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름에 오르다.
흘러간 말이긴 하지만, 흔히 제주도를 삼다도라 했다.
바람, 여자, 돌이 많아 그렇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면서도 세상이 많이 변한 현재는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제주만의 고유성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름이 많은 섬, 오름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제주를 여행하는 12가지 방법]의 첫 장을 열면서, 오름의 왕국인 제주에서 오름 여행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름.
학문적 용어로 ‘여러 차례 분화하지 않고 한 차례의 폭발로 생성된 화산’을 말하는데, 한데 모여 화산지대를 이룬다고 한다.
즉, 제주도는 화산지대이고 제주 섬 곳곳, 산재한 오름은 섬 속 산과 봉우리, 언덕이 되어 숲과 난드르, 빌레를 품고 제주만의 풍경을 오롯이 빛내준다.
그 섬에서 사람들은 해안가나 중산간 샘물이 솟아나는 곳곳에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남쪽 서귀포의 들에서는 미깡을 따고 동쪽과 서쪽의 밭에는 놈삐(무의 제주말)며 지슬(감자), 당근밭을 일구고, 테우리(목동의 제주말)는 오름 기슭, 벵듸(들의 제주말)에서 말과 소를 방목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에 기대 살다가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오름이야말로 제주 사람들의 영혼의 고향인 셈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 동서남북 사방에 솟은 오름은 공식적으로 368개인데, 외형에 따라 보통 네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정상부에 화구가 없이 삿갓 모양으로 솟은 ‘원추형오름’, 정상부에 굼부리(화구)를 가진 ‘원형오름’, 분화구 일부가 무너져 내려 말발굽 모양의 굼부리를 가진 ‘말굽형오름’, 그리고 말굽형오름과 원형오름 등 2개 이상의 오름 형태를 가진 ‘복합형오름’으로 나누는데, 4개 형태의 대표적인 오름을 올라보는 것만으로도 유명 관광지에서는 만날 수 없는 제주의 날것 그대로를 만날 수 있으며, 의 제주 속으로 한층 다가서는 여행이 될 것이다.
□ 함덕 서우봉(원추형 오름)
드넓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을 때, 비췻빛 바다에 발을 퐁퐁 담그고 싶을 때, 여행자의 수런거림과 생활인의 질박함 경계에서 서성이고 싶을 때, 적당한 여행자들의 밀도가 빚어내는 알맞은 활기 속에 빠져들고 싶을 때, 나는 함덕에 간다.
함덕해변에는 제주다운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소담한 언덕처럼 서우봉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함덕에 가면 무엇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싱싱한 기운이 충전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마을과 바다와 오름이 조화로운 함덕 곳곳을 걸을 때 내 삶이 풍요롭다고 느낀다.
특별히 산을 오른다는 단단한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찰방찰방 물에서 뛰놀던 샌들 차림으로 누이는 해처럼 게으르게 걷는 걸음으로도, 계절마다 노란 유채꽃과 하얀 메밀꽃 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서우봉의 능선을 지나 서우봉과 망오름에 쉽게 다다른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스러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다정한 이의 어깨에 기댈 수도,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릴 수도, 아니면 북촌리의 올망졸망한 원색의 지붕들에 황금빛 태양이 머무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바쁘게 제주 섬 곳곳을 자동차로 누비지 않아도, 바당(바다의 제주말)과 오름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곳, 거기다 출출하면 ‘골목’식당에서 배지근한 해장국에 밥 한 그릇 말아 든든히 배를 채울 수 있는 곳, 그곳이 함덕 서우봉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 다랑쉬오름(원형오름)
음력 보름쯤 유난히 맑은 날이라면, 휘영청 밝은 달을 맞으러 다랑쉬오름에 간다.
한자로 월랑봉(月郞峰)이라 부르는 다랑쉬오름은 제주 오름 중에 표고가 가장 높고, 둘레 역시 넓어서 원형의 굼부리(분화구)를 한 바퀴 도는데에도 반 시간은 족히 걸리는 ‘오름의 제왕’이다.
