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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담 일지] 2회 차

"잘 견뎠어."

by 우주먼지

[소개] 2017년부터 7년 동안 심리 상담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불안하고,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져 상담을 중단하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물 치료와 짧은 면담을 1년 동안 병행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답답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선생님과 새롭게 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에는 이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풀리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상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려 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어떤 이야기로 시작할까요? 혹시 지난 상담 이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나요?

(나) 지난주에 상담받고 나서, 선생님께서 토플 점수와 좋은 회사가 들어간 것에 대해 놀라면서, 잘한다고 이야기한 점이 찝찝했어요. 불편했어요.

(선생님) 아 정말요? 그게 왜요?

(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OO 씨한테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 먼저, 아빠는 딸 바보예요. "예쁘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딸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쁘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서 다들 아빠가 딸 보는 눈빛이 너무 다르다고 하세요. 저야 매일 보는 눈빛이니 잘 모르겠지만요. 아빠는 정신이 정말 건강하신 분이세요. 감정기복이 없으시고, 아빠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내려놓는 것도 잘하세요. 요즘 말하는 T 같은 분이신데, 저는 그런 아빠가 편했던 것 같아요. 요즘에도 일하다가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요. 아빠는 저의 고민 자체를 이해 못 하실 정도로 사소한 걱정, 쓸데없는 고민을 이해 못 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제가 얘기하면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보면 저는 웃음이 터져요. '아, 아빠가 이해 못 할 정도로 사소한 문제구나. 그럼 신경 안 써도 되겠다.' 하면서요. 아빠랑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7살 때 아빠랑 백화점에 세일러문 가방 사러 갔을 때였어요. 당시 저는 세일러문 백팩이랑 크로스백이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하나만 골라야 하니 백팩을 사서 돌아갔는데, 제가 일주일 내내 침울한 표정이었는지 바로 다음 주말에 가서 크로스백도 사주셨어요. 그만큼 아빠는 제가 원하는 거 해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다만, 오빠에게는 유독 냉정하고 (전형적인 옛날 사람의 모습으로) 첫째와 아들의 역할을 기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빠와는 마찰이 있는 편이었고, 그걸 보는 엄마는 왜 저만 예뻐하고, 오빠한테만 뭐라고 하냐고 하면서 아빠와 종종 싸우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되려 엄마에게는 역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이 아빠는 저의 편이, 엄마는 오빠의 편이 된 거죠.


(선생님) 그럼,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 음,, 엄마 얘기하려면 복잡해요. 최근에는 또 많이 성격이 달라지셔서 언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걱정이 많은 편이시고, 화낼 때는 불같이 화를 내셨어요. 그리고 가족한테 헌신하셨어요. 세세하게 매일 아침 날씨를 카톡으로 알려주실 정도로 저희에게 올인하셨던 분 같아요. 요즘에는 또 그렇게 까지는 안 하시지만요. 그런데 이전의 엄마는, 제가 힘든 얘기를 하면 아빠보다 공감은 많이 해주셨는데, 그걸 엄마가 온전히 다 받으셔서 나중에는 몸이 아파지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 이야기를 하려면, 엄마의 컨디션이 괜찮은지, 이 얘기를 해도 엄마 컨디션이 나빠지지는 않을지 그런 고민을 하고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엄마가 최근에는 제가 이렇게 마음이 힘든 이유가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성당에서 심리 교육도 받으시고 달라지려고 노력하셨어요. 실제로 달라졌다고 느끼고요.


제가 답답한 게 이 부분이에요. 저는 사실 꽤나 오랫동안 (이전 상담의 주된 내용은 엄마였을 정도로) 엄마 때문에 제가 불안함을 잘 느끼고, 마음이 힘든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지난 상담 6년 이상 받으면서 엄마의 주제는 얘기를 많이 해왔고, 엄마한테 사과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최근에 엄마가 심리 교육을 받고 나서부터는 저한테 먼저 사과도 하시고, 저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푼 것도 많아요. 그런데, 이렇게 엄마랑 괜찮아졌는데도 여전히 제 마음이 힘드니까 더 절망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상담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기도 해요. 불안함의 대상과 주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불안하고 울컥하는 모습은 똑같으니까요.


(선생님) 언제부터 불안하고, 울컥하고 마음이 힘들었던 것 같나요?

(나)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느 고등학생처럼 입시 때문에 힘들었고, 입시가 아닌 다른 대상이나 주제로 힘들었던 건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인 것 같아요. 그때는 큰 주제가 외모였던 것 같아요. 피부에 트러블이 하나만 나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뒤집어져서 울고, 피부과로 달려가고 그랬어요.


(선생님) 그럼, 고등학교 이전에는요?

