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실패하고도 살아남기
여러 가지 투자대상 중 나의 투자대상은 부동산이었다.
40대로서 부동산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2020년~2021년쯤이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에 어떤 광풍을 몰아쳤던 시기였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금리와 수년간 이어진 부동산 성장기가 맞물려 2021년쯤 되서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천정부지로 올라있는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가난해지는.. 그런 시기였다.
나의 부동산 투자경력은 2014년부터 시작된다.
나는 2013년 결혼을 하고 2014년에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내 집마련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아마도 그 당시부터 현금흐름이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첫 신혼집 임대인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기에 겪은 에피소드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혼집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는 이러하다.
결혼하고 다음 해 첫 아이가 태어났고 좀 더 나은 공간을 주고자 계약기간에 맞춰서 이사를 준비했는데 전세만기일까지 다른 임차인이 안 구해져서 제 날짜에 전세금을 못 돌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 부분을 조율해야 되는 것과 관련하여 임대인과 통화를 하는 과정이었다.
서로 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통화 도중에 ‘저기.. 근데 저희가 계약 만료일 날짜에 맞춰서 이미 이사 갈 집을 구해놓은 상황이거든요..’라고 조심스레 상황을 설명하니 임대인은 갑자기 흥분하며 나에게 계약기간도 안 끝났는데 벌써 집을 구하면 어떡하냐고 화를 내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세입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집주인에게 ‘저기’라는 지칭을 하냐며 화를 냈다. 순식간에 임차인인 내 신분이 조선시대 노비가 되는 분위기에 어이가 없었던 통화였다.
그 당시 신혼집은 동작구였고 회사는 선릉역 근방이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우연히 지금의 신논현역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기다리면서 아파트 분양 관련 전광판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쉬는 날 남편과 함께 분양사무실 현장을 공부 삼아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방문한 분양사무실에서 나는 내 인생 첫 집으로 강남의 미분양아파트를 덜컥 계약하게 되었다. 초긍정마인드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분양 완공까지는 3년이 넘는 시간이 남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위해 필요한 자금은 2,000만원만 있으면 되니까 가능하잖아? 하는 식의 밀어붙이기 전법이었다. 막무가내처럼 보였지만 지금 돌아봐도 그 순간의 결정은 탁월했다. 부동산은 2014년 바닥을 찍고 상승장의 시작을 알리던 시기였다.
그 뒤로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열심히 일했다.
완공은 2017년 6월이었고, 그날에 맞춰서 남은 약 3년여의 시간 동안 최대한 돈을 많이 비축해서 대출액을 최소화하면서 입주를 하는 게 나의 꿈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분양으로 아파트를 계약하는 과정에 눈을 떴다. 그 뒤로 분양에 관련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강남 3구를 중심으로 노른자땅에서 열리는 분양사무실 현장은 다 찾아다니면서 나만의 노하우와 남다른 현장경험을 쌓아갔다. 알짜배기 미분양 아파트를 잡는 노하우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게 가능하다고?’라는 식의 반응을 나오게 하는 말 그대로 현장경험이다.
2017년에 사기사건이 터지기까지 내가 미분양으로 잡은 아파트는 총3채였다. 다 내로라하는 브랜드의 알짜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를 내가 모두 갖고 있었다면 3채의 가격이 현재 거래액으로 100억에 육박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타깝게도 그때의 아파트들은 현재 내 손에 남아있는 게 없다. 2017년에 사기사건이 터지면서 그 뒤로 분양 상태에서 계약금을 날리는 상황도 있었기에 차라리 분양을 받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 손에 현금이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사건이 터지는 시기가 6개월만 앞당겨졌거나, 6개월만 뒤에 터졌어도 나는 내 아파트들을 지킬 수 있었을 거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가슴에 묻은 지난 이야기이다. 말 꺼내기 시작하면 가슴만 아프기에 나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고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아파트와 관련한 경험들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나만 아는 비법이 되었고 내 머리에는 “부동산은 반드시 돈이 된다”라는 개념이 새겨졌다.
2017년에서 2019년까지 최악의 암흑기를 지내고 나는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부동산을 다시 공부해서 투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자산상승의 경험이 몸에 새겨져 있는 기분이었다.
