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 소멸엔 취미발레가 특효

발라레 인생(47) 109번째 브런치 by Sujiney

by Sujiney

죽었으면 하는 사람,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 사람을 알기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없다면, 축하한다. 부럽다, 진심. 다음 생이 있다면 나도 그렇게 인류애 충만하게 살 수 있기를.

유행 중인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외향형 E일 때도, 내향형 I일 때도 있지만, 후자인 경우가 늘었다. 10년 전의 나를 알던 사람은 나를 극 외향형으로 기억한다. 사람 만나는 게 좋고, 걸인부터 대통령까지 다 만날 수 있는 직업이기에 기자가 됐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이젠, "싫진 않다, " 정도가 맞겠다. 순도 100%의 솔직함으로 말하면, 좋지 않을 때가 꽤 많아졌다. 물론 이건 남 탓 아닌 내 탓도 크다.

나는 예전의 내가 그립다.




그리운 나를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 발레 학원.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이는 곳이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옛날의 내가 된다. 선생님들도 각양각색, 학생들도 남녀노소 다채롭다. 차분함과 엄격함과 열정과 유머 감각 등 다양한 면을 두루 갖춘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내가 더 잘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 나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가 이렇게 열심이라니, 눈물겨운 일이다. 수강료 지불하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수강료는 선생님들의 전문성과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기본 중의 기본일 뿐. 발레 광복 후 만난 거의 모든 선생님들에겐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순수한 열정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 주고,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레슨마다 변화를 주며, 땀이 흐를 정도로 움직여 준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포장까지 아트인 연희동 샌드위치 맛집 인앤아웃03♡



그렇게 발레 학원 가는 길. 지난주의 어느 하루는 그러나 즐겁지가 않았다. 학원 가는 길에 받은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잔뜩 헝클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다. 신기한 것은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무례함을 모른다는 것. 나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끔찍하다.

길어진 통화를 끝내고 부랴부랴 들어간 클래스. 마음을 정리할 수 없었다. 순서를 놓쳤고, 박자를 놓쳤고! 마음을 놓쳤다. 중간의 코어 스트레칭 시간엔 눈물까지 나왔다. 내게서 어두운 에너지가 나오는 것도, 그게 다른 분들에게 전해지는 민폐도 싫었다. 다 내가 수양이 부족한 탓.

그때였다. 정혜연 선생님께서 살짝 다가와주셔서 다리를 잡아주신 건. 엎드린 채 레오타드에 얼굴을 묻고 개구리 자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발레 동작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 투성이지만, 개구리 스트레칭 자세는 특히나 안 돼서 버둥거리는 다리를, 혜연 선생님은 특유의 차분함으로 잡아주셨다. 과잉해석이겠지만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전해주시는 듯했다.

덕분에 마음이 곧 가라앉았다. 이어진 센터워크에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웃으며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몰라요.


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무용수 도로테 질베르♡ copyright Dorothee Gilbert Instagram



정훈일 선생님의 유머 가득 클래스도 빼놓으면 섭섭하지. 다리를 차올리는 동작인 바뜨망 시작 전, 선생님은 특유의 유쾌함을 표면장력까지 가득 채워 이렇게 외치시곤 한다. "미운 사람 있죠? 그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힘껏 뻥~ 차세요. 발바닥으로 바닥을 느끼며 다리를 던져요. 미운 사람 없다고요? 에이 거짓말!"

미움이 위험한 이유. 미운 상대는 어찌할 바 없는데 그 미움을 품은 나 자신을 좀먹기 때문이다. 그럴 땐 훈일쌤 말처럼, 바뜨망을 차자. 미움은 내 맘 속에서 차서 쫓아내 버리기.

신기한 건 바뜨망을 포함해 클래스 매 순간에 나의 100%를 주다 보면, 미운 사람 따위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든다는 점이다. 숨이 차고 땀이 흐른다는, 나의 '살아있음'을 격하게 체감하는 순간,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도 결국 내가 나 스스로에 채운 족쇄라는 깨달음도 온다. 그 사람이 어찌 되든 말든, 관심 자체가 없어진다. 마음도 몸도 정화되는 느낌. 내가 없으면 남도, 세상도 없다는 깨달음.


흠, 이쯤 되면 취미발레는 거의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수준 아닌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무슬림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들에게도, 바뜨망을 권하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나는 이제 또 바뜨망을 차러 간다. 이 글을 읽어주신 당신에게도 바뜨망과 같은 탈출구가 찾아오길.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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