(나) 초등학교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행복했던 적이 있어요. 외모 신경 안 쓰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4학년 때 라면도 5개나 먹었어요. 학습지 답지 보고 빨리 풀고 엄마 퇴근 전까지 예능 보는 게 저의 행복이었고, 그거 하면서도 죄책감 하나 없었어요. 그저 신났어요. 그냥 해맑은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힘들었던 기억은, 부모님이 싸우셨을 때였어요. 가끔 엄마가 아빠랑 싸우면 집을 나가셨어요. 물론 몇 시간 만에 돌아오시긴 하셨는데, 그 기억이 엄청 강렬해요. 그리고 저는 엄마랑 아빠랑 싸우면 가운데서 제가 무릎 꿇고 빌었어요.. "제발 싸우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빌게요. 제가 더 잘할게요." 오빠는 공부하러 간다고 방에 들어가 있었고(갈등을 피하는 오빠만의 방법이었을 거예요.) , 아빠는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지금은 아빠가 어떤 말을 했어도 엄마는 더 화냈을 거라 그랬다는 걸 이해하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아빠가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엄마가 진정될 텐데. 왜 그 한마디를 안 하지. 그래서 저는 저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어도 그냥 무작정 빌었어요. 잠시나마 진정되길 바라면서.


가끔은 아빠가 저한테만 너무 잘해주는 걸로도 엄마가 화를 내셨었는데, 그럼 제가 너무 좌불안석이었던 것 같아요. 괜히 제가 있어서, 저한테 잘해주다가 집에 그런 사단이 난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너무 죄송했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에고.. 지금은 그 상황이 어떻게 보이나요? OO 씨의 잘못이 있었나요?

(나) 아니요. 그때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겨요. 전혀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중간에서 빌었으니 그 상황이 진정될 일도 없고.


(선생님) 그때 엄마가 그렇게 싸우면 집이 나갈 것 같고, 피부나 몸무게 때문에 불안해졌던 기억, 그리고 지금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미국에 가면 어떡하지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 여기에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요?

(나)... 음. 떠날 것 같아서 불안한 것 같아요. 엄마가 집을 나가버릴까 봐 무섭고, 피부가 안 좋고 살이 찌면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고 떠날까 봐 두려워요. 미국에 가는 것도 역시 저랑 (물리적으로) 헤어지는 거니까 그게 불안하고요. 그런데 저는 꼭 미국에 가는 것 자체가 아니더라도, 왜 토플 점수가 높다는 이야기나 이메일을 수시로 체크하는 모습만으로도 불안해질까요?

(선생님) 그게 곧, 떠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랑 관련이 있으니까요.

(나) 아..


(선생님) 그리고 아까 OO 씨가 중학교 때 전학을 가면서 친구들이랑 친해지는 방법이, 프린트를 대신해 주고 숙제가 있으면 OO 씨 집을 제공해 주고, 뭔가를 해주는 방법으로 친구들이랑 친해졌다고 했는데 그것도 역시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나) 맞아요. 그때도 제가 그렇게 뭔가를 해주지 않으면 친구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는 너무 답답한 점이, 제가 지난번에 상담을 받으면서도 엄마 아빠가 싸워서 제가 중간에서 빌었던 이야기, 그래서 제가 안타까웠다는 이야기 많이 했는데, 이 얘기를 20년 넘게 계속 또 하는 제 자신이 너무 지겨운 것 같아요.


(선생님) 아직, OO 씨가 그때의 OO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거죠. 아직 덜 돌봐준 거죠. 만약에 여기 앞에 7살의 OO 씨가 있어요. 그럼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어요?

(나) "잘 버텼어"라고..

(선생님) 그때 버티는 마음이었군요.

(나) 제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어요. 그때의 거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서있었는지, 저는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요. 그때 저는 부모님이 소리 지르는 사이에 무릎 꿇고 앉아서 빌었어요.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진정하세요. 아빠, 제발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해줘. 엄마, 아빠가 미안하데. 그러니까 엄마가 진정해. " 7살의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걸 버텼는지.. 잘 버틴 것 같아요.




사실 1회 차 상담 끝난 이후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겨우 진정시켜놓은 내 마음을 다시 상담으로 뒤집어 놓는 것이 두려웠다. 아침에 컨디션도 좋지 않아서, 쏟아 내고 나면 얼마나 진이 빠질지 말하는 게 시작도 전에 귀찮았다. 이전 상담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이 지겹기도 했다. 같은 말을 해서, 비슷한 말로 위로받는 상황은 나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이

'그때의 나를 좀 더 돌봐주라는 말'이 와닿았다. 나라도 같은 말 반복하는 나를 지겨워하지 말아야지..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때 잘 버텼어. 어떻게 버텼니. 지금의 나라면 오히려 못 버텼을 거야. 정말 잘 버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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