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다 : 내가 나를 고용하기
둘째 낳고 나이 사십 넘어 다시 일자리를 구하려니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나를 고용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나를 스스로 고용했다. 그렇게 나는 ‘사장님’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명함을 갖게 되었다.
[1] 적과의 동침으로 시작한 SNS마케팅
생소하던 온라인판매에 처음 도전하게 된 계기는 2017년 사업 망함의 연장선에 있다.
그 당시 투자했던 회사 중 한 군데가 식품제조업을 하던 회사였다. 그 회사의 강00 대표는 내 인생 최악의 인물 중 하나이다. 강사장은 남을 속이는 재주와 더불어 식품맛 하나만큼은 뚝딱 잘 만들어 내던 사람이었다.
판매하는 제품만큼은 꽤 괜찮았던 회사라서 나는 둘째를 낳고 몸을 추스른 뒤 그 회사를 도와서 일하기로 했다. 그 회사로 투자된 자금 중 가장 큰돈이 나와 내 가족의 자금이었기에 그 회사를 도와 매출을 높이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했던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발을 뺏어야 했던 곳이다.
가라앉기 시작한 배에서 미련 떨지 말고 힘들더라도 얼른 다른 배로 탈출준비를 해야 한다.
강대표의 회사는 주매출이 홈쇼핑을 통해서 발생하고 있었다. 또 다른 판매채널로 온라인 쪽을 공략해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을 했었지만 자금압박에 이은 인력부족으로 선뜻 실행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 업무를 내가 맡아보기로 했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낯선 온라인도전기의 시작이.
나는 컴퓨터활용능력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문과형 경영학도였기에 엑셀을 쓰거나,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등의 컴퓨터를 활용해야 하는 업무에 취약했다.
하지만 이거 팔아야 내 돈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생소한 온라인 판매를 파고들었고 잘해보고자 그 당시 없는 돈을 쪼개고 쪼개 강의도 듣고 유튜브영상을 보고도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알게 된 채널이 십만 스스 사장님을 양성한 신사임당의 다마고치 채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마트스토어로 자리 잡는 것은 나에겐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뭘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팔아야 하는 제품’이 확정된 상태에서 이커머스를 출발해서 그런지.. 시야가 더 좁았다.
그래서 나는 키워드를 찾아내는 스마트스토어보다는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와 협업하는 공동구매를 먼저 진행해 보고자 했다. 이걸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친했던 지인 중 하나가 인스타그램에서 공구를 하는 1만 정도의 팔로워의 인플루언서였기에 그 지인의 제안을 믿고 무작정 시도했던 것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하나를 파고들면서 제대로 했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이커머스’로 먹고사는 인생이 되는 거였으니까.
강00대표 회사제품을 팔아보고자 인스타그램에서 공동구매를 진행하고, 더 많은 인플루언서를 컨택하고, SNS판매 채널을 확장하고자 인스타그램 이외에 카페마케팅도 함께 진행했다. 이런저런 판매의 플랫폼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이나마 나의 실력이 늘어감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내가 판매하고자 하는 제품의 가짓수가 늘어나게 됐다.
상생을 도모하고자 강대표와 손을 잡고 적과의 동침을 한 것이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 그 뒤에 강대표는 다른 거래처 사람들을 돈을 빌린 뒤 또다시 돌려막기를 수차례 시도하다가 잠적을 해버렸다. 그렇게 된 뒤 그 회사는 파산을 신청했고 자의 반 타의 반 진절머리 나는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 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 그 회사 제품만이 아닌 온라인 판매가 가능한 제품군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위탁상품도 판매하고, 병행수입도 도전하고, SNS마케팅을 하다가 알게 된 인플루언서들과 공동구매 중개도 진행해 보면서 점차 경험치를 늘렸가지만 원하는 수입을 만들 만큼 실력이 껑충 뛰지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파고들었다면 지금쯤 거대한 온라인빌딩을 올렸을 영역이지만 나는 그때도 여전히 무지했고 무엇보다 빚에 쫓기느라 마음의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없어서 그 시장의 가능성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돌아보면 2019년은 온라인 시장의 황금기였다.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물론 2025년인 지금도 시장은 넓다. 그저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인 거다.
