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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여행하는 12가지 방법

10. 가을, 억새의 향연

by 온평리이평온
조천리 폐가에 피어난 억새.jpg


제주의 10월 말은 억새의 계절이다.

제주 중산간의 오름과 뱅듸에서 피어난 억새는 하늘이 높고 일기가 화창한 늦가을이 되면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사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억새는 갈바람과 짝꿍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갈바람이 순하게 제주를 어루만지면, 억새는 하늘하늘 살랑이며 여행자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때다.

연중 제주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가. 덥지도 춥지도 않으며, 날은 맑게 개어 한라산이 품 안에 쏙 안길만큼 청명해서 제주의 난드르를 방랑해도 좋을 그런 날들.

특히나 따사로운 하루, 해가 서쪽으로 누우면 동쪽 수산리 들판을 가득 메운 억새들이 해를 등지고 눈부시게 피어나는 한때.

제주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황홀함의 백미다.

아무도 없는 난드르의 외딴 길 위에서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 억새의 하늘거림에 맞춰 폴짝폴짝 뜀을 뛴다.

나긋한 낭만 속,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내 마음을 피사체에 투영하여 카메라로 담아보고 싶었지만 졸렬한 내 시선과 기술로는 향긋한 이 느낌을 담을 수 없기에 안타깝다.

그래도 좋다.

햇빛과 바람, 흔들리는 억새밭에서 나는 춤추고 있었으니까.

이 장에서는 황홀한 사치를 누릴 수 있는 네 곳의 억새 명소를 소개한다.

특히 여행자가 찾기 쉬운 억새가 만발한 오름 위주로 여행지를 추천한다.


▢ 아끈다랑쉬오름


제주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았던 김영갑 작가가 좋아했던 제주 동쪽 중산간에는 ‘아꼽은(사랑스러운의 제주말)’ 오름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여행자가 많이 찾는 용눈이오름부터 백약이오름, 손지오름, 높은오름 등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지만 그중 랜드마크 격으로 위풍도 당당하게 솟아 있는 다랑쉬오름이야말로 ‘오름의 제왕’이라고 불릴 만한 위용을 갖추고 있다.

‘아끈’은 제주말로 ‘작은’이라는 뜻이니, 우리가 탐방하고자 하는 아끈다랑쉬오름은 ‘작은 다랑쉬오름’을 말한다.

제주 동쪽 오름들을 아우르는 ‘오름의 제왕’ 옆에 낮게 딸려 있어 ‘아끈다랑쉬’라 불리지만, 아끈다랑쉬오름은 다랑쉬오름 못지않은 매력을 품고 있다.

높은 곳에서 보아야 보이는 하트 모양의 예쁜 탐방로가 굼부리를 휘감고 있는데, 멀리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가까이는 제주 난드르를 배경으로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숨겨진 보석 같은 오름이다.

특히, 억새가 만발하는 가을날, 더해서 청명한 하늘까지 펼쳐진 날이라면, 환상적인 금빛 풍경을 선사해 준다.

진입로가 정돈되지 않아 미끄러웠지만 야트막한 오름 굼부리에 올라서니, 아이들 키를 넘기는 무성한 억새밭이 우리를 반겨준다.

어른 키보다 한참 높은 억새 잎 속에 숨어들어 숨바꼭질하듯 굼부리 길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제주의 가을이 내 안으로 포옥 안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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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갑마장길과 따라비오름


연인이나 부부라면 가을 갑마장길을 걸어보자.

갑마장은 최상급의 갑마(甲馬)를 키우던 목장을 말한다.

제주의 대표적인 방목장이었던 가시리에는 목장 경계로 쌓은 잣성이 한라산을 꼭짓점 삼아 연이어 둘러 있다.