온라인판매를 시작하고 돈이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건 정부에서 코로나대출을 풀기 시작한 2021년부터였다. 매출자료가 있으니 사업자를 위한 저금리 코로나정책자금 대출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이게 추후의 불행의 씨앗이 되는 시초였다.
위시리스트에 담아 두었던 부동산 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카테고리를 늘려갔다.
부동산 경매 관련 정규과정을 듣던 중에 특강으로 열린 수익형 부동산에 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강의를 듣고 내가 아파트 다음으로 뻗어나간 부동산 영역은 ‘지식산업센터’였다.
지식산업센터는 2020년에 유례없던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500만원~1,000만원 정도의 소액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처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랬던 이유는 소액으로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과 더불어 규제가 한창 심해지는 아파트와 다르게 지식산업센터는 대출이라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핫한 지역의 유망 있는 지식산업센터를 분양받고자 있지도 않은 인맥싸움이 펼쳐졌다. 2020년에 처음 소액투자로 시작한 지식산업센터에 대한 나의 경험은 2021년 마치 내가 뭐라도 된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파트에 대한 규제가 점점 심해지면서 돈이 갈 곳을 잃자 지식산업센터를 향한 투자자가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년정도 살짝 먼저 시작했던 나는 21년도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투자자들은 가져보기도 힘든 지역의 분양권을 보유하고 있게 되었고, 그게 나를 또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난 쫌 되는데? 이 정도면 제대로 하고 있는 거지!”라는 큰 착각의 늪이었다.
대출 무서운 줄 모르고 분양을 받기 시작했다.
지식산업센터는 아파트와 다른 상업시설이었기에 주택담보대출처럼 규제가 쎄지 않았다. 분양가의 90% 심지어 95%까지 대출이 나오는 부동산이었으며, 심지어 대출은 사업자대출로 분류가 되어져 있었다.
500만원, 1,000만원만 있으면 지식산업센터 개수를 쑥쑥 늘릴 수 있었다.
21년 22년까지만 해도 지식산업센터 분양권 매매는 활발하게 성행되었다.
500만원 넣고 계약해서 완공되기 전에 분양권을 매도하면 100% 200% 수익이 가능했고 수없이 많은 성공신화가 들려왔다. 나도 두어 번은 그렇게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덩달아 성행되었던 것이 지방아파트 소액투자였다.
갭투자 금액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망아파트를 찾아내서 500만 원 1000만 원 미만의 금액으로 지방아파트를 보유하고 상승차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대출조차 필요하지 않은 갭투자 방식에 현혹되어 많은 초보투자자들이 불나방처럼 이곳저곳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다들 ‘소액투자’라는 가림막에 눈이 가려져서 사실 그 소액은 엄청난 대출(혹은 보증금)이라는 금액을 등에 업고 있는 돈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 장기화된 부동산 상승시장이 가져다준 꽃그림이었다.
저금리가 끝나고 금리상승이 하루가 다르게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되면서 환상을 깨지고 시장에는 찬물이 끼얹어졌다.
22년도 23년도의 지식산업센터 시장은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완공 전에 분양권 매매가 진행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매수희망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완공이 코 앞이지만 다 같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임차물량이므로 임차인은 구해지지 않는다.
계약금포기(계포)에 마이너스프리미엄(마피)까지 붙여도 매수희망자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출을 받아서 잔금을 치룬다.
매달 나가야 하는 이자가 생겼고, 완공 이후에는 여기에 적지 않은 관리비까지 부담되는 상황으로 나가는 비용이 점점 늘어난다.
지식산업센터 투자의 메리트가 ‘소액투자’였기에 쉬운 접근성으로 인해 더 숨통을 옥죄게 되었다. 겁 없이 받아둔 여러 개의 지식산업센터들이 하나같이 완공시기가 다가오면서 모두 다 공실리스크를 가져왔다. 처음 한두 개는 한숨은 나오지만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멘붕상태에 빠지고 급기야는 여러 번의 대출이 반복되면서 일단 대출이 나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저신용상태가 되어버린다.
