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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Nov 18. 2020

삶을 듣는 순간

피아노 선생님을 기억하다

 특별한 무대였다. 나의 옛 피아노 선생님이 희수를 맞아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연주가 거의 끝나가고 이제 마지막 순서만 남아 있다. 스테이지에 조명이 켜지자, 선생님이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구부정한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눈가가 촉촉해진다. 아득한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투명한 피아노 선율에 실려 들려온다.    

 

  나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A 선생님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큰 체격,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호랑이 선생님'이라 불렀다. 내가 살던 동네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황 선생님한테 배웠다.


선생님은 연습을 소홀히 하거나 손 모양이 바르지 않으면,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손등을 내리쳤다. 연습 시간마다 실수할까 봐 늘 긴장했다. 함께 피아노를 배우던 언니는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고, 어리광을 피우던 동생은 매일 피아노를 치러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나는 그만두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 아니면 피아노를 좋아했는지 계속 전공의 길을 걸었다.     


나의 10대와 20대를 함께 한 두 번째 선생님 B는 단아한 인상에 자그마한 얼굴과 키, 끝이 살짝 올라간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선생님을 엄마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주소를 들고 처음 찾아간 선생님 댁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철 대문이 있는 아담한 개인 주택이었다. 작은 거실은 소박한 가구와 낡은 피아노 책들로 가득했다. 선생님은 피아노 앞에 앉게 하더니 눈을 감으라고 했다. 여러 개의 음과 화음을 이어 누르며 음 이름과 화성을 맞춰보게 했다. 절대음감을 가진 나는 첫 번째 관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이어진 테크닉 테스트에서도 몇 가지 음계를 빠르게 연주한 후,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다음 시간 공부할 곡과 레슨 시간을 정해주었다.     


열정적인 선생님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콩쿠르에 참여하도록 계속 독려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선생님의 분노를 사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콩쿠르 예선 첫째 날, 나는 지나친 긴장 탓에 배가 계속 아프고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무대에 올라가면 제대로 연주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나중에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하면 될 거라고 혼자 생각하며 콩쿠르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때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선생님은 내가 언제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참가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다.


 "앞으로 콩쿠르 이야기는 다시 안 할 거야!"

미리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 말주변도 없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변명이나 사과도 하지 못한 채, 선생님의 싸늘한 시선을 견뎠다. 늘 다정한 미소를 띠던 선생님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변해버린 시간은 나에게 괴롭고 힘겨웠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선생님의 화는 졸업을 앞둔 4학년에야 조금씩 누그러졌다. 선생님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라고 말하며 다시 콩쿠르 이야기를 꺼냈다. 열심히 연습해 참가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오랜만에 활짝 웃는 선생님을 마주하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나의 선생님, C는 미국 유학 시절 만난, 유명한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사십 대 후반의 미국 피아니스트였다.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는 겸손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덕분에 피아노 선생님은 늘 어렵고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은은한 노란빛 조명과 부드러운 나무 바닥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그의 방에서 피아노를 치는 시간은 건반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니? 어느 소절까지 한 호흡으로 노래를 해야 할까?”


선생님은 늘 내 의견을 물어보고 존중하며, 내가 원하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졸업을 1년 앞둔 학교 협주곡 오디션에서, 선생님의 반주로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연주였다.


두 대의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선생님과 눈빛과 호흡을 주고받는다. 나직한 목소리가 음악 속에서 들려온다. “혜경아, 노래해!”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포근히 감싸며 때로는 따뜻한 햇볕 속으로, 때로는 차가운 겨울바람 속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마지막 무대인 B선생님의 연주가 끝났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에 내 마음이 따뜻한 음악으로 가득 찬다. 모든 것이 더뎠던 나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는 것을….


하얀 건반 위에 내 삶의 순간들이 놓이고, 추억은 반올림되어 검은건반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들을 음악 속에 채워가며, 오늘도 나는 멋진 하루를 호흡하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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