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당하고도 살아남기
변호사도, 의사도, 그 어떤 똑똑이라도 당하는 게 사기다.
마음먹고 속이려고 작정한 사람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고 한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지금 당신의 삶에 날벼락같이 찾아온 사기라는 사건으로 인해 고통 속에 있는 분이 있다면 진심을 담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잘해보고 싶어서 했던 일이라는 거 안다.
먼저 당해봤기에.. 나는 안다..
다만..
이제부터는 정신 차려야 한다.
사기당해서 돈도 잃고 거기에 빚까지 생기고, 수치심과 배신감에 온 인생이 끝난 거 같다는 거 안다.
하지만 당신 인생! 결코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놓지 않는 한 내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한 죽고 싶게 막막한 이 상황도 파도치듯 시간이 지나면 끝난다.
폭풍우가 세차게 불어올 때는 일단 몸을 바짝 웅크리고 부상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와 당신의 삶을 지켜줘라.
그 폭풍우 속에서 몸이 너무 상하지 않게. 그리고 마음이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당신이 지켜줘야 한다.
그렇게 그 악몽 같은 시간 속에서 일단 죽지 않고 버텨내고, 조금씩 숨쉴틈을 찾고, 너무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다시 당신 자신을 일으켜 세우면 된다.
꿈꾸던 삶을 놓치고,
가족들까지 엉망진창 나락으로 빠뜨린 거 같은 자괴감에 죽고 싶겠지만,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볼 낯이 없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사건이 지나가고 당신이 계속 노력한다면.. 다시 당신이 원하는 삶을 가질 기회는 올 것이다.
그게 비록 생각보다 쉽지 않고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온다.
나는 그랬었다.
사기를 당한 뒤 나는 매일 밤 시간을 되 돌리는 상상을 했었다.
내가 이런 일을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좀 더 빨리 눈치챌 수 없었을까? 그때 이쪽으로 이직하지 않고 그냥 다니던 회사에 정착을 했어야 했는데…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시간을 뒤로 감고 감아도.. 단순히 1~2년 뒤로 돌아간다고 해결될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통째로 흔드는 사건이었다.
나에게 닥친 사건은 전 직장 대표가 회사자금을 횡령/배임하는 과정에서 당한 사기였다.
그 대표를 알게 된 게 아마도 2012년.. 프로젝트 조인 형식으로 두어 번 함께 일을 하다가 정식으로 이직제안을 받고 그 회사로 옮긴 건 결혼시기 즈음인 2013년이었다.
결혼 이후 첫아이가 바로 생겼기에 이직 후 회사를 다니는 나의 마음가짐은 결연했다.
정말 열심히 일해서 아이도 잘 키우고, 내 집마련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겠다!라는 부모모드가 발동되었기에 결혼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이직 후의 회사에서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무엇보다.. 그 대표와 회사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깔려있었고, 초기멤버로서의 동반성장을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자세였다.
앞서 밝혔지만 나는 태생이 긍정적이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남을 잘 의심을 못 하고 단점보다 장점을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한번 믿고 함께 하기로 한 사람을 계속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추적하는 행동 등은 잘하지 않고, 이왕 시작하기로 하였다며 믿고 가장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나는 그랬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명실상부 그 회사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3년을 넘게 일하다가 2016년 말부터 독립된 회사를 차리고자 홀로서기를 준비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회사독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 직장 대표와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내가 직접 만든 조직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나를 향한 직장 내 따돌림이 있었고, 하극상이 점점 발생했다.
대표는 그 분위기에 대해 인지하고 본인이 알아서 조치하겠다, 굳이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걱정 말라, 해결하겠다는 식의 상담을 진행해 놓고 아무런 조치가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황을 2달 넘게 지켜보면서 ‘아.. 이건 나더러 나가는 말이구나..’라는 시그널로 이해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들으니 내 팀원들과 나 사이에서 그런 따돌림의 분위기를 만든 건 바로 그 대표였다.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017년 1월 독립하고 내 회사를 차렸다.