더해서 한라산 백록담보다 더 깊다는 굼부리는 거대한 심연 같아서 저 바닥에 누워 우물처럼 보일 창백한 하늘 위로 불끈 솟은 보름달을 보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들고 만다.
오름이 육지의 산처럼 높은 만큼 오름 정상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데, 오름 정상에 서서 바라보는 제주의 풍광은 성산 일출봉부터 우도, 말미오름, 용눈이오름, 높은오름, 동검은이오름까지 제주 동부의 오름군(群)을 파노라마처럼 온전히 담을 수 있어 낮이든 밤이든 꼭 오르기를 추천하는 오름이다.
더해서 여력이 있다면, 지척에 있는 하트모양의 굼부리를 가진 아끈다랑쉬오름도 꼭 탐방했으면 한다.
‘아끈’은 작다는 뜻의 제주말이니, ‘작은 다랑쉬오름’이라는 말인데, 갯무꽃이 만발한 밭 위로 소담하게 솟은 오름의 모습은 수줍은 소녀의 미소와 같다.
가을이 익어가는 11월 초에는 억새가 만발하는 곳이라, 다랑쉬오름보다 여행자들이 더 많이 찾는 억새 명소인데, 이곳에서 어른 키보다 높이 자라는 억새밭 새로 동반자와 숨바꼭질하는 행복을 꼭 누려봤으면 좋겠다.
□ 지미오름(말굽형오름)
제주 동쪽 끝에 솟아서, 이름도 지미(地尾)인 이 오름은, ‘끝오름’답게 ‘제주 끝마을’인 종달리를 품고 성산포 바다를 향해 소담히 솟아있다.
오름도 산맥처럼 흐르는 맥이 있다면, 아마도 지미오름에서 숨을 고른 제주 동부 오름의 맥이 바다를 지나 우도를 이룬 후 쇠머리오름에서 끝을 맺었을 것이다.
성산포에 일정을 시작하는 경우, 광치기 해변에서 성산일출봉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 후, 이곳 지미봉을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말굽형오름이지만 오름 사면을 바투 올라야 하는 지미오름은 정상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탁 트인 풍광을 허락할 만큼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정상에 자리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을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 가쁜 일정의 고단함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의 감동이 있다.
종달마을과 성산바당, 그리고 성벽처럼 솟은 성산일출봉, 왼쪽으로 느긋하게 누운 우도의 풍경은, 오색종이를 이어붙인 것 같은 난드르 안 레고블록처럼 담과 지붕을 이은 마을과 어머니 품 같은 한라산의 보호 속에 굽이치는 갖은 오름의 능선이 조화를 이루어 제주에서 최고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줄 것이다.
□ 따라비오름(복합형오름)
오름에도 격이 있다면 따라비오름이 최고일 것이다.
이름마저 ‘땅하래비’인 따라비오름은 알오름을 품고 있는 모지오름과 아들격인 장자오름, 그리고 새끼오름을 사방으로 거느리고 있는 가시리 오름군(群)의 조상뻘인 셈이다.
따라비오름은 억새가 만발하는 늦가을 오후에 탐방하는 것이 좋다.
이름과는 사뭇 다르게 바람이 불라치면, 풍성하고 유려한 능선 위로 유영하는 억새꽃 물결이 장관이라 ‘오름의 여왕’다운 기품이 바람 따라 윤기 나게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비오름에 오르면 벵듸를 지나며 삼나무 피톤치드 향을 가득 담은 제주의 바람을 맞아 보자.
굼부리 정상에서 바라보는 가시리의 풍력발전기와 일렬로 늘어선 삼나무 군락을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아 제주에 잘왔다!’라는 감탄이 바람 가득 들어찬 폐부 깊숙이부터 솟구쳐 나올 것이다.
“오름에 올라가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는 강요배 화백의 말을 이곳 따라비오름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