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붓다와 불교
2.3.4. 붓다와 불교
지금까지 우리는 축의 시대 성현들 중에서 서양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예수와 기독교,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서양 철학의 세계관과 그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제 동양으로 발길을 옮겨서 붓다와 노자를 만나 볼 차례이다. 먼저 붓다를 만나보고, 노자와 공자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붓다는 BC 500년 경 인도와 네팔 접경 부근의 샤카이 부족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붓다의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나, 샤카이 부족에서 배출한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샤카무니의 한역), 불교적으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붓다, 이외에도 여래, 세존, 아라한 등 존경의 의미를 담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 운다.[참고 2.5] 붓다는 왕자로서 필요한 군사학, 천문학, 수학, 의술, 음악 등을 체계적으로 교육 받으며 자랐다. 여기에 더해 왕인 아버지가 특별히 학식이 깊은 브라만을 초청해서 ‘베다’를 심층적으로 학습하는 등 왕자로서 높은 수준의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유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호화로운 궁궐 안에서 궁 밖의 험난한 세상과는 단절된 채로 성장하였다. 어느덧 청년이 된 붓다는 성 밖의 세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어느 날 아버지인 왕 몰래 성 밖으로 나온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겪는 생노병사의 고통을 마주하고,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함께 깊은 사유에 빠졌다. 다음 날 별 기대 없이 또 다시 성 밖으로 나온 붓다는 이번엔 누더기를 걸친 떠돌이 수행자를 만났다. 그런데 이 수행자는 거지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붓다는 이를 보고 또 다시 깊은 사유에 잠겼다. 사람은 생노병사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 저 수행자처럼 고통을 극복하는 힘은 무엇일까? 붓다는 세상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야겠다는 결의가 마음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붓다는 2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성 밖의 세상으로 나와 수행의 길을 나서게 된다. 6년 이상을 극도의 고행으로 수행하던 붓다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게 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진정한 붓다가 된 것이다. 깨달음에는 3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스스로 깨닫는 자각(自覺), 그리고 이 자각으로 다른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 각타(覺他), 마지막으로 이 자각과 각타의 깨달음의 작용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게 충만한 각행원만(覺行圓滿)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참고 2.27] 불가에서는 각행원만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자각과 각타를 갖추면 보살이라 하고, 자각과 각타, 그리고 각행원만의 경지 이 3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경지에 이르면 붓다라 한다. 이제 붓다는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중생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하여 설법을 이어갔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갔고, 같이 모여 수행하는 공동체인 승가의 규모도 점점 커져갔다. 이는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불교라는 종교로 발전하였다.
도대체 붓다의 깨달음이 무엇이기에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였고, 약 2,500년의 시간 동안 세계 4대종교의 하나로 자리 잡아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을까? 이제부터 붓다의 가르침과 불교의 세계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붓다는 어려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베다’의 가르침에 깊숙하게 영향을 받고 자랐다. 당연하게도 붓다의 생각과 불교의 시작은 ‘베다’에 뿌리를 둔 순환적 세계관과 범아일여 사상[그림 2.7 참고], 그리고 이러한 사유체계를 집대성하여 대중화한 힌두교의 윤회사상[그림 2.8]을 토대로 한다. ‘베다’의 힌두교는 그림 2.8에 보인 것처럼 세상이 우주의 질서(다르마)에 따라 윤회하는 과정 속에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도 그 카르마(업)가 우주 궁극의 본질, 질서인 다르마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순환 또는 악순환의 삶이 결정되는데, 자아의 삶의 업보(카르마)가 우주의 질서(다르마)에 부합할 때, 범아일여가 되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 안에서 카르마를 쌓음으로써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고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하여 붓다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베다’의 순환적 세계관을 이어 받은 힌두교의 범아일여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계승하였지만,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과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붓다는 이 우주는 인간 세상에서처럼 지도자가 존재하고, 지도자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있어서 서로의 상대적인 에너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인 ‘다르마’라 하였다. 즉 힌두교처럼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에 의해 ‘다르마’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의 에너지에 의해 마치 구름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처럼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상태를 유지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아트만을 자아의 본질로 인정하는 순간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 나의 자아이자 본질이 되고, 변하지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집착하는 순간 윤회의 ‘카르마’를 쌓을 수밖에 없어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게 된다. 