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주 숲길, 산책
‘산책’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말의 어감이 좋다. 천천히 걷는 것, 생각에 잠기는 것, 걷다가 잠시 멈추어서 주위를 둘러봐도 되는 느긋함이 있는 것, 폭을 넓혀 보면 생각을 비우는 것,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기도 하는 그런 것. 더해서 호젓한 분위기도 연상된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의지를 내서 여유의 시간을 산 것이니, 온갖 시름을 짊어진 사람일지라도 산책하는 동안은 생채기 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어 풍요로운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산책하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바쁘게만 살았던 나도 제주에 살면서 산책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의지를 내서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걸을만한 ‘오소록한’(아주 조용하다는 제주말) 길이 곳곳에 있다. 오래 걸어야 종점에 다다를 수 있는 긴 길도 있고, 한 시간 남짓이면 왕복할 수 있는 짧은 길도 많다. 요즘 세상에 차도와 떨어진 길이 얼마나 귀한지. 적막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이 인생 주변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지, 제주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쪼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왔다 하더라도, 부산한 여행보다 숲길을 찾아 ‘간세걸음’으로 다정한 사람과 ‘느영나영’ 걷는 산책하는 여행을 추천해 본다. 더해서 언제 걸어도 안전하고 걷기 좋은 제주 숲길까지 함께 소개해 본다.
▢ 비자림길
제주에 산다고 하면, 으레 사람들이 물어온다. “어디가 좋아요? 여행하기 좋은 명소를 소개해 주세요!” 제주 곳곳이 여행자들로 몸살을 앓지만, 서울보다 약 3배 넓은 제주에는 여전히 아는 사람들만 숨겨놓고 다니는 비밀장소도 많다. 하지만 이런 곳은 접근성이 높지 않거나 출입을 금한 곳이 대다수라 추천하기 어렵고, 대신 누구나 다가가서 쉽게 걸을 수 있는 숲길을 말해주곤 하는데, 그곳이 바로 ‘비자림’이다. 몹시 유명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봤을 법한 비자림을 말하는 이유는, 여러모로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누구라도, 1시간 정도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을 수 있는 숲. 비자나무가 뿜어내는 상쾌함이, 폐부에 가득가득 들어차게 되는 곳, 그래서 청량함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곳. 비자나무 숲에 들어서면 햇빛은 티백에서 우러난 비취색 녹차처럼 곧게 뻗은 나무와 잎새로 부드럽게 번져간다. 간소한 차림으로 황톳길을 사근사근 걷는다. 새순처럼 마음이 연해지고, 나도 모르게 나긋한 사람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 나의 머리를 늘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셨던 할머니의 마르고 거친 손 마냥, 숲에서 푸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숲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시원하고 맑은 숲에서 마음속 중심 한 편에 간직했던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말로 풀어낼 근사한 이유는 댈 수 없지만, 답해 본다면 천년의 숲 비자림이 품고 있던 시간의 더께가 아닐까 하는 것.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라고, 망각이라고, 괜찮다고, 잘했다고, 천년의 숨결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 다 된 것이라고 숲이 말해주는 것 같다.
▢ 사려니 숲길
제주는 숲의 땅이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바다를 향해 뻗어 가는 제주도의 중산간 지대는 그야말로 숲 천지다. 빽빽한 삼나무뿐만 아니라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편백나무 등이 뒤섞인 숲의 바다가 제주 바당의 파도 마냥 넘실댄다. 그래서 그런가? 제주를 처음 접했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랬다. 운무가 자욱하고 비까지 오는 날에는 사려니 숲에 가야 한다고. 바람의 노래에 홀려 유영하는 숲의 군무를 봐야 한다고.
