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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Aug 15. 2020

안단테 칸타빌레

무릎 수술이 나에게 준 선물

     

"솔내음 씨, 들어오세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진찰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가 있네요. 반월상 연골판에 손상을 입으셔서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MRI 사진을 보면서 하는 의사의 얘기를 듣는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공원에 운동하러 나갔었던 화창했던 오월의 저녁이었다. 공원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며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공놀이하는 어린이들로 왁자지껄 붐볐다. 공원을 싸고 있는 산책코스를 몇 바퀴 걷다가, 머리를 휘날리며 멋지게 달리는 사람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뛰는 것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그날따라 가벼운 컨디션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마라톤 선수처럼 멈추지 않고 달렸다.    


다음날 아침, 다리에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더 아팠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뼈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인대가 늘어나서 몇 주 치료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물리치료를 시작 한지 세 달이 흘렀지만, 무언가 나아지는 느낌이 없고 계속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무언가 뻐근한 느낌이 예사롭지는 않았었다.    


수술은 갈등과 고민 끝에 가깝고 분위기가 편해서 왠지 마음이 더 끌린 동네의 전문 개인병원에서 받기로 정했다. 겁이 많은 나지만 간단한 수술이라 ‘수술’이 아닌 ‘시술’이라고도 불린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힘입어서 담담한 마음으로 수술 날을 기다렸다.     


수술 날, 차가운 금속으로 된 이동 침대에 누운 순간부터 나의 담담함은 무너져버렸다. 옆에 있는 딸한테 걱정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한 얘기가 창피하게, 어린아이처럼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회사에 갔다가 조퇴하고 빨리 온다고 하더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섭섭함까지 겹쳤다. 눈물이 나면 계속 울음이 나오는 나인지라, 수술실로 이동하는 내내 계속 눈물이 나서. 감추는 것은 포기하고 손수건으로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침대에 누운 남자 환자는 보호자 없이 혼자 수술실로 가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 수술하세요?”.

“무릎이요. 어디 하세요?”

“ 허리 디스크 수술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린다고 하나요?”.

“삼사십 분이라고 들었어요. 허리는요?”    

“두세 시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두 침대가 간신히 들어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머리를 나란히 맞대고 누워서 하는 대화가 서글픈 코미디 같이 느껴졌다.  몇 마디 대화를 하다 보니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자꾸 잠이 오는데 간호사가 계속 나를 깨운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데 다리의 묵직함이 느껴진다. 12시간은 척추마취 때문에 머리를 들지 말라고 한다.

베개도 베지 못하고 누운 채 소변도 받아야 하는 12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통으로 다가왔다.  


벌써 몇 년 전 인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긍정적이시고 일상 속에서 유머 감각이 풍부하셨던 아버지는 투병 중에서도 재치 넘치는 유머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드셨다.


"얘, 내가 동양화 그린 것 보여줄까?"


입원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특유의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물으셨다.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서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환자복 소매를 걷으며 불쑥 팔을 내밀어 보이셨다. 많은 주사와 피검사로 멍든 아버지의 팔은 울긋불긋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힘들어지실수록 말씀보다는 손을 내밀거나 머리를 다정하게 톡 치시곤 하셨다. 손을 잡아 드리면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지의 인자한 옆모습이 떠올랐다.


병원 침대에 누워 나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가 열 마디 말 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줄 이제야 깨달았다.


‘좀 더 자주 안아드릴걸, 좀 더 자주 손잡아 드릴걸….’    


퇴원하는 날, 병원을 나서며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청명하였다.  아기가 첫걸음마 하듯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보았다. 날카롭던 통증이 없어진 것이 신기했다.  서서히 몇 발자국을 더 걸어보았다.  


Andante, Andante...  

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뻑뻑하던 다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듯하다 

Andante Cantabile...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악을 가르치며, 악보에 표시된 쉼표, 악상기호 등의 표현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학생들을 나무라곤 했는데, 내 삶의 모습은 어땠을까….    

지하철 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답답해하며  앞질러 가던 내 모습….

불면증, 우울증 등 여러 가지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말을 그저 가볍게 흘려 들었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도 떠올랐다.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여유 없이 Allegro의 속도로 빠르게 달려왔던 내 몸과 마음에 Andante cantabile의 여유를 찾게 해 준 이 순간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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