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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2. 2020

오 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 볼까

오 센티미터쯤 옮기고 몇 세기쯤 거슬러 올라가

7월이 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한 달씩 여행을 떠난 지 7년째. 

원래는 우간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코로나 19로 우간다는커녕 다섯 달째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하기에 좋지 않은 시절, 

그저 한동안 갇혀 있던 한 뼘짜리 공간을 벗어나 

'오 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 보기로 한다. 


사부작사부작.  


기차를 타고 겨우 1시간 반을 달렸을 뿐인데, 시간은 몇 세기쯤 거꾸로 흘렀다. 마지막 황손이 머무는 고택에 작은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아기자기한 마당의 푸릇푸릇한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쪽마루에 앉아 바라본다. 대문 안에는 채 흐르지 못한 옛 시간이 가만히 고여 있다. 

마지막 황손이 거주하는 승광재


천천히 걷다가 문득 서고, 다시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마침 허리가 뒤틀린 늙은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는 적당히 더운 걸로는 부족하다며, 펄펄 끓어오를 때까지는 꽃을 피우지 않겠다고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지금도 덥다고 걷는 내내 땀을 흘렸는데. 제대로 여름을 아는 나무에게 끌려 가까이 다가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뒤틀린 허리와 다리에 드러낸 상처와 흉터를 보는 데 내 속이 다 아팠다.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슬픔과 얼어붙다 터져버린 고통을 덮어놓고 인내해온 늙은 나무. 그가 밀어낸 이파리들은 또 어찌 그리 푸른빛인지. 포르르 새 한 마리 나뭇가지 살짝 건드리고 날아가는데, 나는 차마 울퉁불퉁한 나무의 흉터를 어루만지지 못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나무가 온몸을 파르르 떠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뜨거움이 절정에 다를 때 피처럼 토해낼 붉은 꽃들을 보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다. 


경기전 내 배롱나무


청국장이나 김치찌개에 밥을 먹고, 뜨거운 커피나 차를 마신다. 어찌 보면 다를 것 없는 하루. 조금 더 느리게 걷고, 조금 더 많이 멈추었을 뿐. 겨우 ‘오 센티미터’ 쯤 옮기고, 몇 세기쯤 거슬러 올라왔을 뿐이니까. 


사부작사부작. 


평범한 듯 다른 하루 @전주



(*이장욱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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