그 과정에서 마음 상함이 있다고 해서 전 회사와 마무리를 잘 못 지으면 내 고객들이 행여라도 피해를 입을까 싶어서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진 것을 느낀 건 5월이었다.
당시 가족여행 중이었던 시기에 내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 직장 대표가 직접 본인에게 컨택해서 투자를 권유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업계의 암묵적 합의로 다른 이의 고객에게 직접 연락은 상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랬는지 화도 나고 상황이 의심스러웠다.
나는 여행을 마치고 전 직장 대표를 만났다.
그는 그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고 본인이 큰 실수를 했다며 다시는 그런 행동이 없을 거라며 사과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지만.. 더 이상 캐고 묻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나는 이미 외부인이었기에 그 사건은 그렇게 주의각성 식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2주 뒤쯤 전 직장대표는 잠적을 했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전 직장으로 사람들은 몰려갔고, 대책회의랍시고 상황을 파악해 보는 게 시작되었지만,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거짓말이구나.. 하는 것만 파악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입가경이었다.
나는 열정적이고 순진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나는 알고 있는 것도 없는 주제에 상황 수습에는 적극적이었다.
전 직장 대표의 집을 찾아가고, 전 직장으로 매일 나가면서 남은 사람들과 회의하고, 고객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기 위한 자료를 만들고, 사라진 전 직장 대표를 찾기 위해 처갓집과 강원도 본가까지도 찾아갔다.
그러고 2주 정도가 지나고 그 전직장대표는 경찰서에 자수하는 형식으로 행방을 드러냈다.
그러자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잠적한 전 직장 대표만 찾으면 뭔가 해결될 거라 기대를 했는데 막상 대표가 나타나도 달라지는 게 없자 사람들은 그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공범으로 몰아서 책임을 돌리고 비난하고 공격했다. 어떡해서든 누군가에든 보상을 받기 위해 변호사를 통해 조언되는 방식이 그런 것이었던 거다.
그 시간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은 건 사태수습에 가장 앞장섰던 나였다.
내 고객뿐 아니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내 고객이 아닌 사람까지 나를 고소했다. 그냥 일단 나를 다 엮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처음에는 임신이 된 줄도 몰랐다.
5월부터 조짐을 보이고 6월에 본격적 사건이 터진 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7월쯤 되었을 때 입맛이 계속 없고, 뭘 먹어도 헛구역질이 계속 올라오길래 스트레스로 몸이 심하게 상했나 보다 생각했다.
점점 속이 울렁거리고 토하는 지경까지 가자 심각성을 느끼고 일단 퇴근길에 약국을 들렀다.
위장약을 주는 약사 선생님이 툭 던지신 ‘임신가능 여부없으시죠?’라는 말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테스터기를 사 왔고,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너무나도 선명한 두줄이 나왔다.
다음 날 찾은 산부인과에서 초음파검사를 통해 젤리곰처럼 양팔 양다리를 움직이는 둘째의 모습을 확인하자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다.
아이의 태명은 “희망이”라고 지었다.
임신한 상태로 법원과 경찰서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재판장에서 죄수복을 입은 전 직장 대표의 모습을 보니 분노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고소장이 접수되고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로 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최악의 상황을 경고하는 변호사의 말에 두려움에 가슴이 타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모든 풍지평파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그 시간을 보냈다.
임신상태에서는 체중은 계속 빠졌고 만삭이 되어도 고작 6킬로밖에 찌지 않아서 배만 나오고 나머지 부위는 뼈만 앙상한 상태의 모습이었다. 이때 나는 급격한 스트레스와 체중변화로 한랭알레르기가 생겼고, 찬바람을 맞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돈 앞에는 의리도, 우정도 필요 없고, 가족도 무너진다.
