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라산의 아름다운 시절
못 가본 곳이기는 하지만 사시사철 아름다운 금강산은 계절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고 한다.
봄에는 산수가 수려해서 금강산, 여름에는 녹음이 물들어 봉래산,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 겨울에는 기암괴석이 드러나 개골산이라고 한다는데, 화산섬이라 결이 사뭇 다른 한라산 역시, 그 기상과 아름다움은 금강산 못지않아, 예로부터 두모악, 영주산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금강산·지리산과 더불어 삼진산의 하나로 치켜세워져 왔다.
하기야 다른 수식어를 더할 필요 없이, 남과 북이 갈라진 뒤로, 한라산은 우리나라 최고봉(1,950m)이 되었기도 하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은 오르고 싶어 하는 명산인 것은 부연설명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한라산이 참 좋다.
머리가 없는 산(頭無岳), 은하수를 감싸 안을 만큼 높은 산(漢拏山)이라는 이름과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못(白鹿潭)이라는 이름이 참 고상해서 좋고, 사계절마다 연두, 분홍, 새하얀 천연색 옷을 화려하게 갈아입는 유려한 모습이 마음을 늘 설레게 해서 좋다.
게다가 제주 섬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나 우뚝 솟아 어느 풍경이든 배경이 되어주는 한라산의 아련한 모습은 마치 어릴 적 쏘옥 안기던 엄마의 너른 품 같이 포근해서, 내가 이 제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나 보다.
이처럼 한라산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좋고, 먼 배경으로 두고 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한라산 탐방로를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온몸으로 한라산을 만끽하는 것일 테다.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두고 묵묵히 침묵한 채로 한라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면, 산은 비로소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융단처럼 깔린 조릿대 군락 위로 우뚝우뚝 솟은 소나무와 삼나무 숲길, 탐라계곡을 건너고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빌레(너덜 바위의 제주말) 위로 정성스레 올려놓은 데크길을 홀로 걷노라면 자연스레 침묵은 걷히고 “아! 좋다”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한라산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치 한라산이 조곤조곤 속삭이는 것처럼, 바람이 숲 사이로 불어오고, 까마귀가 검푸른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며, 노루는 성큼성큼 뜀뛰기를 하는 원시의 숲속에서 나 또한 중첩되듯 동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라산이야말로 제주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표현이 과장 섞인 수사일까?
등산로를 지정하여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에는 해안가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씨투써밋(See to Summit) 챌린지라고, 제주 바닷가부터 백록담까지 등반하는 내쳐 걷는 극한의 코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정복감을 만끽하고픈 일부 마니아들의 이야기라 치부해도 좋을 것이고, 우리네 같은 보통의 보법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중턱에 자리한 영실 휴게소부터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짧은 코스를 올라도 충분히 한라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로 성판악부터 백록담을 거쳐 관음사로 내려오는 종주 코스 도전에 나서보는 것도 좋을 테다.
이 장에서는 사시사철 싱그럽고 풍요롭지만 그중 백미로 꼽히는 한라산의 특히 아름다운 시절을 소개해 본다.
▢ 6월, 진달래꽃의 향연, 선작지왓에서 룰루랄라
육지라면 꽃샘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릴 2월부터 제주는 꽃을 피운다.
걸매생태공원이 피워낸 매화가 겨울을 침노하기 시작하면 봄의 햇빛이 넘실대는 성산의 난드르와 서귀포 엉덩물 계곡에 노란 유채꽃이 소리도 없이 번진다.
이윽고 연분홍 벚꽃이 가시리 녹산로 온 도로를 점령해 화사한 파스텔 빛으로 열흘을 하늘거리다가 뚝 지고 나면 제주가 원산지인 진분홍 겹벚꽃이 중산간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며 피어오른다.
이때다.
