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감정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유 Sep 03. 2020

오래오래 건강하소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각별하다. 태어난 후 줄곧 같은 도시에서, 꽤 오랫동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아온 탓도 있겠고, 특히 할아버지가 주신 조금은 유별났던 애정 탓이 있겠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서울대를 졸업하신 인텔리이시다. 6.25 사변을 겪으셨고 퇴직 때까지 쭉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포함해 네 명의 남매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하시는 취미(?)를 갖고 계시다. 그리고 이 같은 진한 관심은 한 세대를 지난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손자 손녀들에게 하는 전화는 조금 더 특별했다. 할아버지는 영어 선생님이셨던 이력을 살려 항상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셨다.

“하우 아 유?”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첫마디는 거의 예외 없이 “하우아유”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아임 파인 땡큐.”

지금도 여전히 할아버지는 영어로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사용되는 영어단어가 매우 한정적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할아버지의 전화가 반가웠던 것은 아니다. 사실 매일같이 걸려오는 할아버지의 전화가 귀찮게 느껴졌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물음이 지나친 간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손녀로서 직접 안부전화를 드리는 게 마땅하건만 저녁 무렵쯤 어김없이 걸려오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부러 받지 않았던 것도 고백하건대 여러 번이다. 핑계를 대자면 어느 날에는 무척 바빴고, 어느 때에는 삶이 벅찼고, 또 어떤 때에는 밝은 목소리로 위장해 전화를 받는 것조차 하기 힘들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튼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가 나빴다.


   할아버지의 지대한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치 알람처럼 이어져오던 전화 때문인지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애틋하다. 아흔을 넘기시고 부쩍 노쇠해지신 게 보이는 요즈음은 더 그렇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 자식들과 손자 손녀를 알아보지 못하실 만큼 중증은 아니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병원에 가는 것 같은 간단한 일도 혼자 해내지 못하신다. 덕분에 할머니를 에스코트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안의 잡일을 도맡게 된 할아버지의 어깨가 볼 때마다 더 꼬부라져가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경미한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는 이전보다 더 행복해 보이신다는 거다. 짧은 내 생각에도 자질구레한 기억에서 놓여나면 구질구질한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 같다. 하여간 한 사람이라도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지난 주말엔 오랫동안 이어지는 코로나 19로 인해 집 안에 갇혀있다시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엄마가 드라이브를 제안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중형차 안에 옹기종기 앉아 두 시간가량 드라이브를 했다. 고질적인 멀미로 인해 차에 앉았다 하면 자버리는 나도 그 날은 드라이브가 끝나는 순간까지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날따라 하늘이 맑고 구름이 예뻤다. 할머니가 워낙에 놀러 다니길 좋아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그 날은 유독 즐거워 보이셨다. 나는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아이처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다. 할머니에게는 눈에 비치는 모든 자연, 이파리 하나까지도 특별한 모양이었다. 지나치는 백일홍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요염할 수 없다며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시는데 내가 다 행복해질 뻔했다. 할머니는 이따금 콧노래를 부르셨고 자주 박수를 치셨다. 아주 즐거워하시는 할머니 덕분에 나도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산세를 보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드라이브가 끝나고는 집안일을 도우러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거실을 쓸고 닦다가 선반에 놓여있는 결혼사진에 눈이 갔다. 예전에도 본 적 있는 사진이었다. 그때도 사진이 무척 단정하고 어여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의 화려한 드레스와 지나치게 장식된 결혼식장보다 훨씬 마음을 안온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용히 아이패드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결혼사진을 담았다. 오래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가까운 나라라도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내 꼴이 가까운 미래에는 소망을 이루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닮은 그림을 그리고, 이렇게 몇 자 끄적이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소서. 그리고 남은 시간 행복만 하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