없는 돈으로, 대출의 힘으로, 계속 잔금을 치르는 상황이 펼쳐졌고, 매달 나가야 하는 이자와 부대비용이 수백만 원이 육박하는 상태로 증가했다.
투자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출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던 것이다.
아파트 쪽 소액투자도 마찬가지였다. 갭투자를 진행하고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니 전세금을 점점 낮춰야 했고 역전세가 되는 게 당연한 결과가 되었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것도 난관이지만, 새로운 세입자가 구해지면 낮아진 임차보증금으로 인해 토해내야 하는 돈이 적게는 1,000만원 많게는 억 단위까지 생긴다. 그런 것도 하나둘 쌓이다 보니 점점 돈을 구할 수가 없는 재정상태가 된다.
2017년에 사기를 당하고 5년 뒤에 벌어진 투자실패였다.
2020년, 2021년에 뿌려진 대출의 씨앗들은 2022년, 2023년에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그 열매가 터지면서 우리 삶을 검게 물들여갔다. 악몽의 다시 시작되었다.
2022년 여름, 우리는 서울의 삶을 접고 경기도 파주로 이사를 했다.
서울은 전세가가 너무 올라서 서울에서의 이사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던 상황이었다.
경기도로 이동하게 된 배경이 어찌 되었든 나는 경기도로 이사 온 것은 크게 불만이 없었다. 같은 비용을 들여서 아이들에게 좋은 주거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다만, 나와 남편의 직주근접은 포기해야 했다.
남편은 근무지가 강남이다.
나는 당시 운영하고 있던 매장이 서대문구에 있었다.
출퇴근에 왕복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평안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부동산으로 인해 다시 힘들어지는 시간이 시작되면서 우리 부부는 내가 사기를 당해서 삶이 무너졌던 2017년 시기보다 더 크게, 빈번하게 부부싸움을 했다.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부동산투자가 남편명의로 주로 되다 보니, 남편은 2017년보다 더 큰 압박감을 느꼈을 거다.
지난 사기로 인한 피해는 대부분의 일이 내 이름으로 된 사건들이 많았기에 돈이 없어 힘들어진 것은 동일했지만, 남편이 신용적으로 뭔가 압박을 받거나 하진 않았던 시간이었다면 이번엔 달랐다. 임차인의 전화도, 은행에서의 독촉연락도, 납부를 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거라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안내문자도 다 남편에게 쏟아졌다.
나는 차라리 내가 그 연락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매번 생각했다. 남편에게 그 내용을 토스받는 상황에서 서로 간의 스트레스가 늘어갔고 말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내용을 전달하는 태도에도 서운했고, 눈물이 났고, 화가 나고 원망이 일어났다.
긴긴 공실 끝에 임차인을 구한 날이 되거나, 예상했던 것보다 이자율이 낮게 나오거나, 계산보다 세금을 덜 내게 되는 식의 나름의 좋은 이슈를 남편에게 공유해도 ‘그래봤자 뭐 해..’라는 식의 비관적인 반응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 시기에 남편도 깊은 우울증에 빠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나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한때는 끊임없는 손님이 드나들던 매장에 하루에 1~2명의 손님방문만 이어지곤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장운영만으로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자를 갚을 수가 없었다.
초기에 잘 투자했던 알짜배기들을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부족한 자금들을 메꿔갔다. 그 시기에는 매일 머릿속에는 돈돈돈 이자이자이자이자 그 생각뿐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 시기까지도 지난 사기의 영향으로 주기적으로 채권자들이 나타나서 괴롭힘을 당하는 게 반복되던 시기였다.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고립되고 피폐해져 갔다.
매장운영과 더불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 도전은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시작한 집 근처 샌드위치가게였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샌드위치 가게에서 10시부터 2시까지 근무하고 바로 내 매장으로 출근을 했다. 3시부터 10시까지 매장운영을 하고 자정이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끝이 났다. 그래도 돈은 여전히 부족했다.
두 달 정도 위의 방식을 진행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매장 운영을 마치고 새벽에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잠을 포기하기로 한 선택이었다. 밤 11시부터~새벽 5시까지 동대문 남평화 상가 가방 도매점에서 일을 했다.
