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주의 봄
“제주에 있다면 꼭 누려야 하는 풍경들이 있다.
그 계절, 그 풍경을 마주할 때, 비로소 내가 제주에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연의 모든 시기엔 제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래도 무릇 전성기가 있는 법이다.
제주의 자연은 봄이 그렇다.
팝!팝!팝!팝!, 걸매공원의 메마른 매화나무에 팝콘 터지듯 매화꽃이 몽우리를 활짝 터트리는 3월 초입, 제주는 겨울의 발걸음을 뒤안길로 물리고 찬란한 봄의 향연에 빠져들 채비를 한다.
특별히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 솜반천 산책을 하다가 매화 공원에 들어서면, 낱장으로는 섬세하고 파리해 보이기만 하던 꽃봉오리가 겹겹이 수술을 감싸 안은 채 하늘로 꽃 날개를 활짝 펼쳐 사위를 연분홍빛으로 화사하게 물들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겨우내 기다려왔던 봄의 전령이 찾아온 것이다. “매화 향기에 불쑥 해가 오르네, 산속 오솔길”이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가 생각나는 봄날의 아침이 영롱하게 솟아오른다.
간간이 찾아오는 꽃샘추위가 몸을 옹송그리게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두꺼운 무채색 패딩을 벗어버리고 한결 산뜻한 옷차림으로 본격적인 봄을 맞으러 제주 섬 곳곳을 방랑해도 좋은 때가 온 것이니.
‘봄을 누리러 제주를 누비자’.
서귀포의 난드르에는 유채꽃이 들불처럼 번져 노란 아지랑이를 창공으로 흩뿌리는 바람이 된다.
기름을 얻으려고 해녀 삼촌이 왓(밭의 제주말)에 빽빽하게 심은 유채꽃이 바람에 쓸리며 자아내는 짙은 노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봄은 황홀하다.
자연스레 홀씨가 날려 담장 넘어 옅게 피어난 유채들의 성긴 노란색 봄은 애잔함을 표현한 것 같아 좋다.
더해서 검은 현무암, 비췻빛 바다, 파란 하늘빛 사이로 유난한 대비를 이루는 유채의 빛은 더욱 요염한 ‘노오란’ 빛으로 화해 봄의 향기를 마구마구 뿜어낸다.
이 향기에 취했을까?
머리 위로 꽃비가 날릴 4월의 제주를 기다리기까지 막간의 3월의 흐름은 무척이나 더디기만 하다.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는 황시증을 앓아 꽃도 노랗게, 집도 노랗게, 심지어 까만 밤도 노랗게 그렸던 빈센트 반 고흐에게 3월의 제주를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3월의 제주를 떠돌았다면, 화가는 어떤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아마 영국 왕실 박물관에 전시된 화병의 해바라기보다 더 노랗고 강렬한 유채꽃밭 연작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거장이 그린 강렬하고 짙은 노란색이 범벅된 제주의 봄 풍경이 제주 미술관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유럽의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지 않더라도, 한봄의 한낮이면 제주의 작은 어느 길에서도 반 고흐의 해바라기보다 더 노랗고 찬란한 자연의 원색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제주 봄의 색은 ‘노란’이다.
제주의 노란색에 마음이 ‘쿵’ 했다면 다음은 푸릇한 청색에 취할 차례다.
사월의 봄날에는 청보리가 일렁이는 가파도에 가야만 한다. 모슬포항에서 가파도행 배에 오른다.
4월 중순이면 가파도에서는 청보리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곤 하는데, 이때는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만큼이나 사람의 일렁임도 요란하기만 하다.
푸른빛의 적요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축제가 열리기 며칠 전에 가파도를 찾기 바란다.
일찍 찾아간 가파도의 청보리밭은 태풍 전의 고요처럼 한적하다.
거칠기만 하던 모슬포 앞바다가 유순해서일까?
아니면 청보리밭을 수놓은 바람이 선선해서일까? 평소보다 마음이 즐겁다.
마치 이십 대의 청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청보리가 춤을 추는 가파도에서 사뿐히 사뿐히 춤을 추는 느낌으로 걷는다.
바다 위로 평평하게 솟아오른 가파도는 고맙게도 어느 섬 모두가 하나쯤 가졌을 법한 야트막한 언덕 하나도 우리에게 내어주지 않아 안온하고 편안한 산책길을 허락해 준다.
팔랑팔랑 마치 나비처럼 가파도 길에서 노닐면서, 몸과 마음 모두에도 날개가 돋아나는 느낌이라 지루한 일상을 산뜻함이라는 날개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 같다.
바람결에 간질간질 살랑이던 청보리의 은빛 수염들이 마음 구석구석까지 싹싹하게 빗질해 대었던 4월의 하루는 해묵은 중년의 필자에게도 싱싱하고 풋풋한 청년의 때를 기억나게 해 줄 만큼 싱그럽다.
4월은 제주의 사방이 파스텔 빛과 원색으로 뒤덮이는 찬란한 봄의 중심이다.
무릇 상춘객이라면 4월에는 더 부지런히 제주 곳곳을 쏘다녀야 한다.
햇빛이 고운 오전에는 제주 구도심 삼성혈 고운 한옥 처마에 드리운 은은한 벚꽃에 취해야 하고, 볕이 순한 오후 늦거름엔 발아래는 유채꽃이, 머리 위는 벚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진 가시리 목장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드라이브해야 하기 때문이다.
날씨 요정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변덕쟁이라, 언제 바람과 비를 불러올려 가녀린 연분홍 벚꽃잎을 꽃비로 내리게 할지 모르니 늘 간세걸음만 걷던 게으름뱅이 여행자라도 이때만은 무릎에 힘을 꼿꼿이 주고 서둘러 꽃의 향연에 빠져들기를 소망한다.
이게 봄을 대하는 여행자의 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의 밤에는 전농로를 걷는다.
낡은 가옥과 오래된 도로 주위로 백 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이 피워 올린 벚꽃잎은 달빛에 더욱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산책하는 연인들을 달큼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자연의 달빛과 인공의 불빛 아래에서 파스텔 연분홍 벚꽃은 진한 분홍빛으로 화해 낭만의 노래를 불러일으킨다.
저절로 흥얼흥얼, 어느 가게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따라 부르게 된다.
‘알 수 없는 이 떨림’이 발걸음에 뚝뚝 묻어 떨어지는 벚꽃의 향연.
그대와 함께 걷고 싶다.
5월이 되어 벚꽃이 사위었다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치, 제주 곳곳이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라고 외치며, 여전히 자신의 찬란한 봄을 알리기 때문이다.
해가 따가워지는 늦봄에도 제주는 소담한 봄의 꽃을 연이어 피워낸다.
함덕리 ‘감사공묘역’에는 늦은 만큼 더 화사하게 피어오른 겹벚꽃의 향연이 늦은 여행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햇빛이 찰랑거리다 못해 흘러넘치는 순간이 오면 소금처럼 반짝이는 메밀꽃이 넘실대는 오라동 메밀밭에 가서 푸르러 가는 한라산과 어승생악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더해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오월의 말일이 되어야 봄을 맞이하는 한라산의 높은 고원에 오르기를 추천한다.
봄이 쇠해야 한라산의 선작지왓에는 비로소 봄의 왈츠가 흐르기 시작하는데, 백록담을 넘는 구름의 그림자에 철쭉의 연분홍 농담이 번져가는 데크길을 걸어 윗세오름까지 타박타박 걷노라면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다’라는 자신에 대한 뿌듯한 칭찬이 여과 없이 흘러나올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