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모임에 초대되었다. 대략 30대후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의 예닐곱 커플이 모인 가족 모임이었다. 그 날의 호스트였던 50대 초반의 안주인은 집에서 손수 만든 감자탕과 반찬들을 식탁에 내어놓았다. 처음 초대 받은 우리 부부는 당연히 부부가 나란히 옆자리에 앉는 것인줄 알았는데 어째 이 모임은 남녀 내외를 하며 남자끼리 여자끼리 앉는 분위기였다. 여러 자리 중 황급히 내가 앉을만한 적당한 곳을 훑은 뒤 가장 말석에 앉았다. 자연스레 옆자리에 계신 여자들분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음식이 나오고 다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밥 한술을 뜨려는데 갑자기 아이가 놀다가 와서 칭얼대기 시작했다. 들었던 숟가락을 놓고 아이와 잠시 거실에서 놀아주어야 했다. 다른 분들의 식사가 무르익어 가고 남편은 대충 식사를 마치고 나와 교대했다. 그리고 나도 자리로 돌아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허기도 지고 언제 아이가 다시 칭얼댈지 모르니 빨리 먹어야했다. 다른 이들은 거의 식사를 마쳐갈 무렵에서야 나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차려준 밥"이다. 결혼 후 더욱 절실해진 "남이 차려준 밥"은 꿀맛이었다. 한참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제일 맛있는 반찬 두 개가 휙 사라졌다. 집으려고 젓가락을 찌르던 찰나에 휙 낚아채진 반찬. 엥? 반찬아,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 반찬은 다름아닌 남자들의 식탁으로 갔다. 입에 밥을 잔뜩 넣고 우물우물 씹던 나는 순간 나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말초적인 욕구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 밥 먹을땐 개도 안 건드리는건데 심지어 개도 아닌 나, 사람이 밥을 먹는데 내 밥 그릇을 뺏어가는 자라니. 저 남자들 입만 입이고 나는 입도 아니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초면에 식탐만 가득한 맘충이로 보일까봐 꾹 입을 다문채 그냥 남은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날 모임의 주제와 대화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먹고 있던 반찬을 빼앗긴 그 순간만 머릿 속에 맴맴 돌고 있었다. 내 반찬을 낚아채 간 사람은 50대 초반 정도의 어떤 여자분이셨다. 나보다는 한참 나이가 있으신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여성이었다. 그 자리에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아이 때문에 제 때 밥을 먹지 못하고 뒤늦게서야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분도 그랬다. 호스트는 나에게 천천히 많이 먹으라며 제일 말석에 앉은 나를 챙겨주고 계셨고 내 반찬을 낚아채 간 여성은 자신의 남편을 포함한 미처 끝나지 않은 남자들의 식탁 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나에게 무얼 한거지? 순간 '여자의 적은 여자였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렸을 때 남자들은 거실에 둘러 앉아 화기애애 담소를 나누다가 부엌에서 여자들이 예쁘게 차려준 상을 받아 밥을 먹었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한 귀퉁이에 앉아 남은 국과 반찬을 대충 담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다가 남자들이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 여자들은 자신들은 못먹어도 남자들 밥상으로는 내어가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잔반 처리반이 되었다. 고생한 여자들을 챙겨주는 남자는 없었다. 고생한 여자들을 챙겨주는 여자도 없었다.
그 날 집에 돌아온 후 내 머릿속에선 한참동안 그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지키지 못한 내 반찬, 나도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