사람들은 나를 그 전 직장 대표와 공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내 과거를 파헤치며 무례함을 넘어 악의를 품고 지난 나의 삶 속의 모든 노력을 망가뜨리면서 나를 신용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횡령 배임과정에서 가장 큰 금전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이기도 했다.
수년간 일해 모은 수십억 원의 돈이 날아갔고, 당장의 현금흐름이 끊겼으며, 갚아야 할 빚이 점점 늘어만 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기를 당한 피해로 눈물짓는 오랜 인연의 고객들을 보며 나는 나의 안위와 내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털어서 우선 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어떡해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다..라고 또 순진한 긍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과연 이 상황이 끝나기는 하는 건지. 수습이 가능한 건지를 모르겠던 그저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고 흘러갔던 시간이었다.
2018년 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차가운 거실 바닥에 앉아 나는 내 짐을 정리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니.. 쓸데없는 기록들은 삭제하고 가고 싶어졌다. 한때는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이 사건과 연루되며 가장 먼저 뒤에서 칼을 꽂기 시작한 지인들의 기록을 지우고, 이고 지고 소중히 보유했던 다이어리와 사진 등을 추억들을 버렸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이 울고, 하늘을 원망하며 제발 시간을 다시 돌려달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돌려야 될지 가늠도 안되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아예 자유로워지려면 그 직업을 갖기 전인 2007년까지도 돌아가야 할 것 만 같았다.
나는 뭔가를 알고 선택을 했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사건에 휩쓸리고, 오히려 몰랐기에 더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것이기에 뭔가 단순히 하나의 선택을 바꾼다고 해서 없어지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가고 둘째가 태어났다.
돈이 없어서 출산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친언니가 집 앞 조리원을 끊어주었다.
조리원에서도 나는 피투자사에게 전화해서 울고불고하느라 정신없는 순간이 계속 이어졌다.
투자금을 회수해서 다만 얼마라도 피해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애쓰는 동안 우리 집은 점점 가난해졌다.
남편은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침에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나와는 최대한 덜 마주치는 것으로 나에 대한 비난을 내뱉지 않고 참아주고 있었다. 나는 내내 혼자였다.
그 시간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계속 곪아들어갔다.
둘째를 낳고, 친정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 집으로 이사하는 날 욕조가 없는 화장실을 보고 당시 5살이었던 큰아들이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작은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어?‘울컥울컥 하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에 그림자가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듯, 행복한 듯, 웃음이 나는 듯한 연기를 했다.
그 사건 이후 남편과의 대화는 싸움이 전부였던 시간이었다. 임신 출산 과정에서도 따뜻한 대화는 거의 없었다. 불화는 반복되는 싸움을 낳았기에 그저 최대한의 노력이 침묵이었다.
그저 애 앞에서는.. 그리고 갓난쟁이 둘째를 보러 와주는 친정엄마 앞에서는 이제는 다 지나갔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를 할 뿐이었다.
사기사건이 일어난 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피해자를 만나서 대신 사죄하고 원망을 듣고 욕먹는 과정을 엄청나게 반복했었다. 그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억지로 웃을라고 해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고 우울감에 깊게 빠져들어서 얼굴이 나날이 어두워져 갔다.
사건 이후 유난히 꾸준하게 나를 괴롭혀온 피해자의 오빠라는 남자가 있었다.
평소에도 그의 말투는 예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어느 날 밤에는 술 취한 상태로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쌍욕을 해대는 사건이 있었다.
전화기 밖으로까지 터져 나오는 그 남자의 욕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 전화에서 술 취한 그 남자는 내 아이들까지 들먹이면서 나에게 온갖 소리를 쏟아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나는 피해자들과의 대화에서 싸우거나 내 주장을 펼친 적이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어서 나도 소리를 지르면서 싸워댔다.