[2] 플리마켓 도장 깨기
이리저리 깨지면서 온라인으로 제품을 팔던 시절, 맘카페를 중심으로 지역 플리마켓이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강대표의 제조상품을 팔던 나는 돈은 못 받은 대신에 그 회사에서 제조하는 제품만큼은 여유 있게 받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받아온 제품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곳! 플리마켓이었다.
돈이 너무 없던 시절이라, 플리마켓의 현금판매구조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은평구 쪽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근거리인 은평구와 마포구 지역의 플리마켓에 참여했다. 셀러로 플리마켓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해당 카페에서의 꾸준한 활동과 소정의 참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플리마켓에서 내 상품을 팔려면 매대를 꾸밀 수 있는 적당한 소품들도 필요했다.
그렇게 몇 번 플리마켓을 참여하다 보니 그곳에 나오는 다른 업체 사장님들에게 플리마켓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처음엔 모두 집 주변 근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몇몇 사장님들은 꽤 장거리에서도 우리 지역의 플리마켓에 참여하러 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매일 혹은 매주 플리마켓 열리는 곳마다 찾아가며 계속 참여하는 업체들이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거나, 매장을 운영하면서 어차피 오전~점심까지는 장사가 안 되는 시간이기도 하니 주기적으로 플리마켓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보통 플리마켓은 주부들을 상대로 열리고 주부들은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오전 10시~2시 정도까지만 시간이 나기에 플리마켓도 그 시간 안에 반짝 열리고 마감한다.
그렇게 그쪽 세계의 생태계를 알아가면서 나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그들처럼 집주변 뿐 아니라 장거리로 다닐 각오를 하며 구리, 인천, 송도까지도 영역을 넓혀갔다.
강대표 회사의 온라인판매를 돕는 것은 판매가 되어도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내가 신청금 내고 참여해서 판매한 대금은 내가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버는 하루의 10만 원 정도의 돈이 정말 엄청나게 도움이 되던 시절이었다. 밖에서 장사를 마치고 번 현금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들고 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었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플리마켓에 셀러로 참여하면서 내가 마주하는 자괴감을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이었다.
여러 플리마켓을 참여하다 보니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리마켓은 타깃층이 주로 주부였고 그들을 상대로 역시나 먹거리들이 강세였다. 그중 눈에 띄는 제품이 있었다. 바로 디저트류에서 ‘솜사탕’과 ‘머랭쿠키’ 었다.
이때 나는 ‘소싱’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팔릴만한 제품을 갖고 있지 않다면, 희소성 있는 제품을 갖고 있지 않다면 판매가 늘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제품이 중요하다!
나는 소싱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다가 박람회를 찾아갔다. 박람회는 미리미리 신청만 하면 무료로 들어갈 수도 있고, 한 공간에서 수많은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유익한 소싱공간이다. 예전에 다른 사업을 할 때도, 취미로도 자주 방문하곤 했던 곳이 박람회장이었다.
디저트페어를 찾아가서 이런저런 디저트 용품들을 구경했고 소싱가능한 제품들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입솜사탕, 수박머랭쿠키, 미니마카롱 등을 소싱해서 플리마켓을 참가하기 시작했다.
내가 새롭게 소싱한 디저트 제품군은 동네 플리마켓에는 이미 고정 참가업체가 있는 곳이 많았다. 동네 플리마켓은 업종이 겹치지 않게 신청을 받기에 고정판매자가 이미 자리를 잡은 곳은 입점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판매처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서칭 하다가 네이버에서 플리마켓 전문카페를 찾았다. 그곳에서 종로 익선동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곳에 디저트류를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
날씨가 좋아지는 5월, 처음 참가한 익선동 플리마켓에서 나는 가지고 갔던 내 제품들을 모두를 3시간 만에 완판 시켰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익선동은 주부가 아닌 젊은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라 예쁜 디저트에 대한 수요가 더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익선동 플리마켓에 고정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나에 3,000원~5,000원 하는 제품을 가지고 토요일 하루 만에 일매출 100만 원을 넘는 판매성과도 내곤 했다. 돈 벌리는 맛 때문에 목이 터져라 내 제품을 홍보하면서도 나는 힘든 줄을 몰랐다.
