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멈춘 순간
세차게 내린 비로 세상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창유리에 알알이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며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며칠째 집에 웅크리고 있던 나는 노트북을 가방 속에 챙긴다. 대개는 펼쳐보지도 못한 채 가방 속에 넣고 돌아오곤 했지만, 오늘만은 짧은 글 한 편이라도 완성하리라 다짐하며 북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빗방울이 씻어놓은 푸른 하늘에 초록 이파리가 팔랑팔랑 바람결에 몸을 흔든다. 노트북을 펼치자 하얀 여백 위에 검은 커서가 깜박거리며, 마치 손짓이라도 하듯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재촉한다.
디딩, 딩, 디딩, 딩—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리듬에 맞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더 잘 써야 할 텐데, 그래서 결론은 뭐라고 쓰나.’ 떠오른 무수한 생각과 글자들이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흩어진다. 지웠다 다시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몇 시간째 제자리걸음이다. 바로 그때, ‘파솔파솔파솔파솔’—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의 파편들이 귓바퀴 속에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섬세하고 가느다란 음의 조각들은 때때로 크게, 때로는 작게 끊어질 듯 이어지며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온다.
대학교 2학년 무렵, 정기 오디션을 준비하며 열심히 피아노 연습에 매달렸다. 리스트(F. Liszt)의 초절기교 연습곡 5번, ‘도깨비불’이 지정곡이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며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처럼 복잡한 음표로 가득 차 있어 까다롭기로 유명한 곡이었다.
오디션 당일 아침, 지도교수 앞에서 리허설을 했다. “그래, 이대로만 치면 돼”라며 교수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평을 해주셨지만, 조금 삐거덕대며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디션까지 네다섯 시간이 남아있었다. ‘더 연습해서 완벽하게 잘 쳐야지’라고 다짐하며, 강의도 빠지고 점심도 거른 채 연습실에 들어가 한 마디의 모티프, ‘파솔 파솔 파솔 파솔’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오디션이 시작되자, 도깨비 불꽃이 아른아른 춤추듯 섬세하고 여린 주제가 점점 커지며 정열적인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잘 쳐야 할 텐데, 틀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커지며 조급해지자 팔에 힘이 들어가고 손끝이 둔해졌다. 가볍게 팔랑거리며 날아야 할 음표들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몇 시간을 매달리며 연습했던 ‘파손 파손‘ 모티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땡!” 심사위원의 종소리가 울렸고, 그렇게 열심히 연습한 곡을 끝까지 연주하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손가락이 멈췄던 순간, 모든 세상의 소리가 함께 멈춘 듯했다.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온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쉬지 않고 계속된 무리한 연습이 손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한 음도 빠지지 않고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화려한 기교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연주를 멈추게 했다.
피아노 연주와 글 쓰는 일은 닮은 점이 많다.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점, 혼자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해도 한 줄의 문장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더 잘 쓰고 싶은데. 오늘 글을 완성해야 하는데, 완벽한 표현은 없을까.’ 다양한 생각들이 도깨비불처럼 떠다닌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힘을 주고 움켜잡으려 해도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생각들이 ‘좀 형편없으면 어때. 오늘 다 못 써도 괜찮아.’하며 힘을 내려놓고 조바심을 버리니 생각들은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기 시작한다.
멈췄던 자판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낯익은 음이 들려온다. ‘파솔파솔파솔파솔….’ 도깨비불이 춤춘다. 때로는 느리고 부드럽게, 때로는 빠르고 경쾌하게… 가라앉아있던 도깨비불이 가볍게 아른아른 날아오르며 기억 저편에서 멈춰있던 멜로디가 이어진다. ‘아 오늘은 글을 쓸 것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 적막한 틈새에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뻗는다. 글을 맛있게 하려면 리듬을 타야 한다. 바깥으로 달아나려는 마음을 가라앉혀 곡진한 사연을 우려낸다. 시끌시끌한 카페의 한구석에서 내 안의 박힌 장면 하나를 떠올리고 가만히 응시한다. 반복적인 멜로디처럼 그날이 그날 같았던 시간이 일상의 리듬을 타고 날아오른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도깨비불이 순연한 물맛처럼 느껴지기까지, 그 틈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자판 위를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을 잡아 문장을 이어간다.
‘때로는 견뎌야 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처럼 나는 어린아이처럼 고백을 쏟아놓는다. ‘집중해 봐. 너의 음악을 들어야 해.’라며 강요하지 않고 치받쳐 오르는 생각들을 연주한다. 자판 위를 춤추듯 노래하듯이 달린다. 억새밭을 스치는 바람 같기도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코끼리 엉덩이처럼 씰룩대기도 한다. 신명이 난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도깨비불처럼 뛰어다닌다. 나를 두드리고 만물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렇게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다.
카페에는 어느새 창문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글을 마무리하고 카페를 나서니,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온통 ‘파솔파솔파솔파솔’—가볍고 경쾌하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도 아늘아늘 춤추듯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