온 몸속의 혈관이 폭발할 것처럼 열이 올랐고, 분노와 절망감에 미칠 것 같았다. 아직 아이가 잠들지 않은 상태였기에 급하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엌으로 갔지만 쉽사리 평정이 찾아지지가 않았다. 마음이 미칠 것 같은데 아이를 보면 웃어줘야 한다는 게.. 점점 정신이상이 될 거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생긴 버릇 중 하나가 저녁 시간 이후부터는 핸드폰을 방해금지모드로 바꾸는 것이었다.
2025년인 지금도 나는 밤에는 방해금지모드로 해두고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다.
일일이 적자면 끝도 없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절망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무능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말만을 반복하며 점점 나는 자존감을 잃으며 소멸될 듯이 작아졌다.
“사기”라는 사건은 그렇게 인생을 망가뜨린다.
그 시간에서 오롯이 혼자 고립된 내가 세상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더 좋은 거, 더 값진 거를 해주고 싶지만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고 해 줄 수 없었기에 내가 결심한 것은 그저 옆에 살아있어 주는 엄마는 되는 거였다.
아이 옆에서 살아있고, 웃어주고, 최선을 다해 안아주는… 어쩌면 미취학과 갓난쟁이의 아이의 삶에는 전부인 그것.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인 그것.
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해주기 위해 살아남아있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전 직장 대표가 사라지자 대신 나를 들들 볶기 시작하던 사람들은 어떡해서든 그 책임을 나에게 지우고 나에게서 보상을 받아갔다.
나는 그만큼도 독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단기간에 큰 충격을 몰아 받아서 인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이 겹쳐서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무른 사람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나의 영광도 불행도, 아무것도 모르는 환경에 그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존재로 놓이는 게 그때 나의 꿈이었다.
평범함…이라는 것이 비스무리하게나마 나에게 다시 돌아오기까지 6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 6년 동안 눈뜨고 싶지 않았던 시간은 1년, 눈떠서 핸드폰 보는 게 무서웠던 시간은 2년, 뭔가를 다시 해보고자 결심하게 되는 3년, 다시 희망이 꺾이던 4년…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불행은 바닥을 빨리 마주하게 되는 게 차라리 덜 괴롭다.
가장 힘든 건, 이게 바닥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어디까지 떨어질지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주는 공포가 사람을 갉아먹는다.
나는 만약 사기를 당해 금전적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남은 인생 모든 것을 걸고 지독하게 굴지 못할 거 같으면, 그냥 빨리 잊어버리고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들라고 말하고 싶다.
잊어버리자.
털어버리자.
이런 것이 자의로 선택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전 직장 대표에게 내가 피해를 입은 되찾지 못한 내 돈도 수억 원에 육박한다.
나는 그걸 되찾겠다고 감옥에 간 그 사람을, 그들의 가족을.. 집요하게 계속 기다리고 쫓아다니고.. 그렇게 할 의지가 없었다. 그건 의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시간도 필요한 일이다.
나는 돈도 없었고, 갓난쟁이를 키워내야 해서 시간도 체력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그걸 해내려면 그 악몽 같은 기억을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고 곱씹어야 한다.
나는 그게 더 나를 망가뜨리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2025년의 나는 불확실함이 주는 불안의 공포시간은 지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금전적으로 극복해 낸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어디까지 해결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 건지 등이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을 계속 걸어갔다.
내 남편과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덜 젖게 해주고 싶어서 질척 질척한 진흙 같은 그 터널 안에서 몸이 점점 빨려 들어갔지만 깨끔발을 들고 내 가족들을 머리 위로 올리고 이를 악물고 걸어 나갔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온몸으로 막아가며 너희를 지켜주고 있는 게 안 보이냐며, 터널이 어둡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는 게 그렇게 힘드냐 라며 터널 안의 시간 속에서도 끝없는 불행배틀이 이어졌다.
어찌어찌 그 터널은 빠져나왔지만 몸에는 온통 진흙과 물이 묻어서 여전히 춥고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리고 털어내고 씻으면 된다.
터널은 일단 끝났다.
당신에게도 그 긴 터널의 끝은 찾아올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
당신이 포기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