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다 : 한때는 상위 1%, 지금은 알바생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내가 무언가를 시도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이다.
한때 나는 자수성가의 상징이었다.
담보대출 비율이 높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강남에 49평짜리 자가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길까지 걸어가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었다.
난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고, 나름 안 해본 거 없이 여러 가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성장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메타인지가 되었다. 나는 서비스 직에 잘 맞았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업종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운 좋게도 내가 졸업 후 자리 잡은 회사는 금융업이었고, 그쪽은 일 잘하는 사람에게는 인센티브의 기회가 많은 곳이었다.
2007년 여름,
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하고 밤 12시까지 일하기를 반복하며 나는 촉망받는 신입루키로 떠올랐다.
신입시절부터 자수성가의 상징처럼 불리는 월 천만 원 소득을 달성하였고, 그러한 성과 덕분에 대학시절 쌓였던 학자금 대출도 직장을 들어가고 1년 만에 모두 갚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점점 독립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동안 돈 때문에 하지 못했던 나만의 위시리스트들을 이루어 갔다.위시리스트라고 해 봤자 별거 아닌 것 투성이었다.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것들을 망설이지 않고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커피가 먹고 싶으면 이번 달 용돈 얼마 남았지?를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마시고 싶은 걸 마셨다.
내 돈 주고 산 내 차가 생겼고, 밤에 친구와 동대문에 가면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담았다.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학생시절부터 직장을 가질 때까지 내가 꿈꾸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다녔다.
부모님도 여행을 보내드렸다.
대출 갚는 것들이 끝나자 내가 해보고 싶었고, 해주고 싶었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했고,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갈 때는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비즈니스클래스를 끊기도 하였다.
2017년 사기를 당하고 현실이 바뀌었지만 그렇게 이루고 누렸던 삶이 뇌리에서 계속 씻어내 지지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하고자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밖에 나가면 돈이 없어서 밥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무언가를 못하는 내 모습이 과거의 영광 속 그 시절의 모습과 갭이 너무나도 크기에 나의 비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삶의 비교격차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가져가고 나에게 어두운 자격지심을 심어 주게 되었다.이렇듯 한번 무너졌다 일어나는 삶에서 제일 먼저 이겨내야 하는 심리적 고통은 과거의 영광으로 인한 기억에서 느껴지는 비참함이었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빠듯한 생활비에서 나 밖에 나가서 쓸 돈을 달라고 하기가 미안했다. 그 당시의 나는 겉에서 보기에는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출산 이후 내내 집 에만 처박혀 있던 애가 밖에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고 뭔가 하는듯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가서 마주쳐야 하는 내 현실은 나를 자꾸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매일 바닥으로 꺼지는 비참함을 겪고 있다는 걸 집에서 내비칠 수 없었기에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괜찮은 척 웃는 가면을 써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곳엔 이렇게 초라한 나라도 반겨 맞이해주는 내 작은 아이들과 나를 걱정하는 엄마가 있었기에 나는 그들앞에서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내가 힘들다고 그냥 우울감을 만끽하며 엎어져 있어도 되는 팔자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지켜야 할 게, 갚아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돈을 벌고 싶었지만… 나의 메인분야에서 돈도 사람도 신용도 모두 바닥을 치는 경험을 했던 나는 그곳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람에게 받은 배신과 상처로 치를 떨리게 싫었다.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백지로 돌아가 나를 써주는 곳을 찾아 단순한 알바부터 해야 했었다.
하지만 단순한 알바조차도 아이 둘에 경단녀 40대가 되어버린 나를 고용해 주는 곳을 찾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나를 고용해주지 않아서 자영업부터 시작했었다. 그런데 자영업이라는 녹록지가 않아서 일한 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자영업을 하는 와중에 남은 시간을 더 만들어 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고, 그렇게 만들어낸 시간은 10시~4시까지로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내 매장문을 열기 전까지였다.
40대 경단녀가 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과정은 긴장되고 자괴감이 드는 시간이다.
한때 나는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마놀로블라닉 구두를 신던 커리어우먼이었는데, 경력이 망가진 40대 경단녀인 나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서빙 같은 것이었다.
나름 고르다 면접을 보러 간 곳은 샌드위치전문점이었다. 집이랑도 가까웠고, 10시~2시라는 시간에 4시간 근무를 하면서 커피와 점심도 제공해 주는 곳이었다. 나도 현업 자영업 사장님이지만 고용주에게 부담을 줄 거 같아서 일단 정체를 숨기고 아이 둘을 키우는 주부의 역할만을 부각하면서 면접을 봤고 다행히 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좋으신 분이었고, 아르바이트는 무던했다.