완연한 봄이 무르익고 여름이 올 것 같은 5월 말부터 6월 초, 겨우내 폭신한 눈 속에 파묻혀 있던 한라산의 고원인 선작지왓이 느지막이 기지개를 켜고 봄을 맞이하는 시기가.
영실부터 시작된 끝도 없을 것 같이 늘어진 오르막길과 계단길이 끝이 나고 죽어서도 천년이 간다는 키 낮은 주목밭을 피곤한 걸음으로 지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천상의 화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짙게 주름진 한라산의 거대한 분화구가 손에 잡힐 듯 우뚝 솟아있고 털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여 시야 한가득 담겨 있는 선작지왓을 걸을 때면, 여기저기서 감탄 섞인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걸음걸이 역시 경쾌해져서 등산객들 모두가 빙삭대는데(방긋대다의 제주말), 그때 알게 된다.
웃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 한라산에 호우가 내린 여름날, 사라오름에서 첨벙첨벙
제주를 여행할 때 비가 내리면 우비를 입고 사려니 숲에 가야 한다.
저벅저벅 비를 맞으며 신성한 삼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세상 온갖 근심 걱정은 저절로 잊히고,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내 깊은 폐부까지 깊이 차오른다.
제주에 큰비가 내렸다면 엉또폭포가 장관이다. 둑이 터진 것처럼 절벽 위로 급류를 쏟아내는 엉또폭포는 일 년에 몇 번 보기 어려운 장면이라 제주 토박이들도 못 본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폭포가 터진 날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꼭 보기를 원한다.
그래도 큰비가 내린 제주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관은 한라산에 있다.
한라산을 넘지 못하는 낮은 먹구름이 산에 많은 비를 쏟아냈다는 뉴스를 들으면 나는 부리나케 성판악부터 백록담까지 올라갈 채비를 한다.
마른 백록담에 물이 가득 차올라 하늘호수가 된 모습을 기대하며 오르는 길.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워 질 무렵, 사라오름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갈증을 해갈하는 생수와 같다.
등산로에서 잠시 벗어나 사라오름으로 향하면 기대했던 하늘호수가 백록담이 아닌 이곳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둥글고 너른 분화구에 짙푸른 물이 찰랑거리고 하얀 구름이 물결 속에 부서지는 반영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등산화와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사라오름 호반 언저리의 데크길을 찰방찰방 걷는 기쁨이란.
시원한 촉감이 발끝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짜르르 흐르며 눅눅히 쌓이던 피로를 걷어내 주고 정상까지 한달음에 올라갈 것 같은 생기를 온몸에 가득 채우는 맛이란 누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복일 터이다.
▢ 한라산에 큰 눈이 내리면, 눈꽃산행으로 자박자박
겨울.
제주 한라산 기슭에는 천연 눈썰매장이 곳곳에 생긴다.
경사진 목장이나 초원에서 플라스틱 눈썰매를 타는 부모와 아이의 모습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서려 있어 가벼운 마음의 여행자라도 이 행복의 틈새에 끼어들어도 좋을 법하다.
좀 더 무게감 있게 겨울 제주 여행을 준비한다면 큰 눈이 내린 한라산을 오르는 것이 좋을 법하다.
아이젠과 스틱, 방한복 등 준비할 것도 많고 일정의 체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눈으로 가득한 한라산을 뽀드득거리며 걷는 즐거움은 육지의 어느 산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신세계를 자아낸다.
관음사 코스에서 한참을 오르면 맞이할 수 있는 눈과 구름이 버무려진 삼각봉의 자태는 아름답다 못해 고혹할 지경이며, 어리목 코스에서 보게 되는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은 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눈을 시리게 한다.
이 중 백미는 윗세오름의 눈 세상이다.
오직 눈밖에 없는 고원을 걸어 거대한 남벽이 눈앞에 솟아난 윗세오름 휴게소 눈밭에 털퍼덕 주저앉아 배낭에 넣어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호호 불어대며 먹는 맛이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라면을 먹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