‘사려니 숲’은 ‘신성한 숲’이다. 그래서일까? 비가 내리고 안개가 낮게 깔린 삼나무 숲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빗방울이 우산을 ‘도도도독’ 때리는 소리와 내 발자국이 ‘저벅저벅’ 숲길에 남기는 소리가 크게만 다가오는 산책길이다. 사실 작은 소리가 유독 도드라질 만큼 산책로가 그렇게 조용한 것은 아니다. 새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까마귀, 직박구리, 찌르레기, 참새, 할미새, 멧새, 박새, 딱따구리가 모두 제각기 소리 내며 운다. ‘컹컹’대는 고라니 소리도 심상치 않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삼나무 가지가 서로 어긋나며 ‘위잉위잉’ 울어대는 소리 역시 숲의 적막을 깨운다. 고요한 숲길을 좋아하지만, 사려니숲길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 여행객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를 무심코 듣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도시의 한복판이라면 그저 까끌까끌한 소음이었을 - 누가 집을 샀다는 이야기, 어디서 산 과일이 맛있다는 이야기, 거기 칼국숫집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 같은 - 무해한 얘기들이 삼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과 함께 내려앉는 숲길은, 사람과 함께라서 좋은 길이다. 사려니 숲에서의 산책은 걷는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 세파에 찌든 중년의 얼굴도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의 둥근 달 같은 맑은 얼굴로 바꾸어 준다.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나 보다. 숲에서 본 그대의 얼굴은, 숲에서 사진기에 담은 그대의 눈빛은, 순결한 이슬처럼 빛이 나고 반짝거리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바란다. 숲의 나무들처럼, 산책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우듬지를 타오르는 해를 향해 뻗기를, 자신의 분량만큼 자라나기를, 한해 한해 옹골진 나이테들을 자신의 인생에 덧씌우기를.
▢ 장생의 숲길
숲의 미로가 있다. 어쩜 이리 구불구불 길을 굽히고 펴서 인공림과 원시림이 뒤섞인 제주 숲 사이로 널어놨는지! 숲에 난 길을 걷다가 보면 혀를 쏙 빼고 감탄하기 일쑤다. 크고 잘생긴 병정들을 사열하듯 곧고 높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절물 휴양림의 삼나무 숲을 기분 좋게 떠돌다 보면, 숲의 가장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장생의 숲길은 큰마음을 먹어야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제주의 태곳적 신비와 같다. 수림이 울창해 숲속은 검어 보이고, 왕복 11.1km라는 만만찮은 거리가 걸음을 저어하게 만든다. 그래도 용기를 낸다. 서너 시간 여유를 가지고 그저 담담하게 숲의 심연으로 빠져들면 비로소 태고의 숲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삭아 폭신폭신한 숲의 흙을 밟고 성큼성큼 숲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햇빛은 빗살이 되어 삼나무와 편백나무와 단풍나무에 파편처럼 예리하게 박혀 영롱하게 반짝이다 스러진다. 바닥에는 조릿대와 비늘고사리가 길고 가녀린 손을 벌리고 누워있다. 무너진 잣성의 돌담은 인생 후반전에 접어든 내 얇아진 머리털 같이 가늘고 길게 뉘어져 있다. 이상하다. 제주의 숲은 사람의 걸음을 느긋하게 하는데, 장생의 숲만큼은 종아리 근육을 바짝 긴장시켜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숲이 굽이굽이 돈다. 나도 돌아 걷는다. 도는 만큼 숲은 속속들이 내면을 들추어 보여준다. 숲과 내밀한 관계가 된 것 같아 흐뭇해지다가 길이 지루할 만큼 끝나지 않아 사위가 어둑해지는 만큼 몸은 안달이 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고 길은 끝이 나 다시 절물휴양림 가장자리에 닿는다. 긴장과 이완을 왕복한 몸이 노곤해 온다. 숲에서 노닐며 한 것 들이켠 맑은 공기는 폐부에서 모세혈관 끝자락까지 퍼져 있어 마음은 상쾌하지 그지없다. 아마 다시 생각이 날 것이다. 제주의 숲을 다시 걷고 싶다고. 그래야 살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