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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Mar 03. 2023

40대 중반 남성의 구직

사람, 직업, 그리고 소통

 한국에서 40대 중반의 남성은 여러 가지를 떠나보내고 맞이해야 한다. 40대에 들어서며 그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는 ‘부고’ 소식이었다. 어릴 때는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모님 졸랑졸랑 따라가서 멀뚱멀뚱 있다가 하는둥 마는둥 한 인사로 상주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그 와중에 맛있다며 육개장 한 그릇 하고 오는게 전부였다. 아무 감정 이입이 될 이유도, 될 수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40대가 되니 유독 누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뜨끔하며 생각해본다. 내 아버지, 어머니도 멀지 않았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오는 건 순서가 있어도 가는데는 순서가 없다…는 말과 함께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며, 그 부고들을 쉬이 지나치기기가 어려워진다. 생과 사의 순간을 거친 끝에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게 사람이라지만, 엄마 배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이미 그는 죽음을 향해 스타트한 것이다. 그리고, 노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들 한다. 1살이 2살 되는 것도, 9살이 10살 되는 것도, 19살이 20살이 되는 것도 성장해간다고 표현될 뿐만 아니라, 이미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고 하는 70대 어른들에게만 ‘늙는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나이에서 뭔가를 떠나보내고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딱 내가 처한 40대 중반이 가지는 사회적 상징성으로서의 직업과 일과 관련된 특수성이 더욱 그렇다. MZ세대에 관한 에피소드와 다양한 철학(?)들이 쏟아져나오지만, 아직은 그들 세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내가 적는 40대인 나의 직업에 대한 고민은 내 어릴 적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살던 시대를 내가 지금 살고 있구나 정도의 멀고 먼, 전혀 상관 없는 말로 흘러갈 수 있겠다.  


 먼 나라에서 나는 직장을 구하고 있다. 한국의 20대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만은 해외에서 40대 남성이 얼마나 서럽게 사는지는 몸소 체험하고 있다. 영어를 못 하는 편이 아니라고 자부하는 수준 밖에 안 되서인지 이곳에서의 모든 구직의 처음과 끝은 영어다. 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를 잘 한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한국어 native speaker인 것처럼, 나는 이곳에서 영어 원어민도 아닐 뿐만 아니라, 원어민 거지도 아니다. 어쩌면 거지가 쓰는 영어만큼도 못 한 랭귀지 실력으로 거지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부단히 달려가는 중이라는 것이 은연 중에 떠오르는 현재 나의 구직 상태에 대한 심상이다. 비전을 떠올리고, 누군가를 돕고 살고, 주변 사람과 어울리며 사는… 뭐랄까… 투명한 생수병에 담긴 시원한 물과 같은 삶(이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다ㅎㅎ)이 내가 염원하던 하루였다. 주식이나 부동산에는 관심 없고, 높은 직위에 올라가는 것도, 연봉 인상에 힘쓰는 것도 나의 관심사 밖인채로 살아왔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필요한만큼 하루하루 오순도순 사는게 나의 로망이랄까. 어쩌면 딱 지금 사는게 그정도의 삶인 듯 하다. 하나만 빼고. 직업.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일단 어떻게든 정착만 한다면 그 후에는 직업에 상관없이 생활은!! 가능하다. 한국을 예로 들면,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날라도, 매일 누군가의 집을 청소해주러 다녀도, 동네 전파상에서 동네 사람들 전기만 봐주면서도 먹고살만큼은 된다. 나라 특성상, 가정마다 두 대 이상의 차는 거의 필수이기에 차의 종류나 대수로는 그 집의 가정형편을 쉬이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어떤 직업이든 귀천이 없고, 내가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든 이상한 시선을 주지도 않고,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러면, 내가 고민하는 40대 중반의 구직은 무슨 뜻인가?


 앞서 언급한 영어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떤 직업이든 생활이 가능하다고 해놓고… 말 바꾸는게 아니다. 사람이란게 참 간사하다.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이것이 반드시 만족하기 어려운 사람의 성질을 설명하는데만 유용한 비유는 아니다. 누구나 각자가 지닌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이 부분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 선택을 할 때 수많은 변수로 고민하게 한다. 앞서 글들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기저 질환을 앓고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정신과 별개로 몸이 견디지 못 한 상황이 되면 정신이 무너진다. 단순히 절망이나 포기의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졸도해버린다. 기절이 맞는지, 졸도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몇 분간 blackout을 경험한다. 30년 넘게 특정 순간에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주저하게 된다. 이걸 해도 될까? 내 몸이 버텨낼까? 주변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고려해야 할 사항이 급격하게 불어난다. 이곳에서 생계를 위해 박스도 날라봤고, 청소도 했고, 잔디도 깍았고, 페인트도 칠했고, 카페트 까는 일도 했고, 창고에서도 일을 해봤다. 그때는 일시적으로 하는 일들이라는 명목으로 내가 꿈꾸는 시원한 생수 같은 삶을 잠시 유보시키며 견뎌냈다. 몸이 딱 버틸 정도의 시간만 하며 그 시간들을 버텨냈다. 그 시기들을 지나고 나니 드디어 이 질문이 나를 찾아온다.


그럼 이제는 뭘 하지? 40대 중반인데…


 선택지는 많다. 페인터를 할 수도 있고, 학교를 다시 들어가서 전기기사나 사회복지사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목수나 정비공을 준비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선택지들을 놓고 이런 저런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다시 이 질문에 맞닥뜨린다.


근데 이걸 할 수 있을까?


 의지박약이나 게으름의 문제라면 낫겠다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니까. 정말 의지가 없고, 게으르면 그 태도의 심각성과 향후 일어날 일을 전혀 가늠하지 못 한 상태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다. 의지가 있고, 부지런한 편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조언과 선택지들을 던져준다. 좋은 정보에 감사하지만, 그 정보를 갖고 나는 또 씨름한다. 몸이 버텨낼까? 공황이 오면 어떡하지?


 예능이나 팟캐스트를 보면 노력과 성실, 책임감, 열정, 의지 등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다. 동기부여가 되는 반면, 속으로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따지는게 아니라, 정말 물어보고 싶고, 간절하게 도움을 받고 싶다. 환경을 탓하고 싶지도 않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흔한 표현대로 ‘몸이 안 따라주는’ 경우, 도대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단순 노화나 건강관리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뭔가를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에 뒤따르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라는 이야기들도 있다. 내 입장에서 반대로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다가 어느 정도 레벨업이 되면, 대부분 당장은 할 수 없는, 하지만 해내야 하는 일들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민을 어찌할까 말이다.


 언젠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시원한 생수 한 잔 마시는 마음으로 이 글에 대한 답글을 써보고 싶다.

 

2020303 18:17


*사진 : 지금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 눈앞에 보이는 집 앞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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