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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6. 2020

사랑, 안개비처럼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푹 젖어드는

사랑은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 같은 것

아이들과 내가 해외로 여행을 떠날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이 주말에 잠깐 여행에 합류하는 건. 마침 첫 목적지가 전주였고, 전주는 서울에서 KTX로 한 시간 반이면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금요일 저녁 남편이 KTX를 타고 전주로 내려오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창극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전주마당창극의 공연 '변사또 생일잔치'


창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 한 명이 선물을 잔뜩 들고 무대에 올랐다. 평소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나답지 않게 손을 번쩍 들고 무대에 올라 춤까지 추었다. 덕분에 양손에 전주 특산물인 모주와 막걸리를 선물로 받아 들고 내려왔다. 창극 공연을 보는 내내 사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여행지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지만, 역시나 부끄러웠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주룩주룩 내리는 빗길을 타박타박 걸으면서 생각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이런 객기는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 양손에 무거운 선물을 들고 걸어가는 어두운 길,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길 끝에 가면 그가 있다.  


부끄러운 광경 _ 내 성격에 이런 일은 원래 없다


내 속에 있지도 않은 용기가 솟아 나온 건 그가 내게로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게 남편은 늘 버팀목이다. 아장아장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한결같이 서 있는 엄마처럼, 밖에서 잔뜩 주눅 들어 돌아오면 나 대신 나가 싸워줄 오빠처럼 든든한. 그가 불 꺼진 내 가슴에 불쏘시개가 되어 불을 지펴주는지, 곁에 있으면 겁쟁이인 내게도 용기 같은 것이 불끈 치솟곤 한다. 


전주에서 남편과 함께한 이틀

이틀은 금세 지나갔다. 일요일 저녁 그가 손을 흔들며 역으로 향한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가슴속이 시큰하다. 따뜻한 차를 마셔보지만 어쩐지 시린 속이 덥혀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하는 주말 동안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가 내렸다. 비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 우산을 펴지 않은 채 한참을 걷고 나면 언제 젖었는지 머리와 옷이 푹 젖어 있었다. 그의 사랑이 꼭 안개비 같다.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이 내리는 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안개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가운데 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푹 젖어있다. 그 사랑에 천천히 젖어든 나는 그의 빈자리가 늘 시리다. 젖은 옷을 입고 걸을 때처럼 으슬으슬하고.
 

사랑은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 같은 것. 내 의지나 계획과는 관계없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리는 비에 젖어들듯 그렇게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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