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촌 여행, 제주에서 행복하시기를.......
‘행복’을 의미하는 단어 happy와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의 happen은 같은 어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맞다.
살아 보니 ‘행복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안다. 행복은 소소함에서 비롯되고 우연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네 삶처럼 여행의 행복도 그런 게 아닐까? 인생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장시간 이동하여 목적지에 다다름으로써 여행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긋나고 불편한 여행길 도중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이의 미소와 길가에 태평하게 누운 고양이의 게으른 눈빛에서 여행의 은은한 참맛을 느낄 수도 있겠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주5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정주형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매일 여행하는 삶을 꿈꾸는 방랑자로서, 어쩔 수 없는 삶의 간격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는 일상의 우연 속에서 찐행복을 찾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인가? 예전 여행자로서 제주를 다닐 때는 ‘파워J형’의 무지막지한 계획을 실천하는 유형이었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제주 곳곳을 누비며 여행지를 섭렵하면서 제주 곳곳을 꽉꽉 채운 사진을 얻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뭔가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왜 내가 담은 풍경에는 김영갑 작가의 사진에 담긴 바람이 묻어나지 않는지, 서재철 작가의 사진에 담긴 자연과의 교감이 담겨있지 않는지를 늘 고민했었다. 그리고 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의 벼랑에서 쓴 소주를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사진에 제주의 바람을 담기 위해서는, 제주와 교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이미지로 박제하는 것이 사진이라지만, 좋은 사진을 담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과 더불어 나직한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제주도민이 되기로 했다. 바쁜 여행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게으르고 느린 ‘일상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 여전히 제주에서도 월급쟁이 직장인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급함 없이 하루에 한 곳, 목적지 없는 간세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걷다가 풀썩 주저앉아 오름과 바다를 바라보며 흥이 오르면 기지개를 켜고 오감을 활짝 열어 제주를 느껴보려 한다.
제주에서 느린 여행을 하기 좋은 곳은 단연 ‘촌’이다. 토박이들이 ‘촌’이라고 부르는 시골 마을 안쪽에는 진짜 올레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고, 그 마디에는 천연색 물감을 뒤집어쓴 낮은 집들이 앉아 있다. 집 마당과 담벼락 아래에는 사시사철 영롱한 꽃들이 피어난다. 더해서 어느 마을에는 미술관이 있고, 작은 서점이 있으며, 진한 커피를 내리는 카페와 소박한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잠깐 걷다 마주치는 ‘삼춘’에게 부드러운 인사를 건네 보자. 아마 삼춘도 활짝 하회탈 웃음으로 반겨줄 것이다.
▢ 송당리
제주 깊숙이 숨어 있는 마을 송당리는 연인과 내밀하게 속닥속닥 걸어 여행해야 할 것 같은 동네다. 송당리는 바다에 접하지 않는 내륙 마을이라 제주의 맛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 들 수 있겠지만 나는 송당리가 가장 제주다운 마을이라고 단언한다. 제주가 여행자에게 선사할 수 있는 다채로운 것을 대부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송당리는 당오름을 품고 있고 당오름은 늘 푸르고 쾌활한 숲길을 머금고 있다. 걷기만 해도 정다운 마을에는 농가와 상가가 어우러져 있다. 경운기가 들어선 마당 깊은 집도 있고 소박한 주차장을 갖춘 맛집들도 구석구석 자리해 있다. ‘풍림다방’, ‘송당나무’, ‘고사리커피’, ‘시시소소’ 같은 이름도 예쁘지만 커피 맛도 일품인 여러 개인 카페도 많아서 걷다 지치면 잠시의 휴식을 취하기도 좋다. 게다가 작고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그래서 시내에서 꽤 먼 마을이지만 힙하고 젊은 뚜벅이 여행자가 많이 찾는 마을이기도 하다. 송당리에 가면 본향당을 지나 당오름에 올라보자. 제주에는 1만8천여 신이 있다는데, 이곳 본향당에서 한해 4번의 큰 제사를 지낸단다. 제주 풍습에 관심이 없더라도 얕고 편평한 당오름 숲을 한 바퀴 걸어 당오름을 오르는 사치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니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숲을 걸어보면, 제주 촌마을이 선사하는 느긋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테다.
▢ 동복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숨어 있는 마을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인 함덕리와 김녕리 사이, 동복리는 여행자 어느 하나 머물지 않는 곳이었다. 변변한 편의점 하나 없이 작은 점빵이 자리하던 그곳.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이 마을의 주민이 된 후에야 진면목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을은 오소록한 곶자왈을 머리에 이고 발밑으로는 비췻빛 작은 바다를 두고 있다. 그리고 몇 명의 아이들만 다니던 낡은 동복분교를 품고 있다. 이처럼 원색적인 제주 마을이 있을까 감탄만 하던 새, 이곳에도 변화와 개발의 물길이 터지더니 이내 유명한 가게가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고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분교 앞 작은 상점에는 가수 이효리의 남편이 카페를 시작했고(물론 제주를 떠난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런던 베이글이 바닷가 옆 공터에 건물을 세워 문을 열었다. 비어있던 큰 창고에는 ‘공백’이라는 카페가 자리하더니, 주름 가득한 할망이 보행기를 끌고 다니던 한적한 길에는 렌터카들로 북적북적하고 젊은 여행자가 인생 사진을 찍는 핫한 명소로 변한 것이다. 여기저기 몸살을 앓는 티가 확연하고 복작이는 이 마을의 소란이 불청객들의 요란 같아 마음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경사진 마을 한쪽, 비좁은 올레길을 걸어 들어서면 여전히 원형의 마을이 살아 있어 안심이다. 여름철이면 포구에서 다이빙하는 물놀이객 수가 늘었지만 선녹색 바다는 여전하고 여행자가 떠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마을 속으로 스미는 고요도 반갑다.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걸어 봤으면 좋겠다. 원형의 제주를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저지리
저지리는 중산간 외딴곳에 위치하지만 ‘문화예술인마을’로 유명하다. 대도시에서도 보기 드물 유명 미술관(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유동룡미술관)을 여럿 품고 있고, 많은 예술인이 일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을 만큼, 제주의 자연과 문화, 예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2007년)된 저지오름을 머리맡에 두고 있으니 이런 마을을 우리나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마을을 걷는 것만으로도 예술인이 된 느낌이다. 저지오름을 오르면 저절로 나오는 콧노래로 음악인이 된 것 같고 오름의 푸른빛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푸른 물감을 먹인 붓을 든 미술인이 된 느낌이다. 게다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세계서점’ 중 하나로 뽑힌 독립서점인 ‘소리소문’에 들어가서 책의 향기와 빠져든다면 글이 친숙한 작가가 되고픈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저지리에서는 저절로 ‘내게도 꽤 괜찮은 예술 애호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왠지 모를 자부심이 창공 위로 치솟는 기분이란. 하하핫!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가 두둥실 구름처럼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