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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종의 연대 Jan 24. 2023

동물실험

Lori Gruen, <Ethics and Animals> 4장


저자는 서두에서 동물실험을 둘러싸고 경합하는 가치들을 탐색하고 동물실험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에 답하는 것을 장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적어도 1억 1,530만 마리의 동물이 연구에 사용되고 있으며, 이 중 10만~20만 마리가 영장류라고 알려져 있다. 영장류는 고도의 사회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발달된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 즉 윤리의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영장류는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존재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실험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장류가 아닌 다른 동물, 예를 들어 쥐는 실험에 사용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동물을 사용한 실험이, 예를 들어 파킨슨병 환자에게 버빗원숭이의 뇌에서 배양한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이식하는 것 같이, 인간에게 분명한 이로움을 제공할 것 같은 실험이라면 용인해야 할까?, 애초에 동물에게 치명적인 고통과 위해를 가하는 실험들의 ‘효용’은 어떻게 판단되는 것일까? 효용이 있을지 없을지 실험 전에는 알 수 없고, 전례를 보면 대부분의 동물실험은 효용없음으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실험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위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해 이 장에서는 먼저 동물실험의 역사에 대해 개괄한다. 2세기 로마제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인 철학자가 돼지를 묶어놓고 뇌신경을 절단하는 공개 수술을 통해 뇌가 행동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16세기 윌리엄 하비는 다양한 동물들의 생체해부를 통해 심장을 관찰하고 순환계의 기능을 파악하는 실험을 했다. 이러한 생체해부는 대중의 주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함 때문에 비난받았다. 19세기 생체해부가 보편화되면서 생체해부를 반대하는 단체들도 동시에 출현했다. 이들 생체해부반대론자들 때문에 20세기 들어 비판을 피하기 위해 관련 저널은 순화된 ‘의학적 용어’들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독극물(poison)은 취하게 만드는 것(intoxicant)으로 피흘림(bleeding)은 출혈(hemorrhaging)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 저널들은 실험대상동물의 전체 사진을 노출하는 것을 기피했고, 동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감췄고, 또 동물들이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을 금지하고 ‘그것’이라는 단어를 고집하기도 했다. 


아울러 동물실험에 대한 규제의 역사를 살펴보자. 영국에서는 1876년 동물학대방지법(Cruelty to Animals Act)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1세기 뒤인 1966년에서야 실험실 동물 복지법(Laboratory Animal Welfare Act)이 만들어졌다. AWA로 불리는 이 법은 제정된 이후 1970년, 1976년, 1985년, 1990년, 2002년, 2007년에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개정을 거듭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1985년 개정이다. 메릴랜드 실버 스프링에 있는 행동 연구 실험실에서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던 Alex Pacheco라는 대학생이 원숭이들에 대한 침습적인 실험을 외부에 폭로하면서 언론의 엄청난 관심과 대중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실험에서 동물의 심리적 웰빙과 고통 최소화를 요구하는 규정이 확립되었다. 즉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실험 동물의 심리 상태가 고려 대상에 포함된 것이었다. 


동물이 느끼는 고통을 인간은 어떻게 식별하는가? 애초에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가? 느낀다. 생리학적 증거가 있다. 또 동물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은 수많은 행동징후를 통해서도 확인가능하다. 생리학적 지표와 행동적 지표를 조합하면 대부분의 동물들이 ‘의식적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험동물복지법의 거듭된 개정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역의 실험실에서 동물들은 고통을 겪고 있고, 그 중 심리적 웰빙을 보장받지 못한 영장류도 수백 마리나 된다. 2007년 12월부터 2008년 9월까지 미국 인간협회(Humane Society of the United States: HSUS)는 300마리 이상의 침팬지와 6,000마리 이상의 다른 영장류들이 수용된 미국 최대의 침팬지 연구 시설에서 비밀조사를 실시해 5x6 크기의 격리된 우리에 갇힌 침팬지와 원숭이들의 실태를 폭로한 바 있다.  


