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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Feb 26. 2022

리스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낯선 도시, 낯익은 얼굴

      

‘무얼 입을까. 무얼 가져갈까’


큰 가방을 펼치고 마음이 한껏 부푼다. 게다가 나를 더 설레게 한 것은 난생처음 떠나는 세 자매 여행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롯이 자매들만 어디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리스본에서 학회가 열리는데 같이 갈 수 있냐는 언니의 제안에, 무조건 떠나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잡아당겼다. 아줄레주라고 불리는 푸른빛의 타일, 노란 트램, 그리고 의문의 여인과 책의 저자를 찾아 무작정 야간열차에 몸을 싣게 되는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배경 도시인 ‘리스본’은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도시였다.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던 세 자매는 목적지인 리스본까지 직항이 없던 터라,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을 접선 장소로 정했다.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니 수많은 나라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얼굴로 목적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공항 근처의 호텔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이, 언니들!”

“어머, 잘 찾아왔네!”     


이미 도착해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의 밝고 낭랑한 목소리가 오페라의 서곡처럼 귓가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인생이 한 곡의 오페라라면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여 만들어가는 새로운 여행에서는 어떤 막, 어떤 음악이 연주될까.  

   

다음 날 도착한 늦은 오후의 리스본 공항에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미리 예약해둔 유람선 관광을 위해 태주 강(Rio Tajo)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관통하여 대서양으로 유유하게 흐르는 태주 강에는 주홍색 노을이 보라색 강물 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뱃머리에 앉아 본 해 질 녘의 강변은 신비로울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유람선 투어를 마친 그 시각, 거리에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숙소를 찾아갈 일이 아득하게 여겨졌다. 로밍해온 폰으로 우버를 부르려 했으나 데이터 통신상 문제로 연결이 되지 않아 점점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앳된 얼굴의 소녀들이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며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 어디에서 왔냐, 리스본은 처음이냐, 여기가 통신이 잘 되지 않는 곳이다는 둥  많은 질문을 쏟아내며 우리의 혼을 쏙 빼놓았다.


“어머나,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동생이 가느다란 소리를 질렀다. 여권과 현금을 가지고 있던 자기의 백 속으로 어떤 손이 들어가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말로만 듣던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 집시들이었다. 평화로운 태주 강이 흐르던 리스본은 그렇게 두 얼굴을 보여주는 도시로 첫인사를 건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렵게 찾아간 숙소는 상상했던 분위기와 많이 달랐다.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 골목은 지나가는 행인도 없이 스산했고, 아파트형 호텔이라 이름 붙여진 숙소는 낡고 초라해 보였다.     

      

쇠창살로 된 아파트의 문 번호판을 누르니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불안한 마음을 서로의 몸에 기대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온통 하얗게 칠해진 실내는 썰렁해서 4월의 봄 날씨에도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으악 저 창문을 봐봐. 밖에 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집시들에게 한번 당한 터라 더욱 겁이 난 동생이 소리쳤다. 커튼이 처진 창문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가 어른어른 보였다.      

 

'처음 예약한 호텔로 놔뒀어야 하는데 왜 바꿨냐. 지금 와서 어떻게 하냐' 등 투닥투닥 수많은 말들이 오가다가 결국 내일 다른 호텔로 방을 옮기자는 결론으로 소동이 잦아들었다.


같은 유전자와 환경에서 자란  자매라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있을까. 외모, 성격, 전공, 잠자는 모습까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했다.   여정의 피곤한 몸을 낯선 침대 위에 누였다. 얕게 코를 고는 이중창의 소리가 자장가 선율처럼 귀에 아른아른하다가 나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동네의 풍경은 너무도 달라 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듯 으스스했던 맞은편 건물의 베란다에는 알록달록한 꽃들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달콤한 빵과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버스를 타고 도시의 중심인 호시우 광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 주변에 앉거나 서성이며 북적대고 있었다. 여러 차례 지진과 화재의 시련 속에도 잘 복원해 놓은 비극의 성 도밍고 성당, 그리움과 한이 묻어나는 파두 음악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한 골목길을 언니 동생과 함께 오르내리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영화나 소설 속 공간 속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호시우 광장 페드로 4세 동상 앞
낡은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 빨래들, 골목마다 소박한 삶의 흔적이 보인다.

     

숙소 근처에 있는 어느 식당에 갔을 때다. 졸깃졸깃하며 부드러운 문어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요리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더니 활짝 웃으며 감자요리를 서비스로 주었다. 여유로움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친절함까지 보태져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리스본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의 만남은  특별했다. 난생처음 만난 풍경 속에서, 난생처음  자매가 함께  여행은 한동안 잃어버렸던 빛바랜 유년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난  해맑고 정답고 아늑했다.


아침이면 ‘무얼 입을까 무얼 먹을까’ 한바탕 시끌벅적하고, 옷을 같이 입어서  벌의 옷으로 세벌의 효과까지 얻은 것은 자매라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가방을 꾸리며 뒤돌아본다.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이제 다시 각자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다. 먼저 리스본을 떠난 동생이 남기고 간 여러 흔적들을 보며 벌써 그리움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에휴, 이것도 놓고 갔네”

“그러니까 말이야, 언제 철이 들까”    

 

문득, 이 순간의 풍경이 꿈같이 아련하게 느껴지고 , 언젠가는 무척 그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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