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내음 May 09. 2022

그곳에는 Mr.V가 살고 있다.

음표에 마음을 싣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련함 속에 따스하게 피어오르는 공간이 있다. 사방에 넓은 잔디가 깔려 있고,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나지막한 이층 벽돌 건물,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반짝이는 노란 방에는 Mr. V가 살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모서리가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소가죽 가방을 자전거 뒷좌석에 묶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교정을 가로지르는 Mr. V를 마주칠 수 있다. 그가 방에 들어서면 노란 등이 켜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진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꾹 다문 입술, 날카로운 콧날과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은 차가운 인상을 주는 Mr.V 와의 인연은, 먼저 배우던 선생님이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국제 콩쿠르 입상과 연주경력으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피아니스트인 Mr. Votapek에게 한번 배워보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던 나는, 용기를 내어서 조심스럽게 노란 방의 문을 노크했다.   

    

”선생님과 공부하고 싶은데요. “

“하이, 하이 궝! 반가워요”


내 영문 이름 스펠링의 발음이 미국인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웠나 보다.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하는 그의 입모양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피아노 선생님은 늘 어렵고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을 지워준 것은 Mr. V를 만나고부터였다.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노란 방에서, 두 대의 피아노 건반 앞에 나란히 앉아 레슨을 받는 한 시간은 선생님과 나와의 아름답고 친밀한 대화였다.   

   

그가 레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노래하다(sing)’와 ‘듣다(listen)’, ‘호흡하다(breathe)’였다. 화려하게 표현하는 연주 실력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귀 기울여 듣는 것을 강조했다.  

     

“이 부분에서는 너는 어떤 마음을 표현하고 싶니? 어느 소절까지 한 호흡으로 노래해야 할까?”      


늘 기계적으로 곡을 연습하는 습관에 익숙하던 내게는 좀 낯설고 생소한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많은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너의 가장 좋은 선생님은 누구인지 아니? 바로 너 자신이야.”


그가 내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건반의 소리가 아니고 건반을 통해서 들려오는 내 마음의 소리이고 내 마음의 노래였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악보를 들추며, 학생을 가르치며,  글을 쓰며 오늘도 나는 노란 방에서  Mr. V를 만난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그가 아직도 아름다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듯하다.

 

'하이 궝! 삶을 더 아름답게 노래하고 호흡해봐. 너 만의 이야기에 집중해봐.'


그가 내게 말을 건넨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노란 방이다.      

작가의 이전글 리스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