다시 돈을 벌 수 있고, 내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사줄 수 있어진 상황이 너무 기뻤다
사기를 당해 사업이 망한 뒤로 수없이 싸웠기에 그 당시 남편과의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부부간의 대화는 극도로 줄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할 때면 몸으로 도와주는 일만큼은 마다하지 않았던 남편은 본인이 쉬는 주말이면 내가 플리마켓 나갈 때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햇살 좋은 어느 주말,
내가 플리마켓을 하고 있던 익선동으로 남편과 아들이 찾아왔다.
주말이면 익선동 플리마켓에 나가야 하는 생활이 지속되면서 6살이었던 큰아이는 날씨가 좋아도 놀러 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내가 가던 플리마켓 매장 앞에는 평상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내 장사가 끝나길 기다리며 6살 아이가 그곳에 앉아서 들고 나온 장난감으로 혼자 놀고 있었다.
그 어느 토요일날,
날씨는 좋고,
장사는 쏠쏠 했지만
내 마음은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했다.
돈을 다시 벌 수 있다는 것은 기뻤지만.. 익선동에 놀러 나온 가족이 자신의 아이를 위해 내 솜사탕을 사갈 때 그 뒤로 보이는 평상에서 놀고 있는 내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씁쓸해 지곤 했다.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망해버린 내 현실이 문득문득 실감 나던 시간이었다.
그 뒤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3] 구매대행부터 재도전한 쿠팡생존기
코로나가 와서 많은 힘듦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 내게 위안이 되었던 건 돈이 없는 나도 돈이 있는 누군가도 다들 여행은 못 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망하기 전까지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큰 아이가 4살이 되던 때까지 우리 세 가족은 정말 여행을 많이 다녔다. 나는 주말이나 빨간 날이면 항상 쉬었고, 그 모든 시간을 여행에 쏟을 수 있을 만큼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가 있던 시절이었다.
망하고 나서 가장 슬펐던 건 아이와 가족에게 해주던 많은 걸 못해주게 된 무능한 나 자신을 받아들여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 또 서글펐던 건 돈이 없어서 외출 자체를 자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면 다 돈이니까..
그랬던 나에게 코로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가 되고 가난의 방패막처럼 활용되었다.
코로나는 오프라인 장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내가 참여했던 플리마켓도 다 문을 닫았고, 나는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와야 했다.
온라인을 하다가 플리마켓이라는 오프라인으로 나간 것은 그곳에 즉각적인 현금수입을 만들어 준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기본적인 베이스는 내가 온라인판매를 잘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시 또 죽으나 사나 온라인을 파고들어야 했다.
온라인 판매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다.
처음에 2018년에 내가 했던 것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전략으로 스마트스토어를 활용과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와 협업하는 공동구매 중개방식이었다면 2020년에 내가 다시 시작한 것은 구매대행이었다.
‘구매대행’은 해외와 국내 구매대행으로 나뉜다.
내가 시작한 것은 국내 구매대행이었고, 사업의 방식은 ‘이케아’나 ‘코스트코’ 같은 곳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온라인에 올려서 판매하는 구조였다.
이 걸 시작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대체 온라인에서 ‘팔리는 제품’이 뭔지를 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시도에서도 사실상 나는 키워드가 뭔지도 감을 못 잡았고, 온라인에서 판매는 어떡하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없었던 상태였다.
그러다 우연히 들은 유튜브 강의에서 코스트코 구매대행을 해보면 그곳의 제품들은 판매력이 인정된 상품들이므로 어떤 제품들이 온라인에서 판매가 잘 되는지 감을 잡게 될 거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이다.
반신반의였지만 내 장점은 일단 실행력이 좋다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무작정 실행했다.
구매대행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가 5월 가정의 달 연휴를 앞둔 때였다.
‘이케아’나 ‘코스트코’ 제품을 구매대행을 하면 일단 제품사진으로 쿠팡에 판매제품을 올려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날그날 가서 해당 제품을 사 와서 당일 발송을 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이 된다.
경험과 자금이 있다면 잘 나가는 제품들을 미리 사재기를 해두고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좀 줄일 수 있지만
경험도, 자금도 없던 풋내기 시절이라 나는 매일매일 이케아와 코스트코를 두 곳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기에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많은 제품들을 등록해서 한번 갔다 올 때마다 시간과 비용대비 최대한 많은 제품들을 사 올 수 있도록 주문량을 늘려야 하는 것이었다.
