했다.

 친구들과 쪼그리고 앉아 가만가만 돌멩이를 들추어 본다. 돌 몇 개를 뒤집지 않고도 숨어있는 가재를 찾을 수 있다. 가재는 뒤로 도망치기 때문에 뒤를 잘 막아야 한다. 각자 챙겨 온 통 가재 채워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가재들은 프라이팬에 빨갛게 볶아져 오후 간식이 되거나 오늘 밤 아빠의 술안주가 될 것이다.

 가재를 잡다가 색깔을 가진 돌멩이를 찾으면 한쪽에 잘 챙겨 둔다. 무르고 색깔이 있는 돌멩이를 단단하고 거친 다른 돌멩이에 문지르면 고운 색의 돌가루가 나온다. 근처에 풀떼기를 뜯어다가 빨간 돌가루에 조물조물 무치면 엄마놀이용 김치가 되고, 돌가루에 물을 묻혀 얼굴 여기저기 찍어 바르면 미스코리아가 된다. 무릎이 아 환자의 무릎에, 배가 아픈 환자의 배에, 어디든 아픈 곳에 쓱쓱 바르면 낫는 병원놀이용 만병통치약이 되기도 한다.  


 온종일을 그렇게 동네에서 놀다 보면 어느새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때가 되면 몇몇은 퇴근하는 아빠를 따라, 몇몇은 데리러 나온 엄마를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면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기다리고 있겠지?

어슴푸레한 골목길은 그제야 비로소 조용해진다.


 돌아보면 그 자연에서 뛰어놀았던 모든 놀이 

 지금 나의 정서 주춧돌이 되었다. 시골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그저 푸르른 풀이 좋고, 노을이 좋고, 바다가 좋고, 하늘이 좋은 정서를 갖게 된 것. 그래서 굳이 시골마을 골라 들어와 오래된 주택을 고쳐 살고 있는 것.

 이 모두가 어쩌면 봉산마을의 연장선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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