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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4. 2020

벽화를 그렸다는 게 뭐겠어요? 개발은 없다는 거지

전주 자만벽화마을

벽화를 그렸다는 게 뭐겠어요? 개발은 없다는 거지.


택시 기사의 그 한 마디가 없었다면, 자만벽화마을을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은 나라에 이미 100여 개가 넘는 벽화마을이 있으니, 굳이 전주에서까지 찾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여러 번 보았던 벽화마을, 가시처럼 찌른 그 한 마디 때문에 가 보고 싶어 졌다.


전주 자만벽화마을


해질 무렵 우산을 들고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길을 올랐다. 비 때문인지 진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바위에 낀 이끼나 풀냄새, 흙냄새 같은 청량한 비 냄새가 아니라 불쾌한 분변 냄새였다. 냄새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열린 쪽대문 옆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작은 재래식 화장실이 보인다. 유리창도 끼워지지 않은 손바닥만 한 작은 구멍에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곳을 지나가는 우리가 내는 소음에 놀라 바로 나오지도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있을 누군가가 문득 상상이 되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숨죽이고 있을 이를 생각하니 얼른 그곳을 피하고 싶었다.


이곳도 다른 벽화마을처럼 한동안 유행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는지, 몇 채 집은 이미 카페와 작은 식당으로 바뀌어 있다. 요란하게 채색된 벽으로 둘러싸인 카페는 어서 들어와 ‘인생 샷’을 건지라고 손짓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손짓마저 늙은 퇴기의 그것처럼 호졸근해 얼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벽마다 채색되고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곳곳에 금가고 부서진 흔적을 지우고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조야한 그림과 채색이 궁상맞은 모습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혹시 상상력 넘치는 작품이나 그라피티처럼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림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구석구석 돌아보았으나 그런 그림은 만날 수 없었다. 대부분 잘 알려진 캐릭터를 베껴 놓은 그림이었고, 그마저도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있었다. 


전주 자만벽화마을


어딘가는 지나치고 무분별한 개발로 나비와 뱀들이 떠나가고, 어딘가는 개발 대신 페인트 칠로 대충 덮어버려 떠나지도 못하는 이들을 숨 막히게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반쯤 하다 마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죠.”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중

문득 연민에 관한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벽화마을 역시 시작은 낙후된 지역을 돕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선의가 제대로 다루지 못한 연민처럼 오히려 독이 된 것은 아닌지. 소설 속 주인공이 연민하던 여인을 결국 자살로 몰고 갔듯이.  


자만벽화마을의 가파른 골목길을 내려오는데 빗물 때문에 몹시 미끄러웠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조심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품고 있는 선의나 연민도 이처럼 마지막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히 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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