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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5. 2020

진정 '게미진 맛'을 맛보고 싶다면

화려한 한상차림보다 허름한 백반집이 낫다

전라도로 여행을 간다니 많은 사람들이 음식 이야기를 했다. 전라도 여행 관련한 책들도 음식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래서인지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제로 전주에서 보낸 지난 며칠, 매 끼니마다 맛있게 먹었다. 평소 밥 반 공기쯤 먹는 데 한 시간씩 걸리던 아이들이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우고 밥을 더 달라고 할 정도였다. 백반 집이나 분식집, 작은 식당에서 먹는 청국장이나 김치찌개, 콩나물국밥, 나물이나 장아찌, 김치 등이 모두 맛깔스러웠다. 


전라도 여행 가기 전 읽은 책들


1인분에 5천 원짜리 백반

그래서인지 제대로 한상차림을 내오는 식당에 대한 기대가 컸다. 유명한 골목을 찾아 가 여행책자에서 추천한 식당에 들어갔다.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들이 금세 상 위에 차려지는데, 너른 상 위에 반찬을 다 올릴 수 없어 그릇을 포개 놓기도 했다. 수저를 들기 전에 이미 반찬의 가짓수에 황홀해지며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식당에서 나올 때 표정은 그리 밝을 수만은 없었다.  


'막걸리 골목' -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을 때 나오는 안주. 주전자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반찬이 십여 가지씩 추가 된다.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에밀리 디킨슨의 288번 시 ‘무명인’ 중


식당에서 나오는데 한바탕 개구리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듣고 나온 기분이었다. 배는 몹시 불렀음에도 속이 헛헛했고, 입맛이 썼다. 누가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배신감마저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유명해지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변했을 것이다. 관광객의 특성상 다시 볼 손님이 아니니까. 그냥 내어주던 반찬들을 추가 비용을 내야 더 내온다든지, 음식을 미리 해서 잔뜩 담아놓고 내어 주느라 다 식은 반찬이 주를 이룬다든지. 그러면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벌 수 있을 테니까. 


사실 한상 차람에 실망한 데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좇은 내 탓이 더 크다. 사진에 보이는 화려한 한상차림에 매혹되어 일부러 가장 유명하다는 곳을 고르고 골라 갔으니까. 화려함 뒤에 그늘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호남 지방에 내려가 웬만한 식당에 들어가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반찬이 그득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을 수 있다. … 그런 차림은 일제 강점기에 목포나 군산 등지 미두장에 투기꾼들이 모여들면서 생겨난 여관의 밥상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중


그러고 보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내는 한상차림도 '일제 강점기의 미두장'이라는 그늘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오히려 반찬 가짓수만 많고  먹을 게 없는 식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야 숙소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동네 사람들이 많이 가는 허름한 백반집에 가보라고 귀띔해준 이유를 알 것 같다. 


떠나기 전 날 이미 전라도를 여행한 적 있는 친구가 해 준 말이 기억난다. 친구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다 역 앞에 있는 낡은 식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배는 고팠기에. 콩나물국밥을 기대 없이 시켰는데, 먹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너무 맛이 있어서. 그리고 지금도 그날 먹었던 국밥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그 맛은 분명 ‘게미진’ 맛이었으리라. ‘게미진 맛’이란 전라도 사투리로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당기고 그리워지는 맛을 말한다. 진정 ‘게미진 맛’은 유명인들의 사진이 잔뜩 붙은 식당이 아니라, 우연히 찾아 들어간 낡고 허름한 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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