대부분의 동물실험은 쓸모없는 실험으로 수만 마리의 동물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부 동물실험은 백신이나 의약품 등 인간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기여하는 지식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동물실험으로부터 얻는 어떤 효용은 동물실험을 정당화 하는가? 공리주의 혹은 공리주의적 결과주의는 이 질문에 대해 실험의 유익한 결과를 관련 비용과 비교하면서 동물 실험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동물실험이 인간과 (어쩌면) 동물들의 복지를 증진시킬 때, 또 가능한 한 적은 수의 동물로 이루어진 실험에 의한 것일 때,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할 것일 때라는 원칙과 조건을 설정한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최근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장류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자 티푸 아지즈의 연구에 대해 지지적인 논평을 하기도 했다. 아지즈의 실험이 이른바 비종차별주의자 공리주의 테스트(non-speciesist utilitarian test=NSUT)를 통과한 것이다.  


 NSUT에 따르면, 실험 X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정당화될 것이다.


1. 가능한 모든 옵션들 중에서, X는 고통이나 비용보다 더 많은 쾌락이나 이익을 창출한다.

2. 실험 X의 정당성은 종차별주의적 추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동등한 이익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1에 대해서는 푸시핀과 푸쉬킨의 효용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오래된 공리주의적 논쟁이 제기된다. 즉 판단을 내리기 위한 상호 간의 의미있는 효용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푸시핀과 푸시킨은 패러다임이 다르고 통약불가능하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결과론자들은, 논리적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잘하든 못하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이런 종류의 비교를 실제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적 공감“imaginative empathy”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저녁값을 내느냐를 넘어선 높은 수준의 윤리적 판단도 이 상상적 공감으로 가능할까? 예를 들면 동물 실험 같은 문제말이다.


척수손상 환자를 위한 SCI 연구에서 동물들이 대량으로 희생되는 문제를 윤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미국에만 척수손상환자 8,00명이고, 이 연구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연간 8만마리다. 연구기간은 1분기가 최소 10년이다. 80만 마리가 희생되는 것이다. 8천 명을 위한 80만 마리의 희생을 윤리적 관점에서 판단 가능할까.  


1) 척수손상을 입은 인간과 연구에 사용된 동물들이 입는 해를 효용비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 양자가 통약불가능할 뿐 아니라, 미래의 이익이 확정된 것이 아니므로 비교불가능하다. -> NSUT 1번 통과 불가. 즉 "실험 X를 수행하는 것이 그것이 야기하는 해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오는 유일한 행동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불가능하다.  


2) 종차별을 넘어서 동등한 이익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 원칙은 어떻게 검증될 수 있나? -> 피터 싱어는 “실험자가 유사한 정신 수준의 인간에 대해서도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지 물어봄으로써”가능하다고 했다. -> Ray Frey는 “다른 것들이 동등하다면. 어떤 동물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 결국 SCI 연구를 위한 실험은 종차별적 추론이 관여한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것이다. -> NSUT 2번도 통과 불가. 


이렇듯 동물실험에 관한 공리주의적 정당화는 추상적으로만 그럴듯해 보일 뿐 현실에서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동물 실험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에 반대하는 동물 실험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이 입장을 지지하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주장이 있다.  


첫째, 생명의 도구화 거부- “동물이 인간 질병을 위한 모델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거나 해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동물들은 각자의 삶을 지닌 개체며 그들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축소해서는 안된다. 동물실험은 나치의 인간생체실험과 다를 바가 없는 윤리적 실수다.


둘째, 정보에 입각한 동의의 문제 -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실험은 피실험자에게 충분히 정보가 제공된 위에서 완전한 동의 하에 이루어진 실험들뿐이다. 그런데 인간실험에서도 이것이 안 지켜지는 수많은 사례가 있고, 게다가 동물들은 절대 동의를 해줄 수 없고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과소평가된 취약한 개체이므로 연구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셋째, 윤리적 요구의 한계와 엄격함의 적용 – 타자를 위한 고통이 극단적인 희생을 수반하는 경우 타자를 위해 도덕적으로 고통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일반적인 도덕적 가정을 동물 실험에도 적용해야 한다. 즉 배고픈 사람을 먹이기 위해 누군가에게 솥으로 걸어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고 이것은 동물 실험의 경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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