가정의 달 연휴 동안 나는 밤을 새워가면서 제품을 업로드했고 그 날이후 수없이 이케아와 코스트코를 왔다 갔다 했다.
그 과정에서 국내 구매대행을 진행할 때 마진의 박함을 알기도 하고, 쿠팡의 아이템위너라는 시스템도 알게 되었다. 택배사와의 계약도 진행하고, 늘어나는 물량으로 인해 택배비 빽마진이라는 개념도 알게 되었다.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으면서 구매대행을 두어 달 진행하던 나에게도 드디어 조금씩 ‘터지는 제품’이 등장했다.
올리기만 하면 팔리는 제품들의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나는 어떤 제품군이 쿠팡에서 실시간으로 많이 판매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주문이 들어와서 냉큼 코스트코로 사러 가면 그 제품이 코스트코에서 품절이거나 가격이 올라서 마진이 남지 않는 현상도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나에게 상상초월의 매출경험을 안겨 준 제품은 생활잡화에서 탄생했다.
그 서막의 첫 시작은 ‘생리대’였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잘 짐작이 안 될 수 있다.. 쿠팡에서 브랜드 좀 있는 제품의 생필품이 실시간으로 얼마나 많이 팔리는 지를..
올리자마자 순식간에 판매되는 ’ 생리대‘를 시작으로 나는 바디워시, 샴푸, 비누, 치약 등 욕실용품 카테고리를 늘려갔고, 어느덧 이케아와 코스트코의 영역을 벗어나서 새로운 도매처에서의 소싱을 점점 도전하게 되었다.
구매대행을 통해 어떤 카테고리가 잘 팔리는 지를 배웠으니, 이제 차별화된 희소성 있는 제품을 확보하는 게 해내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렇게 흐름을 타고 터진 내 매출은
한창 시절, 월요일이면 내보내야 하는 택배수량이 800건을 육박하는 매출까지도 달성하게 되었다.
(추억 삼아 소소하게 그 시절 인증숏도 넣어본다)
이 시절은 참 행복했다.
행복했던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나를 신나게 했던 것은 나에게 다시 ‘희망’과 ‘자신감’이라는 것을 안겨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의 사기사건 이후 무능한 세월만을 계속 살고 내내 비난에 휩싸였던 나는 내 존재이유를 잃어버렸고, 항상 자괴감에 휩싸인 삶을 살았었다. 뭔가를 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벽에 부딪혔고, 수습되지 않는 법적공방으로 점점 지쳐가던 나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항상 가족에게 피해만 입히는 존재인 거 같아서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번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 속에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이 성과는
“그럼에도 “ “이런 나라도”
다시 열심히만 하면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불씨가 되어 주었다.
아주 오래가지는 못했던 행복감이지만,
그래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다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성과는 6개월 정도 이어졌던 것 같다.
코로나가 길어지고, 제품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중국 판매자들이 쿠팡생태계를 망치기 시작하면서 가격경쟁이 심화되었고, 아직도 설익은 판매자였던 나는 화려하게 타올랐던 것만큼 허무하게 다시 사그라들었다.
내가 나를 고용했던 일은 이외에도 참 많이 있다.
지금도 나는 꾸준히 나를 고용하고 끌고 가고 있다.
한동안 계속 같은 분야에 있는 듯 하지만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나는 늘 새로운 분야로 나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해보고 싶은 분야는 많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요즘 나에게 기대보다는 두려움이다.
짊어진 것이 많기에 실패 이후 잃을 것이 많아졌고,
무언 가를 잃었을 때 책임져야 할 것들이 이미 너무 많이 상태에서 또 보태어진다는 것이 나를 계속 두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계속 새로움에 부딪혀 보는 것은
뒤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벼랑끝에 몰려보는 삶을 당해보고 나니
현재의 안락감은 잠시 잠깐의 휴식일뿐
여기서 더 나아가려고 애쓰지 않으면 제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더 두려워 도전에 대한 두려움쯤은 그냥 견뎌내는 것이다.
예전 링컨의 명언처럼 나는
뒤로 가지는 않는다. 천천히 나아갈 뿐이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