이런 식의 비효율적인 시간대의 일을 선택한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약 2년 정도 매장운영을 하면서 저녁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해주지 못한 날이 길어졌기에 아침밥과 등원만큼은 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과 추억을 쌓으며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새벽까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정말 몸이 꺼질 듯이 피곤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한 번도 괜찮냐고 물어봐주지 않았다. 남편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새벽알바를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오전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2시까지 잠을 자는 4~5시간의 쪽잠이 누군가에게는 게으름처럼 비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만을 팔아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쥔 것을 더 놓아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때까지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욕심 아닌 욕심은… 내 매장을 예전처럼 잘되게 운영하고 싶다는 것과 아이들과의 시간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심 후 첫 번째 내려놓음으로 나는 매장운영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매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매도가 될 때까지 6시 오픈, 11시 마감 형식으로 5시간만 운영을 했다.
그리고 직종에 관계없이 위치가 ’집에서 가까울 것‘을 중심으로 직장을 구했다. 여러 차례 면접 후 9시 30분 출근, 4시 30분 퇴근으로 조율가능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는 쿠팡을 새롭게 시작한 상황이었다. 2023년 8월부터 시작하였고 9월 매출은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상태였다.
9월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할 수 있는 차로 15분정도 거리의 직장을 구했다. 그래도 그동안 해왔던 온라인경험이 밑바탕이 되어서 새로 시작한 직장인의 삶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오픈마켓 플랫폼관리였다. 퇴근 후 바로 서대문의 매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삶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높진 않지만 매달 월급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왔고, 낮과 밤이 바뀐 상황에서 탈출했다. 그러면서 나는 비축된 체력을 내 온라인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2023년 12월.
시즌제품의 성장세를 업고 3개월만에 월매출 3,000만원을 돌파했다.(1년 뒤에는 억대매출로까지 성장했다)
다시 희망의 싹이 틔여지는 시간이었다.
21년도 이후에 내가 겪은 두 번째 실패는 부동산에 너무 크게 데어진 시간이었다.
2025년인 지금도 그때 뿌려진 씨앗 중 악성열매들만 남아서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는 건 여전하고, 공실도 여전하다.
누가 들으면 그래도 부동산도 여러 개고 부자네~라고 할 수 있지만 진짜 빛 좋은 개살구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어찌 낮은 임차료로 임차인이 구해져서 매달 나가는 이자비용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재적 리스크가 줄었다. 그때는 대출 안 나오면 어떡하지? 이자가 또 늘면 어떡하지? 공실이 또 생기면 어떡하지? 등등의 어떡하지리스크가 사람을 더 옥죄어왔는데, 지금은 어쨌든 대출은 나왔고, 나가야 하는 이자는 대략 확정되었고, 채워진 임차가 있고 공실이 여전히 있지만.. 그냥 디폴트에 적응되면서 잠시 심적 안정은 찾은 듯하다.
사람은 떨어지고 있는 순간이 더 무섭다.
바닥에 떨어지고 그 바닥에서 상처를 입고, 내 상처가 얼마 큼의 중상인지를 알게 된 뒤에는 어찌 되었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진다.
그래서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내 긍정적인 성향이 진절머리 나게 싫어졌던 이유가 그 최악을 가정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버릇을 들이면서 긍정력을 펼치려고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잃은 것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얻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엎어지는 건 못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저지르고 나서 “나도 몰라, 내가 이걸 어떡해 감당해” 하는 식으로 상황을 놓아버리지는 못하더라. 그건 나도 망치지만 무엇보다 아직 어린 내 자식의 삶을 망쳐버린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것만큼은 안되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몰리면 나를 낮추고 자존감이 좀 떨어지더라도, 죽을 만큼 싫은 일을 하는 것이더라도, 일단 해야 하기에 하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그게 그렇게 죽을 만큼 싫은 일이었을까 싶다. 나를 낮춰 평가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나였다.
싫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
잘 못해도 그냥 꾸역꾸역 하는 것
어떻게든 버텨나가는 것
그런 값진 인내심과 실행력을 몸에 새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