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는 몰라도 이건 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갈 장면 중, 2023년 4월 29일도 포함될 것을. 김현우 발레단의 일원으로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올린 공연. 대열을 맞추고, 심호흡을 한 뒤 첫 포즈를 잡았다. 막이 오르는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으니, 관객의 박수.
시작의 순간, 관객이 건네준 다정한 응원이다. 박수 소리에도 질감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선생님들의 뜨거운 응원이 담긴 박수는 부드럽고도 강렬했다. 행복해서 눈물이 난 건 실로 오랜만.
박수를 보내준 모든 분들이 다 감사하다. 기초반에서 허우적대던 날 사람으로 빚어주신 사랑하는 여름 선생님과 연주 선생님. 무대를 마련해 주시고 지도해 주신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과 조성은 선생님, 정훈일 선생님. 앙드당이란 말조차도 몰랐던 때를 지나, 선생님들 앞과 옆에서 감히 조지 발란신 할아버지의 '세레나데'를 (그것도 전막으로!) 올리는 무대에 서서 심지어 박수를 받고 있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태어나서 다행이다.
영원히 못 잊을 무대. 2023년 4월 29일 마포아트센터 김현우발레단. By Sujiney
쉽진 않았다.
이번 공연은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성인들만으로 구성된 우리 발레단으로선 여러모로 큰 도전이었다. 미국 발레의 개척자, 발란신의 '세레나데'를, 하이라이트가 아닌 40분에 가까운 전막을 올렸다는 게 첫 번째 도전. '세레나데'로 채운 1부에 이어, 2부 역시 만만찮았는데, 클래식 작품뿐 아니라 창작 작품까지 다채로운 구성이었다. 이중 컨템퍼러리 발레에 도전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아래 한 문장으로 정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당시엔 생각했었다. 솔로도 아니고 군무인데, 함께 하면 더 재미있고 부담도 덜하지 않을까? 해보자!
그때의 나로 돌아가서 말해주고 싶다. 이 바보야.
군무라서 쉽지 않을까? 군무라서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솔로라고 맘 편할리 만무. 아름다움은 쉽지 않다.
여름쌤 연주쌤 사랑해용♡
'백조의 호수'는 주인공 오데트와 오딜, '지젤'은 제목 그대로 지젤로 빛이 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오데트와 오딜, 지젤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그들 뒤의 백조와 흑조 군무, 그리고 '윌리'라는 정령(이라고 쓰고 처녀귀신이라 읽는다) 군무가 있기에 빛을 발한다. 종합예술인 발레에서 혼자 이뤄지는 건 없다. 결국, 팀워크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군무는 어찌 보면 더 어렵다. '다름'을 '같음'으로 진화시켜 나가는 과정 이어서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춤을 추는 게, 말만 쉽다.
다른 데 같은 것. 다른 것을 인정하되 같은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만들어내는 것. 그게 군무의 어려움이자 매력이다.
한 발레단의 수준을 가늠하려면 주역이 아니라 그 군무를 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 아닐까. 발레에만 군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BTS의 칼군무엔 전 세계가 열광했으니.
'세레나데'에서도, 모던 창작 작품이었던 '시시포스'에서도 군무는 어려웠다. 나름 열심히는 했다고 조심스레 주장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출장 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도 무수히 영상을 봤고, 이역만리 출장지에서도 아침마다 군무 연습 영상을 틀어놓고 연습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연습에선 실수연발. 안아방을 해야 하는 곳에선 앙바를 하고, 왼쪽을 보며 뛰어야 하는데 오른쪽을 보기 일쑤였다.
But 절망할 시간 따윈 없지.
때론 절망도 사치다.
무대 최종 점검 삼매경이신 김현우 원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By Sujiney
솔로는 나만 틀리면 나만 창피하고 끝인데, 군무는 내가 틀리면 나로 인해 모두가 틀린다. 이 어찌나 민폐인지.
대열에서 1cm도 이탈해선 안 된다. 옆 동료 앞 동료 뒷 동료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시는 이유. 신기하게도 집중을 하니 뒤에 있는 움직임도 감지가 됐다. 공기의 움직임, 빛의 명암 등으로 서로의 존재를 서로를 직시하지 않고도 느낀다는 건 꽤나 근사한 경험이었다.
군무가 잘 맞으면 형언하기 어려운 쾌감이 찾아온다. 군무의 기쁨이자 슬픔은 한 끗 차이인셈.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아시아인 최초 에투알(수석 무용수, '별'이라는 근사한 뜻), 박세은 무용수를 인터뷰했을 때, 그가 들려줬던 말을 옮긴다.
“군무가 훨씬 어려웠어요. 주역이면 내 동작의 완성도만 높이면 되는데, 군무는 옆의 동료와 줄도 잘 맞춰야 하고 분위기를 살펴가며 무대에 서야 하니 센스도 키울 수 있었고요, 위기 대처 순발력도 길러졌어요. 주역으로 무대에 서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그들의 멘탈이나 긍지를 체감했고, 나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다고 절감했어요. 처음부터 주역하라고 했으면 못했을 거 같아요. 매일 기본 바워크 연습 시간에도 긴장감이 가득했고요. 이런 모든 점들이 저를 더 성장하게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 이 은혜는 평생 갚을께용♡
신기한 것. 계속 틀렸지만 계속 리뷰를 하고 선생님들께 여쭤보면서 연습을 해나갔더니, 어느 순간, 몸이 움직임을, 방향을, 타이밍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바로 출 수 있도록 몸에 기억을 시켜놓아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이거구나 싶었다.
이상한 것. 처음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오히려 실전 무대에서 실수했다는 것. 컨템 작품에서 가장 좋아했던 군무 부분이기도 한데, 무대에 올라선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면서 나 혼자 틀렸...다ㅠ 결국 어쩌다 솔로를 추게 됐다는, 면목 없는 이야기. 성은쌤 죄송하고 (느닷없지만) 사랑합니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연습에 답이 있다. 무작정 연습은 노노. 효율적으로 집중하는 연습이 답이다.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고, 함께 서로를 도와주는 발레메이트들이 있었기에 2023년 4월 29일을 떠올리면 먼 훗날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선생님처럼 열과 성을 다해 이끌어준 멋진 발레메이트, 나경님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
공연 다음날엔 살짝쿵 사진@윤식스포토. 작가님 감사합니당
덧.
4월 29일 공연 전날, 개인적으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만약 공연이라는 큰 계기에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그 전환점을 힘차게 도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공연을 올리기 전의 나와, 공연을 올리던 나, 공연을 올린 뒤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군무에만 만족하면 어쩌냐고? 그럴 리가. 솔로에도 언젠가는 도전해야지. 하지만 조급하게 가지는 않으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발레 나이'라는 건 따로 있지 않을까 싶은 요즘이다.
레벨 업이 남보다 늦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나는 나만의 페이스로,
꾸준히 열심히 그러나 즐겁게 가면 된다.
묵묵히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장해 있을 거라는 확신을, 이번 공연은 내게 심어줬다.
나의 인생. 그 무대에선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주역 솔로다. 하지만 나혼자 가는 인생은 없다. 타인과의 합도 잘 맞춰가면서 군무도 잘 추며 살아가보자. 발레는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