하필..이라 표현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곳은 장사가 그렇게까지 잘 되지 않는 샌드위치전문점이었다. 며칠 일하다 보니 도대체 굳이 왜 인건비 써가며 사람을 고용하는 거지? 싶을 정도로 점심시간 잠깐 바짝 주문이 몰리다가 내내 한가했다. 그마저도 매일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샌드위치전문점이라는 곳의 특징이 매출이 오를수록 사장이 너무 바빠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주문량이 많아지면 추가인력이 필요해지는 업종이었다. 이런 장사를 처음 해보는 듯한 50대 남자사장님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고 안타까웠다.
정체를 숨기고 들어갔지만 남는 거 없이 장사하고 있는 사장님을 보면서 도움을 주고픈 오지랖에 조금씩 경력을 오픈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 가게에서 진행하고 있는 SNS마케팅 중 당근마켓을 활용한 셀프마케팅을 주력으로 알려드렸다. 핸드폰 다루는 것도 어색한 50대의 남자사장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드리면서 두어 달을 같이 근무해 보니 이런 건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열심히 안 사는 자영업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열심’이라는 영역이 ”새로움과 꾸준함 “이라는 영역과 맞닿아 있게 하는 게 참 힘들다.
이런저런 조언을 할수록 ‘내 코가 석자’인데 나나 잘하자라는 심정이 되었다. 그때 그 샌드위치 가게는 새벽 7시에 문을 열어서 저녁 7시까지 12시간 영업을 했던 곳이었는데 오후 5시에 문을 열어서 밤 11시에 문을 닫는 영업시간 6시간인 내 가게보다도 매출이 낮았다.
같은 자영업자로써 참.. 안타까웠다.
그때만 해도 내 매장매출이 막 떨어지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분양받아뒀던 물건들이 잔금이 다가오면서 그로 인해 나를 삼켜버릴 듯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새로운 대출로 인해 늘어난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상대적으로 몸이 편했던 샌드위치가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매장문을 닫고 밤에 일하는 곳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밤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면서 떠올린 곳은 동대문야시장이었다.
당시 내 매장은 서대문구에 위치해 있었고, 동대문구가 그렇게 먼 거리만은 아니었기에 밤에 거기서 일하고 새벽에 돌아오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쿠팡배송알바를 생각했지만.. 거기까지는 용기가 안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좀 더 혹독하게 쿠팡알바를 했다면 같은 시간대비 돈이라도 더 많이 벌지 않았을까 싶다.
동대문 가게 중 몇 군데 면접을 본 뒤 내가 들어간 곳은 가방만 수십 년째 판매한 남평화시장의 토박이 매장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늘 긍정적이었기에 자괴감이 느껴지는 위치에 왔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으로 내가 다시 무언가로 거듭나는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돼주길 바랐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동대문의 새벽시장 생태계를 이해하길 바랐고, ‘가방’이라는 가격비교가 쉽지 않은 카테고리에도 도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라방현장도 꽤 구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참 많이 힘들었다.
매장 한쪽 구석에 앉아 쪼그리고 앉아서 까대기 작업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새벽근무가 나를 육체적으로 많이 지치게 했다.
동대문은 12시부터 몰아치는 주문 건과 손님을 처리하고 새벽 3~4시쯤이면 휴식시간 겸 식사시간이 된다.
9시에 출근하고 3시간쯤 지나면 점심시간이 오는 것과 같은 패턴이긴 하다. 몸의 바이오리듬이 바뀌면서 힘은 드는데 희한하게 살은 찌는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간을 자도 새벽근무를 하고 와서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잠시 자는 4시간과 밤에 자는 4시간은 수면의 질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그 시절의 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두 배정도의 수입이 생겼지만 훨씬 많이 지쳐갔다.
내가 그런 알바를 하고 있다는 걸 남편 말고 아무도 모르는 시절이었기에 우연히 내가 한낮에 자고 있는 걸 본 사람들은(예를 들어 집에 방문한 시어머니) 나의 이런 처절함은 모르고 아마 내가 되게 게으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매장일과 새벽시장알바를 병행하면서 나는 제대로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는 문제의 근본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 손에 쥔 것을 더 놔야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게 될 것이다라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막일의 시간이었다.
그때 내가 미련 떨고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야심 차게 2호점까지 냈던 ‘내 매장’으로 재기하고픈 욕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내 매장’으로의 재기.
그 욕망을 놓을 수가 없으니 5시~11시라는 영업시간 확보를 위해 오후 4시부터는 움직여야 했고, 그 시간에 맞춰서 다른 부업을 구해야만 해서 선택지가 더 좁았다.
나는 매장을 놔버리고자 결심했고 매도를 결심했다. 그리고 나의 본업을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사업으로 바꾸고자 결정했다.
그렇게 온라인으로 피벗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체력소모가 많은 새벽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9-6의 직장을 갖고자 시도했다.
매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9-6의 직장을 가지면 사실상 하루 중 내가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지게 된다. 그러한 사실이 마음 아파 그간 이런 출퇴근하는 직장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인데.. 당분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갈 수 있는 거리, 그리고 약간의 출퇴근 시간조절이 가능한 곳. 그런 곳을 서치 했다.