이를 ‘반야심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인간이 이 세상의 실상(實相)을 몰라 가유(假有)에 집착함으로서 업을 쌓고, 이 업 때문에 윤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해탈(解脫)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아트만이라는 자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우주의 본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순간순간의 임시 상태에 불과하니 이를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다르마’를 제대로 파악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힌두교와 달리 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나, 즉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져지고, 보여지고, 존재하여 활동하고 있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불교에서 설명하는 자아는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마치 먼지처럼 서로 아무렇게나 인연에 따라 쌓여 있다는 의미이다.[참고 2.29] 여기서 색(色)은 물질적 요소로 보여지고 만져지는 육체를 말하고, 나머지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적 요소로서, 수(受)는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감각, 상(想)은 감각 또는 의식으로 인해 마음속에 떠오른 마음결 즉 표상(이미지), 행(行)은 마음결에 따른 마음의 상태 즉 마음씀(욕구, 의지 등), 식(識)은 수상행(受想行)으로 인한 모든 마음결과 마음씀을 일으키고 종합하는 정신적인 의식 활동을 말한다. 붓다는 이 오온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나’ 뿐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오온(五蘊)의 인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오온은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질 뿐이니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사상의 근간으로 3가지 진리인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나’의 본질인 자아는 물론이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고, 다만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뜬 구름 같은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오온’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이다. 이를 대중이 알기 쉽도록 오온 중에 우리 눈에 보이는 ‘색’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아니 내 몸이 이렇게 씩씩하게 건재한데, 도대체 이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인가? 그런데 사실 변하지 않는 실체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나의 육체도 사실 알고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고 죽는 변화과정 속에 있다. 이는 머리카락, 손톱 등이 자라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변화뿐 아니라 어릴 때 사진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캠핑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장작은 어떤가? 밤새 우리에게 불멍을 때리게 해주고 아낌없이 산화한 장작은 이미 재로 변하고 없다. 장작이라는 영원불멸한 본질이 있다면 장작이 불에 탄다고 해도 재로 변하지 않아야 하고, 설사 변한다 해도 장작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나, 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같아야 할 것이다. 장작을 구성하는 셀룰로오스 같은 유기화합물은 탄소, 산소, 수소 등등이 수개 ~ 수십 개 이상 모여 만들어진 분자들로 장작을 불에 태우면 탄소는 산소와 반응해 이산화탄소(CO2)와 열을 만들어내고, 수소는 마찬가지로 산소와 반응해 물(수증기, H2O)과 열을 만들어낸다. 장작이 갖고 있는 산소만으로는 탄소와 수소가 반응하는데 턱 없이 부족하여 외부에서 산소가 추가로 공급되어야 장작이 제대로 잘 탈 수 있다. 우리가 모닥불을 붙일 때 부채질을 하는 이유이다. 어쨌든 장작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은 불이라는 열에너지에 의하여 세상의 다른 원소들과 이합집산하여 각각 세상으로 흩어졌다.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재조차도 이미 장작과는 다른 형태의 원소로 구성된 것이다. 우리 눈앞에 보여 지고 만져지는 ‘장작’이라는 실체는 영원불멸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의 요소들이 시공간과 인연(주변 환경과의 상황, 관계)에 따라 임시의 상태인 ‘무아’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나’의 본질인 자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제각각의 오온이 그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임시상태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여기서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 제각각이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무아’들 각각이 모여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상태로 흘러가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로 설명한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인 말로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이는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다르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와 외부 세계, 이 세상 삼라만상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간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연기이다. 이러한 연기에는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의 두 가지가 있는데,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존재와 삶 등에 대한 집착(集)에 따른 고통과 괴로움(苦)이 일어나는 인과관계를 유전연기라 하고, 불교의 수행(道)을 통해 괴로움이 소멸(滅)된 이상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는 인과관계를 환멸연기라 한다.[참고 2.29] 붓다는 이 세상 삼라만상의 ‘무아’들이 상호 간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연기의 인과관계로 놓여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우주의 질서이고 ‘다르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정적인 명사가 아니라 동적인 동명사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행동, 어떤 관계도 영원불멸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연 따라 변화하는 움직이는 상태라는 것으로 이를 불교에서 3가지 진리인 ‘삼법인’의 두 번째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붓다는 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참고 2.28]
“세존이시여, 자주 ‘무상(無常), 무상’ 하시는데, 무엇을 무상이라 합니까?”
