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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여행하는 12가지 방법

6. 느영나영 간세걸음으로 올레길 한바퀴

by 온평리이평온
올레1코스 벽화가 예쁜 종달리.jpg


걷기 열풍이 불면서 올레길은 제주 여행 명소가 되었다.

은퇴한 언론인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0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와 제주의 아름다운 동네길(올레)를 잇기 시작한 이후, 제주 올레는 대한민국의 걷기 여행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행자가 올레꾼이 되어 간세걸음으로 그 길을 걷는다.

시(始)점과 종(終)점을 말하듯, 서귀포시 시흥리(始興里)부터 시작한 올레길은 제주를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제주시 종달리(終達里)에서 끝을 맺는다.

장장 437km에 달하며, 1코스부터 12코스까지는 서귀포시에, 13코스부터 21코스까지는 제주시에 속해 있다.

눈에 보이는 성취감을 얻고 싶다면 ‘제주 올레 패스포트’를 구입해서 각 코스의 출발점과 중간지점, 도착점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도 있다.

완주하면 ‘제주 올레 트레일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영예와 기쁨을 얻는다. 이 장에서는 올레길 중 느영나영(너랑나랑 제주어) 걷기 좋은 세 개의 길을 소개한다.

올레1-1코스 바닷길.jpg

▢ 올레 1코스(시흥~광치기 올레, 15.1km)

아이들에게 승마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소문 난 작은 학교, 시흥초교에서 시작된 올레 1코스는 한겨울에도 짙은 녹빛으로 우거진 당근밭 사이로 난 길을 걷고 나면 말미오름과 알오름에 다다른다.

오름에 오르면 멀리 바당 위로 왕관처럼 솟구친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게으르게 누운 풍광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제주에서 일출을 맞는 최고의 명당이라, 새벽 여명 오름 정상에 올라 일출봉을 배경으로 말갛게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장엄함에 저절로 엄지를 추어올릴 수밖에 없다.

초가지붕을 덮었던 ‘새(띠풀의 제주말)’로 뒤덮인 알오름을 지나 올레길은 종달리로 접어든다.

원색으로 그려진 담벼락 벽화 앞에서 멈춰 사진을 찍고, 마을을 지키는 수백 년 된 팽나무를 지나 노포를 기웃대며 마을 곳곳을 구경하는 맛이란, 걷는 발자국에 호기심을 아롱아롱 새겨 놓는 작업과 같아 즐겁다.

이제 본격적인 바당을 옆에 두고 걷는 길이다.

아름다운 해변이 왼편으로 펼쳐져 있고, 길은 큰 호를 그리며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길 중간에 한치구이가 유명한 목화휴게소가 있다.

시원하게 톡 쏘는 맥주 한 모금은 노곤한 몸에 활기를 가져다주는 청량함이 가득해 좋다.

게다가 노릇하게 구운 고소한 한치를 씹는 맛이란! “걷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몰랐어!”라는 고백을 나도 모르게 할지 모르겠다.

오늘은 유난히 성산의 바다가 비췻빛으로 빛이 난다.

햇볕도 반짝이고 해변의 이름 모를 풀도 바람 따라 살랑인다.

이 길은 걷기도 좋지만 자전거를 타도 좋을 길이다. 바람을 등진 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올레 1코스에는 비밀 화원처럼 은밀한 ‘우뭇개 동산’이 있다.

인적이 드물어 호젓하고 들꽃이 융단처럼 깔린 동산은 바로 옆 인파가 들이찬 성산일출봉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동산 꽃밭에 앉아 우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멍, 물멍’에 빠져든다.

한참을 쉬다가 일출봉을 오른다.

일출봉 앞바다가 미늘같이 햇빛에 반짝반짝 조각나며 부서진다.

일출봉은 오를 때 숨이 벅차오르고 땀이 날 정도로 아찔하지만, 다 오르고 나면 볼 수 있는 원형 굼부리 세력과 성산의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고 만다.

오를 때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다.

