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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03. 2024

대숲에서 비밀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

저장성 모간산(莫干山) _ 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라 풀이란 사실

차가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툭 틔였던 시야가 가려지고 친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올망졸망 산이 많은 우리나라를 닮은 풍경. 어릴 적 나는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산에 가로막히는 풍경을 답답하다고 느꼈다. 그 때문인지 오랜 세월 나라 밖을 헤맸고 지금도 여전히 이국에 산다. 오랜만에 산에 둘러싸인 풍경을 마주하자, 답답하기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성미 급한 기사는 좁은 산길에서도 기회가 날 때마다 경적을 울리며 추월을 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창밖을 내다보자, 길고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보인다. 그제야 이곳이 모간산(莫干山)이라는 게 실감 났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빽빽한 대숲이 보인다. 꼬챙이처럼 뾰족이 솟은 대나무들. 대나무를 베어낸 줄기를 묶어 트럭이나 경운기에 싣는다. 베어낸 우죽은 짚단을 묶듯 엮어 산처럼 쌓아 놓았다. 이 지역 대나무는 대부분 종이를 만드는데 쓰고, 일부는 젓가락이나 돗자리를 만드는 데 쓴다. 아직 베어내지 않은 대숲의 풍경은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니, 이곳 사람들은 대나무에 기대어 삶을 이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와호장룡에 나오는 대숲에서의 결투 신이 떠오른다. 그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은 건 뛰어난 무술 때문이 아니라 배경이 된 대숲 때문이다. 대나무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가느다란 대나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심하게 구부러지거나 가끔은 꺾이기도 한다. 마음만 흔들려도 대나무는 그 변화를 감지해 함께 흔들린다. 주인공들이 어떤 움직임을 하든 작은 댓잎들이 스치며 사삭 사사삭 소리를 낸다. 겉으로는 두 사람의 무술 대결을 보여주지만, 대숲은 그들 각자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전쟁을 함께 드러낸다. 굳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숲에서 비밀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대숲에서 내가 비밀을 털고 가벼워질 수 있는 이유는 대나무 자신이 누구보다 비밀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꽃을 한 번 피우고 나면 우르르 집단 자살에 들어가는 대나무. 나이테가 없어 나이를 먹지 않는 대나무는 자신이 풀이란 사실을 숨긴다. 속이려 했던 건 아니다.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건 인간이지 대나무가 아니니까. 입을 다문 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나 역시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텅 빈 대나무 가슴속에 가만히 담아두고 오면 되니까. 그 때문에 오늘도 대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몸을 흔들어댄다. 간지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댓잎을 건드리며 스쳐가는 바람과 오래 머물다 가는 햇살이 대숲에서 함께 흔들리며 무예를 겨룬다. 실은 각자의 비밀을 슬그머니 털어내면서.


'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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