“나타야, 우리의 몸(色)은 변한다. 우리의 느낌(受)은 변한다. 우리의 생각(想)은 변한다. 우리의 의지(行)는 변한다. 우리의 인식(識)은 변한다. 나타야, 이같이 관찰해서 일체를 떠나라. 일체를 떠나면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 해탈한 그때, 미혹된 삶은 끝난다.” <상윳타 니카야 23 : 13>
나의 자아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매 순간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무아’의 상태이다. 이러한 ‘무아’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 삼라만상과 시공간적으로 서로 간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연기의 인과 관계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데,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이러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깨닫지 못하고, 이 ‘무아’와 ‘무상’에 저항하고 ‘무아’와 ‘무상’한 현상을 실체로 착각하면 현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삼라만상은 ‘무아’의 상태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죽고 사라지지만 또 ‘무상’하기 때문에 태어나고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에 집착하는 건 고통을 발생시킬 뿐 그야말로 쓸모없는 헛된 몸부림인 것이다. 그래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연기를 꿰뚫어 이해할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열반의 평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 3가지 진리인 ‘삼법인’의 세 번째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한다. 결국 불교사상의 근간인 ‘삼법인’은 ‘나’라는 존재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아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 세상의 삼라만상도 본질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제법무아’의 상태이니 이를 제대로 깨달아 쓸데없는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외부 세계의 삼라만상이 시공간적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과의 관계인 연기를 제대로 꿰뚫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달아 수행을 통해 환멸연기에 정진하는 것이 마침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는 길이고, 비로소 카르마의 업을 끊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해탈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불교 경전 ‘아함경’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법’은 우주의 질서, 진리 즉 ‘다르마’를 말하고, ‘불’은 붓다, 즉 깨달은 자를 의미 한다. 즉 이 세상 삼라만상의 연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우주의 진리와 질서인 ‘다르마’를 깨칠 수 있고 이 다르마를 제대로 봐야 마침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불교의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알아보는 가운데 수시로 고통과 집착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도대체 고통과 집착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열반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하는지 불교의 핵심 개념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좀 더 알아보자.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예전에 오랫동안 고행을 함께 했던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한 가르침이었다. 이 내용이 ‘아함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참고 2.30]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4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넷은 어떤 것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苦), 괴로움의 발생이라는 진리(集),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道)이다.
어떤 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인가?
태어나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근심하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괴로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해, 5음(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므로 괴로움(五盛陰苦)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어떤 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라는 진리인가?
느낌과 애욕을 끊임없이 일으켜 항상 탐내어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라는 진리이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인가?
저 애욕을 남김없이 소멸시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이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인가?
8정도(正道)이니, 바르게 알기(正見) · 바르게 사유하기(正思惟) · 바르게 말하기(正語) · 바르게 행하기(正業) · 바르게 생활하기(正命) · 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 · 바르게 알아차리기(正念) · 바르게 집중하기(正定)이다. 이것을 4제라고 한다.” <아함경 제14권>
아함경에서 이야기한 붓다의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4가지 진리를 말하는데, 먼저 고(苦)에 해당하는 고성제는 우리가 앞에서 삼법인을 이야기하면서 수시로 언급했던 바로 그 고통을 말한다. 즉 불교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여 카르마(업)를 짊어진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에 묶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고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고성제는 구체적으로 8가지의 고(苦)가 있는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가지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를 말한다. 먼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가지 고통은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는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고통이다. 여기에 애별리고(愛別離苦)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거나 사별하는 고통을 말하고,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원한이 있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갖고 싶은데 얻지 못하고 또 자신의 의지대로 추진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고통, 마지막으로 오온성고(五蘊盛苦)는 앞의 7가지 ‘고’를 개괄하여 강조한 것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쌓이는 오온의 ‘무상’을 깨닫지 못하고 오온에 자기중심적으로 집착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을 말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 고성제라 부르는 ‘8고’는 인간이라면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마주치게 되는 모든 고통을 말한다. 여기서 ‘생로병사’의 4가지 고통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필연적인 고통이다. 따라서 운명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 4가지 고통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하필 이런 병이 나에게만 찾아오는 거야?’ 등과 같이 쓸데없는 집착으로 2차적인 고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나머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온성고의 4가지 고통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고통으로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 : 色受想行識)에 집착하거나, 이 오온이 집착을 일으키는 근원이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다. 결국 나를 구성하는 오온이 ‘무아’이고, 이 오온의 연기가 ‘무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인 집성제이다.
