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 속에서 따뜻하게 떠오르는 한 장소가 있다. 미시간의 이스트랜싱, 애보트 로드 102번지.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담쟁이넝쿨이 무성하게 자란 붉은 벽돌 건물, 커튼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노란 방. 그 방에는 Mr. V가 산다.
이른 아침이면, 모서리가 낡아 너덜너덜해진 소가죽 가방을 자전거 뒷좌석에 묶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페달을 밟아 교정을 가로지르는 Mr. V를 만난다.
그가 방에 들어서면, 은은한 조명 아래 노란 등이 켜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꾹 다문 입술, 날카로운 콧날, 무표정한 얼굴이 차가운 인상을 주는 Mr. V와의 인연은 이전 선생님이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화려한 연주 경력으로 명성을 쌓은 그에게 배워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노란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선생님과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이, 하이 궝! 반가워요."
내 영문 이름의 발음이 미국인에게는 낯설고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가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하는 모습이 왠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피아노 선생님이 어렵고 무서운 존재라는 내 생각을 바꿔준 사람은 Mr. V였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만큼이나 바쁜 연주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한 번도 레슨을 미루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 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고 꾸준히 연습하는 그의 성실함은 나를 감동시켰다.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노란 방에서 두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보내는 수업 시간은 선생님과 나 사이의 아름답고 친밀한 대화였다.
그는 나에게 특정한 소리를 내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수업 중 가장 자주 ‘노래하다(sing)’, ‘듣다(listen)’, 그리고 ‘호흡하다(breathe)’라는 말을 반복하곤 했다. 화려한 연주 기교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 부분에서는 네가 어떤 감정을 담고 싶은지 생각해 보렴. 그리고 어느 소절까지 한 호흡으로 노래해야 할까?”
늘 기계적으로 곡을 연습하는 데 익숙했던 내게는 다소 낯선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내가 스스로 해답을 찾고, 내 마음을 음표에 담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한 말로 그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며, 연주를 통해 직접 소리를 들려주고, 때로는 깊이 있는 눈빛과 미세한 표정으로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섬세하고 다채로운 음색은 마치 끝없는 음악의 세계로 나를 이끄는 길잡이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연주를 따라 다양한 장소와 감정의 풍경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빚어진 음악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자, 내 안의 감각을 일깨우는 생명력이었다.
음악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음악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그가 내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건반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건반을 통해 들려오는 내 마음의 소리이자 누군가의 삶이 깃든 나만의 노래였다.
그 마음이 빚어낸 노래는 일상의 경험을 소리로 옮기며 삶을 돌아보고 되새기면서, 한 음 한 음을 각자에게 의미 있는 음악으로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음악에 스며든 삶이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며, 나는 오늘도 노란 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은발의 노 신사가 된 Mr. V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기억 속의 노란 방에서 그는 내게 말을 건넨다.
“너의 가장 좋은 선생님이 누구인지 아니?, 바로 너 자신이야”.
그곳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 속의 노란 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