이 중 짧은갑마장길은 큰사슴이오름부터 따라비오름까지 잣성길을 따라 걷는 코스인데, 오름의 여왕을 알현하러 가는 융단 같은 설렘이 이 길 위에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풍력발전기들이 휙휙 돌아가는 먼 풍경을 배경으로 흐드러진 억새가 지천인 난드르를 삼나무 길이 내어놓은 그늘에 기대어 걷노라면 서로에 대한 풋풋한 감정이 새록새록 넘쳐나기 마련이다.

땅할아버지 오름이라는 민간어원을 가진 따라비오름은 이름과는 다르게 용눈이오름에 버금가는 부드러운 산세와 굼부리를 가지고 있어 오름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근처 오름 군락에는 며느리 오름이라는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이 대가족처럼 모여 있으니, ‘따라비’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린다.

따라비오름은 유명한 관광지라서 고즈넉하지는 않다.

많은 여행자가 오름 정상에서 억새의 바람을 만끽하고 있다.

바람만 넘나드는 고요의 시간을 탐냈던 우리는 조금 더 깊숙이 난드르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보다 먼저 고요의 시간을 탐닉하던 노루 떼가 인기척에 놀라 껑충껑충 뛰어 사라지고 온전히 이 들에는 우리 둘과 바람만이 남게 되었다.

억새 꽃이 만개한 가시리 넓은 들에서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인생의 늦가을에 관해 이야기한다.

“난 은빛 백발이 잘 어울리는 노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듬성듬성 휑한 백발도 괜찮아?”

“주름 가득하고 야위어도 석양처럼 순하고 따뜻했으면 좋겠어. 내 삶이......”

“제주에서?” “응......”


따라비오름의 억새.jpg
산굼부리의 억새.jpg
닭머르해안에 피어난 억새.jpg


▢ 동거문이오름


제주 오름 중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을 말하라면 난 동거문이오름을 꼽고 싶다.

무작정 혼자 걷고 싶을 날에는 동거문이오름에 올랐다가 길도 없는 반대편의 난드르를 헤맨다.

아주 옛날 용암이 급하게 폭발했는지 가파른 낭떠러지처럼 솟구친 굼부리 동편으로는 억새가 수놓은 황금빛 구릉 지대가 나지막하게 펼쳐져 있다.

난드르에는 마소를 방목하는 바랜 목초지와 주로 무를 파종한 푸른 밭들이 검은빛 밭담으로 얼기설기 나누어져 있고.

이곳은 오름의 군락지라 난드르 너머 사방에는 유명한 오름들이 봉긋 솟아올라 있다.

억새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오름과 난드르 곳곳에서 제 모양 그대로 ‘하영’ 피었다 스러진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름은 옛날 테우리를 품었고 오늘은 정처 없이 헤매는 나 같은 유랑자도 품어준다.

오름은 모두의 안식처다.

망자에게도 그런 모양이다.

동거문이오름 들녘에는 제주 전통의 묘지들이 널찍한 산담을 두른 채 난드르 곳곳을 모자이크처럼 수놓고 있다.

이끼가 핀 동자석을 줄 세운 봉분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후손들의 성묘를 기다리고 있다.

예전 제주에는 벌초 방학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추석 보름 전 주말에는 남자 일가친척들이 모여 벌초하는 풍습을 유지한다.

그 덕분에 봉분은 옛 시절 중학생 까까머리처럼 잘 다듬어져 있다.

늦가을의 억새는 풍성한 억새꽃을 피우고 난 후 쇠하고 사그라진다.

마치 몽당연필 같다.

몽당연필이 긴 연필보다 어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세월이 차면 몽당 빗자루처럼 억새도 몸이 닳아 작아지는 걸까.

작고 허리가 굽었어도 바람이 불면 허리를 ‘구짝’ 펴기도 한다.

쇠잔한 억새꽃도 아름답다.

열정을 불사르고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 같기 때문이다.


중산간 난드르에 피어난 억새 2.jpg
중산간 난드르에 피어난 억새 3.jpg
중산간 난드르에 피어난 억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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