집성제는 바로 고성제에서 말하는 고통의 원인인 집착에 대한 진리이다. 붓다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바로 집착이고, 이 쓸데없는 집착을 하게 하는 원흉이 갈애(渴愛)때문이라고 설파한다. 갈애는 심한 갈증으로 애타게 물을 찾는 것처럼 무분별하고 그칠 줄 모르는 갈망으로, 이러한 갈애는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가 있다. 먼저 욕애는 오감을 통해 쾌감을 추구하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적 욕망이고, 유애와 무유애는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다시 말하여 유애는 문자 그대로 존재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 즉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집착이고, 반대로 무유애는 존재를 포기하고 싶은 욕망, 즉 고통에 둘러싸인 고뇌의 삶을 버려 버리고 싶은 집착을 말한다. 이러한 갈애 때문에 부질없는 집착을 하게 되고, 이 집착 때문에 우리가 고해의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그래서 붓다는 마음속에 갈애가 일어나거든 이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붓다는 이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이니 갈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반복해 나가면 갈애를 점차 약화시켜 결국에는 소멸시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멸성제이다.
지금까지 불교의 개념인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를 살펴보았다. 이들 고성제와 집성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고’와 ‘집’을 통해 고통이 일어나는 원리를 설파한 것 이라면, 다음의 멸성제와 도성제는 이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멸’과 ‘도’를 통해 고통이 사라지는 원리를 설파한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진리인 멸성제는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버리고 갈애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면, 즉 오온의 작용에서 집착이 소멸되고, 또 그 오온에 집착하지 않아 갈애가 소멸된 상태가 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탐진치(貪瞋癡)]의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의 경지’이른다는 진리이다. 여기서 ‘열반’이란 고통과 집착의 불꽃이 사그라져서 세상 사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깊은 바다와 같은 고요와 적막 상태에 도달하여 완전한 평온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버림으로서 번뇌를 소멸하고, 번뇌를 소멸함으로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마침내 카르마의 윤회를 끊어내고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고’와 ‘집’을 어떻게 해야 소멸시킬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수행을 하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이 바로 네 번째 진리인 바로 ‘도성제’이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는 집착을 버리고 고통을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에 대한 진리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붓다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바로 팔정도이니, 즉 바르게 알기(正見) · 바르게 사유하기(正思) · 바르게 말하기(正語) · 바르게 행하기(正業) · 바르게 생활하기(正命) · 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 · 바르게 알아차리기(正念) · 바르게 집중하기(正定)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여기서 바르게 알기(正見)란 붓다가 알려준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진리를 깨달아 제대로 보는 것을 말하고, 바르게 사유하기(正思)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남을 해치지 않는 사유이다. 바르게 말하기(正語)는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바르게 행하기(正業)는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바르게 생활하기(正命)는 그릇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는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기지 않도록 의욕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데 마음을 쏟고, 이미 생긴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끊으려는 의욕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데 마음을 쏟고, 아직 생기지 않은 건전한 것들이 생기도록 의욕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데 마음을 쏟고, 이미 생긴 건전한 것들을 유지하고 늘리고 계발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데 마음을 쏟는 것이다. 다음 바르게 알아차리기(正念)는 몸(身) · 느낌(受) · 마음(心) · 현상(法)을 매 순간 알아차려서 세간에 대한 탐욕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한 앎과 알아차리기를 지니고 머무르면서 거기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끊임없이 통찰하는 수행이다. 마지막으로 바르게 집중하기(正定)는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마음을 한곳에 모아 4선(禪)을 닦기 위해 수행하는 네 단계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제1선은 애욕에서 벗어나 안락한 상태이고, 제2선은 마음이 고요하고 한곳에 집중됨으로써 평온과 안락이 있는 상태이다. 제3선은 평온을 알아차려서 분명한 앎을 지니고 완전한 평화에 머무는 상태이고, 제4선은 열반적정으로 청정해진 상태이다. 