그런 곳이라고 조건에 맞는 근무지를 찾아낸 곳이 집에서 차량 5분 거리의 직장인데 업종은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하기 싫었던 TM업무를 하는 곳이었다.
내가 이 업무가 싫은 이유는 내가 예전에 하던 직업이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업종이었기에 나는 다시 내 번드르르한 말빨로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하는 작업을 하고 싶지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단 시작했다.
그런데… 들어가서 하는 일을 제대로 설명 듣고 나니 더 싫어졌다.
해당 업무에 대해 완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는 업무는 이러했다.
무작위로 선정된 업체리스트를 받으면 전화를 걸어서 “거짓 아닌 거짓”말로 담당자와 통화를 한다. 방문을 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득해 미팅약속을 잡고 그 장소로 보험담당자를 보내는 일을 배정하는 것이었다.
콜드콜의 일종인데 이렇게 해서 하루 종일 100통이 넘는 전화를 돌리면 몇 건의 약속이 잡힌다.
그러면 거기에 방문한 보험담당자가 미팅시간에 브리핑을 하고 계약까지 성사되면 거기에 해당하는 인센티브가 나에게 배당된다.
하아… 정말 싫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그곳에 올라가서 전화기를 드는 업무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울증에 걸릴 듯이 점점 싫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사람을 말로 설득하는 일이 직업이던 시절이 있어서 하필 또 그 일을 잘 해냈다. 그래서 더 진절머리가 났다.
들어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인센티브로 내가 새벽 내내 일했던 금액만큼도 벌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누군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전화를 걸어서 말을 시작하는 것도, 그게 거짓말이 섞인 내용이라는 것도 너무너무 싫었고 할수록 점점 나 자신이 싫어져서 자괴감이 더 심해졌다.
2017년이후 나는 거짓말이라면 넌덜머리가 나도록 싫었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된 계기는 둘째가 갑자기 림프절에 염증이 생기면서 급성으로 입원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만두자니 대안책이 없고 부양의 의무고 뭐고 그저 싫다는 이유로 도망자가 되는 것만 같아서 스스로에게 챙피해서 그만두지도 못하고 있던 나를 어찌 보면 우리 둘째가 ‘입원’이라는 사건으로 구해줬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째는 나를 또 수렁에서부터 꺼내줬다.
둘째의 입원을 핑계 삼아 그 일을 관두고 나는 좀 더 시간을 들여 꾸준히 서칭 한 후 차량으로 15분 정도거리에 떨어진 제조회사 쿠팡관리담당으로 다시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너무 싫었던 TM알바 덕분에 9시~5시 근무라이프의 적응과 매장오픈시간을 6시로 미루는 결단을 하게 되었기에 새로운 직장도 그에 맞춰서 구할 수 있어진 것이었다.
이 회사는 단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장점도 컸다.
점심도 공짜로 주고 안정적인 수입을 나에게 가져다줬다.
당시 나는 다시 중국사입으로 쿠팡에 제품판매를 시작한 상황이라 회사업무와도 그 결이 맞아떨어졌다.
이때부터 나는 사활을 건 이커머스비즈니스 폭격기가 되었다.
다신! 죽을 만큼 싫어하는 일을 돈 때문에 꾸역꾸역 하면서 나를 갉아먹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걸 탈출하기 위해서 내 사업으로의 성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해 9월. 나는 직장인이 되면서 매장을 운영했고 메인 플랫폼은 쿠팡으로 정한 뒤 이커머스 사업자로서의 재도전을 시작했다.
나의 알바경력들은 내가 망설였던 모든 도전에 등을 밀어주는 역할들을 했다.
그때의 몸부림과 견딤이 없었더라면,
나는 내가 무엇을 쥐었는지도,
무엇을 놔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2023년 9월의 이커머스는 처음에는 월매출 90만 원이었지만 시작 3개월 만에 월매출 3,000만 원을 돌파했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사장님이 되면서 다음 해 4월쯤 온라인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믿는다.
내가 걸어왔던 길,
내가 했던 모든 삽질과도 같은 경험들이,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갈 밑바닥을 다져주는 거라는 걸.
사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바닥을 기고 있을 때 비참한 심정이 배가 될 때가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뭐 어떠랴
어찌 되었든 경험이 자산이라는 말만은 진리니까.
그러므로 만약 그때의 나와같이
지금 뭔가 하긴 해야 하는 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면
일단 뭐든 해보라고 말한다
그게 돈이 적게 되든,
모양이 좀 빠지든,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낯선 분야든
그냥 써준다면 일단 해봐라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가늠이 되고,
다른 단계로의 이동도 가능하다.
아무것도 실천않고,
스마트폰만 넘기고 있는건
당신의 삶에도 경제적 상황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자명한 것이니
그 어떤 잡일이라도 일단 시작부터 해보길 강력히 말한다.
그게 당신을 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