광치기 해변으로 난 올레길을 걸어간다.

이곳에서 물질하고 귀가하는 해녀 할망들과 우연찮게 만났다.

그분들의 모습이 참 귀해서 사진에 담는다. 종점에 다다랐다.

간세가 품은 도장을 들어 마침 인증을 한다. 이제 1/29의 시작이다.


올레1코스 한치가 널린 바당.jpg

올레1코스 해녀할망의 귀갓길.jpg


▢ 올레 10코스(화순~모슬포 올레, 15.6km)

10월의 제주는 마치 올레길의 반을 걸어온 것을 수고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순한 햇빛과 바람으로 올레꾼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이제 올레10코스. 화순부터 사계항을 거쳐 송악산 둘레길을 지나며 알뜨르 벌판을 훠이훠이 지나 모슬포에 이르는 길이다.

형제섬을 품은 바당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와랑와랑’ 햇빛이 물결 위에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는 곳, 산방산과 송악산의 풍경이 아득해질 정도로 정신을 쏙 빼앗는 곳, 일제 강점기의 상흔이 여전한 알뜨르를 묵묵히 걸어야 하는 곳, 4.3의 비극에 가슴을 저며야 하는 곳.

날이 궂으면 가장 매섭다는 모슬포 바람을 온몸으로 품고 걸어야 하는 곳.

내가 바다가 되고 내가 들녘이 되고 내가 오름이 되고 내가 바람이 되는 곳.

이 길을 걸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게 길은 행복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표정은 저절로 유순해지고 저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 바당길을, 오름길을, 난드르길을 걷는다.

바둑판처럼 격자로 펼쳐진 밭에는 알록달록 갖은 작물이 올레꾼을 반기듯이 맞이해 준다.

제주 북동쪽 구좌 난드르에는 무와 당근이 지천이라면, 제주 남서쪽 대정 난드르에는 마늘과 양파, 콜라비와 브로콜리가 풍성히 자라고 있다.

경작하는 농부의 손길은 고되겠지만 미안하게도 바라보는 산책자의 눈길은 즐겁기만 하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디 수고하는 손길에 풍성한 소출의 열매가 있기를 기도한다.

올레10코스를 걷고 나면 장엄한 풍광 위로 두둥실 솟아오른 제주의 아픈 과거와 제주 농어촌의 현재를 모두 보게 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피어난다.

어떻게 갈무리를 해야 할지 딱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이 감정의 침전물을 소중히 모으면 진심으로 제주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될 것을.


올레10코스 산방산 아래 제주다운 집.jpg

올레15코스 마을소경.jpg
올레16코스 수산봉 그네타기.jpg


▢ 올레 21코스(하도~종달 올레 11.3km)

올레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시간과 의지를 내어 찾으면 길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29개의 올레길을 걸으며 체득한 것은 사람은 걷는 존재라는 것이다.

걷는다고 인생역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길에서 ‘삶의 또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올레 21코스를 걸으며 루쉰의 ‘길’이란 문장을 떠올린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하도리 올레길에서 옛사람들이 쌓아 올린 ‘퇴적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음을 본다.

‘구룡만리’라고 부르는,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제주의 밭담은 제주 사람들이 건너온 삶의 지층이자, 인생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걸은 시간의 지층이기도 하다.

밭담은 어설프게 쌓아 올려 쉬이 무너질 것 같지만, 모진 바람을 견디고 수백 년 세파를 견디어 냈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것은 아닐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왜 이리 빙빙 돌기만 했는지, 왜 이리 어설프기만 한지, 어찌 한 발자국 전진도 이뤄내지 못했는지 자책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걸어 냈고 그 걸음으로 인해 길이 났다.

작은 보폭으로 제주 섬 둘레 한 바퀴를 걸어온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내 모습을 바라보면 여전히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힘냈으면 한다.

올레길을 걸으며 자신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올레20코스 세화리 풍경.jpg
올레21코스 바당풍경.jpg
올레9코스 산방산이 보이는 진지동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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