이상의 ‘팔정도(八正道)’는 ‘고’와 ‘집’을 ‘멸’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에 대한 진리로 여덟 가지 하나하나가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에 이르는 수행법이지만 각자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八正道)’가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함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붓다와 불교 사상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순환론적 세계관, 즉 카르마(업), 다르마에 따른 윤회, 범아일여의 진리에 의한 해탈은 이어 받았지만, 자아와 우주의 본질인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힌두교는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이 카르마(업)를 이해하고 수행을 통하여 선업을 쌓는 동시에 우주의 질서인 다르마를 관장하는 브라흐만과 세부적으로 우주의 생성, 유지, 소멸을 관장하는 신인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등의 범신들의 도움을 받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고, 반면에 불교는 자아와 우주의 본질인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존재는 끈임 없이 변화하는 임시 상태인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고 팔정도의 수행을 통하여 ‘열반적정’의 해탈의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한마디로 “생야일편 부운기 사야일편 부운멸(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존재 삼라만상은 저 하늘의 뜬 구름처럼 스르르 생겨났다가 사르르 사라지는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이다. 실제로 저 하늘의 구름은 구름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특정하고 영원불멸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떠돌아다니는 수소와 산소 같은 원소들이 어떤 시공간에서 이 우주의 인연에 따라 만들어지는 물방울들의 관계에 의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계의 실상(實相)이 ‘제법무아’이고 이 세상의 연기가 ‘제행무상’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집착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외딴 시골 마을에 산다고 가정해보자. 오일장이 서는 날 읍내 시장에 가려면 2시간 간격의 마을버스를 타야하는 외진 곳이다. 10시 버스를 타려고 사력을 다해 뛰어 가는데 바로 앞에서 버스는 야속하게도 떠나가 버린다. 이런 상황이면 우리는 ‘아! 조금만 기다려주지’, ‘아이참 좀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하면서 원망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후회스럽고 짜증이 폭발한다. 고통이 발생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오늘 10시 버스를 탈거야’하고 마음속에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제법무아’를 깨닫지 못한 집착이고, ‘오늘 10시에 버스가 올 거야’라고 판단하는 것도 이 세상 연기의 ‘제행무상’을 깨닫지 못해서 생기는 집착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서두르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버스를 타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다가 갑자기 다칠 수도 있고, 10시 버스가 갑작스럽게 고장이 나서 결행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와 상관없이 자기 시간표대로 운행하는 버스를 보고, 저 버스는 내가 탈 버스야 라고 규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고 버스의 운행시간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냥 무심하게 인연에 따라 버스를 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0시 버스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집착하지 않아야 버스를 타지 못해서 생기는 고통도 일어나지 않으며, 버스를 타고 못타는 것과 상관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오해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의 오온이 ‘제법무아’이고 이 세상 연기가 ‘제행무상’임을 알아차려서 나의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집착이 고통을 낳고, 그 집착으로부터 카르마(업)가 쌓이고 결국 윤회의 틀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삼법인’의 진리를 깨닫고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집착에 의한 카르마를 끊고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러한 이야기들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맞다. 우리는 이미 ‘소크라테스와 서양철학’에서 근현대에 이르러 헤겔의 관념론과 후설의 현상학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세계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서구 사람들은 실재론의 본질에 매달리다가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반면, 동양의 붓다는 이미 2500년 전에 이를 통찰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누가 앞서서 깨달았느냐, 누구의 깨달음이 우수하냐가 아니고,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세계관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세계관은 뒤에 노자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관념적 통찰을 통해 일원론적 세계관(본질의 가치에 의해 선과 악으로 분절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오온’이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론적 일원론)을 이해하였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비록 늦었지만 합리적・이성적 논리와 경험적・과학적 분석에 의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