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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6. 2020

내가 깨끗이 빨아 널고 있는 건 옷이 아니다

학동예술마을 코인빨래방

여행지를 정하고 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 등은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편이지만, 숙소만은 미리 예약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열흘 이하의 짧은 여행에서는 여러 모로 편리한 호텔을 선호하지만, 열흘이 넘는 여행에서는 주로 에어비앤비나 VRBO 같은 숙박 공유 플랫폼을 이용한다. 숙소를 고를 때 필터링에 넣는 단 하나의 조건은 그 무엇도 아닌 ‘세탁기’다. 여행 중이라도 매일 깨끗이 빤 옷으로 갈아입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집안일 중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하는 건 빨래뿐이다.  


넓은 공간이나 TV, 주방 시설, 침대, 심지어 여름에 에어컨을 포기하더라도 꼭 세탁기가 있다는 숙소만을 고르지만, 그럼에도 종종 낭패를 경험한다. 세탁기가 고장 나 탈수가 잘 되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어렵게 말려야 한다든지, 빨래를 할 때마다 집주인 공간으로 가서 눈치 보며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이번 여행 첫 숙소에서도 빨래가 문제였다. 한옥의 방 한 칸을 빌려 머무는 곳에서 아침상을 차려주는 아주머니께 물었다. 빨래를 어디서 하면 되냐고. 아주머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곳에 숙박하는 이들 대부분이 1,2박쯤 짧게 머무니 빨래에 대해 문의하는 숙박객은 아마 처음이었나 보다. 

빨래를 꼭 해야 돼? 그럼 빨래 비누 갖다 줄게. 세면대에서 조물조물 빨아서 내놔. 내가 짤순이(탈수기) 돌려줄 테니, 뒷마당에 널면 되지. 


얘기를 자세히 들어 보니 집주인의 세탁기를 사용하게 해주려 했는데, 그 마저도 고장이 났다는 것이다. 그녀가 일부러 나를 골리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숙박객들의 수건이나 이불을 빨아 널어야 하는 그녀가 손빨래를 하는데, 내가 세탁기를 빨리 고쳐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일.  


닷새가 지나자 뭉쳐 놓은 빨랫감의 덩치가 점점 커지고, 갈아입을 깨끗한 옷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눅눅한 빨래 더미가 자꾸 눈에 거슬려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안절부절못하다 급히 지도 앱에서 코인빨래방을 검색했다. 다행히 1킬로미터 조금 넘는 곳에 한 곳이 있다. 빨랫감을 백팩에 가득 채워 아이들과 나눠지고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세탁기에 밀린 빨랫감을 넣고 세제를 넣어 돌린다. 건조기에서 뜨끈한 바람으로 말린 빨래를 개기 시작한다. 보송하게 잘 마른 빨래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대고 비볐다. 따스한 온기와 은은한 향기가 내 속 깊숙이 밀려든다. 


전주 서학동예술마을 내 코인빨래방


그제야 내가 빨래에 왜 이리 집착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종일 세상에 나갔다 돌아오면 아침에 깨끗하고 빳빳했던 옷이 잔뜩 구겨지고 얼룩이 묻거나 나쁜 냄새가 배어 있다. 삶 속에서 엉망으로 구겨지고 얼룩덜룩해진 건 겉으로 보이는 옷만이 아닐 것이다. 매일 후줄근해진 옷을 깨끗이 빨아 널어 말리면서, 어쩌면 나는 눅눅해진 내 마음도 함께 빨아 말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침마다 따뜻한 물로 씻고, 깨끗이 빨아 놓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새로운 자존감을 장착하기라도 한 듯 어깨가 펴진다. 더러움이 씻겨나가고 구김이 펴진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 보송보송한 감촉 속에서 하루를 살아낼 만큼의 용기를 얻는다.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깨끗한 옷들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길을 걷는다. 개성 있게 꾸며진 작은 카페들, 앙증맞은 공예작품과 그림, 꽃이 핀 작은 화분들, 비 온 뒤 맑은 하늘까지. 잔뜩 구겨진 빨랫감을 짊어지고 걸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골목길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 온다.


전주 서학동예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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