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한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장터지만, 있어야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다 아시죠? 가수 조용남의 화개장터 노래가사다. 참 정감있고 향수를 자극한다. 그렇다 시장은 우리의 삶이 반영되어 희로애락이 있는 곳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형슈퍼나 쇼핑몰에 밀려 찬밥신세가 되었지만 재래시장에는 우리가 모르는 숨은 보물이 많다.
대한민국의 재래시장 살리기 답이 없을까
첫 스토리는 일본의 옛수도 교토 옆동네인 시가현(滋賀県),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일본의 최대담수호인 비와호(琵琶湖, 대구광역시 면적75%정도의 규모)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가문을 멸망시키고 쌓아올린 나가하마성이 유명하다.
옛날 이 지역은 이마하마(今浜)로 불렸다. 1456년 이마하마항이 개항하고, 킨키와 호쿠리쿠를 잇는 수륙교통의 중심지였다. 157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영주가 되면서 나가하마(長浜)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이곳에 상공업자와 절을 옮기고 마을을 정비하여 상공업도시로 발전시켰다. 매년 4월에 개최되는 나가하마히키야마마츠리(長浜曳山まつり)는 400년이상 전통 계승하며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도 등록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자동차가 대중화되고, 중심시가지에 있던 두군데 대형상업시설을 시작으로 행정기능과 문화기능을 갖춘 공익시설들의 교외이전이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산업계기능이 저하되고, 중심시가지의 상점가는 빈집이 늘어나며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셔터가 닫힌 건물만 남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약 40년간의 노력으로 지금은 연간 200만명이 방문
37년간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시행착오를 겪으며, 0였던 관광객수가 연간 200만명이 방문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비즈니스 기회가 생겼고, 시민들에게는 동기부여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민간투자가 활발해지면서 130건의 빈집, 빈점포에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부활의 신호탄은 시민들의 힘에서 먼저 나왔다. 나가하마시민들의 상징인 나가하마성 복원에 시민들의 기부가 이어졌다. 총 공사비 10억 3700엔 중 4억 3천만엔이 시민들로부터 나온 금액이였다. 현재 이곳은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뒤를 이어 130년 역사를 가진 은행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제3섹터의 방식(나가하마시와 지역민간기업 8사가 출자, 자본금 1억 3천만엔 중 민간이 9천만엔)으로 1988년 쿠로카베가 탄생했다. 이곳은 “역사성”, “국제성”, “문화예술성”을 컨셉으로 유리공예를 도입했다. 그건 신의 한수였다. 쿠로카베초대대표가 유럽시찰 중, 유리공예가 있는 곳에 여성이 모여들었고, 그 여성들 옆에는 남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문화예술분야에 자긍심이 강한 나가하마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손색이 없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도입했다고 한다. 현재 쿠로카베는 30호점(유리공예, 음식점, 다양한 먹거리 등)까지 생겼고, 점포는 빈집과 빈점포를 개보수하여 옛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일본 최대 유리공예 지역으로 소문나면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사업가들이 이주하면서 활력을 더해 주고 있다.
나가하마의 철학은 단순히 빈 점포를 부활시키고 사람을 부르는 것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문화라는 큰틀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고, 그것을 계속 연결 해나갈수 있는 젊은인재들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조때부터 전승되어 온 문화와 전통을 현대의 생활 속에 침투시켰다. 그 예로 400년 역사가 있는 나가하마히키야 마마츠리(長浜曳山まつり)를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연습과 인재발굴,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의 재생과 지역교류를 위해 나가하마카부키 단체도 만들었다. 2010년에는 마을 전체를 박물관과 같이 매력있고 개성있는 아름다운 거리를 변신시키기 위해 경관조례도 만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나가하마는 옛명성답게 “상업”과 “관광"의 부활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시가지에 거주자가 감소하는 문제도 해결하고자 중심시가지 활성화 기본계획 구역 내 상업, 거주, 커뮤니티에 관한 토탈메니지먼트를 실현하는 조직을 만들어 열심히 활동 중이다. 또한 시대의 흐림에 맞게, 젊은층을 끌어드릴 아이템도 계속 개발하고, 전통시장번영회 조직에 젊은여성리더들이 이사로 진출하면서 남성 중심 구조에서 할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이 일어나면서 봄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스토리는 사이타마현(埼玉県)의 카와고에(川越)다. 이곳은 에도시대, 메이지시대, 타이쇼시대, 쇼와시대를 다 체험할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연간 400만명이 넘게 찾는 전통시장이다.
어떻게? 그 비결은 뭔가?
카와고에는 에도시대때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 긴 역사동안 대화재가 몇번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하지만 1893년 화재는 1/3이 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위기에 처혔다. 에도문화 영향을 받은 카와고에상인들은 불에 타지 않고 소실을 면한 오오자와집(현존하는 중요문화재)과 토장(土蔵, 일본의 전통 건축양식의 하나로 외벽을 흙벽으로 회반죽하여 마무리한 것, 쌀이나 술창고 등으로 많이 사용되고 방화 방습에 강한 구조를 가진다)건축물에서 답을 얻어, 당시 메이지시대 유행하던 벽돌구조 건축물을 선택하지 않고 토장건축물로 재건했다. 그들의 선견지명이 지금의 카와코에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1960년대부터 고도경제성장기에 들어가면서 자동차시대가 찾아오고, 생활양식의 서구화와 중심시가지가 옮겨지면서 번생했던 옛상점가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토장건축물은 마을경관에는 좋았지만, 어둡고 사용하기가 불편하여 조금씩 철거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땅값이 비교적 저렴하고 면적을 효율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아파트식의 고층빌딩이 1970년대부터 들어서고 상가도로확장공사 계획으로 두번째 위기가 닥쳤다. 지역상가와 주민들은 에도시대의 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건축물을 남겨 역사적인 거리를 유지하고자 협의하고, 주민들이 주체가 된 비영리단체 카와고에토장건물 모임을 결성하여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살아남았다. 물론 1975년 카와고에가 전통적 건물군 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다양한 규제를 받게 되었고, 전통건축물의 유지보수, 자신들이 원한는 간판 등 어떤 것도 할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주민들의 반대도 꽤 심했다고 한다.
1983년에 4명의 리더가 중심이 되어 상가주민들의 협의회를 발족했다. 그들은 67개 항목으로 구성된 마을만들기 규칙도 만들었다. 건축물의 리노베이션, 개보수할때 심사기준, 높이, 색상, 디자인 등 전통거리에 맞는 내용이 자세히 담겨져있다. 카와고에를 응원했던 건축가와 도시정비전문가들의 의견을 얻어가며 가게보전 뿐만 아니라 전통거리의 경관보존을 위한 조례도 만들고, 도시정비 디자인활동, 다양한 이벤트개최, 전선 지중화사업, 전국 각지역에 홍보활동 등 할수 있는건 다 했다고 한다. 이런 움직은 상점가 근처 옛은행거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메이지시대부터 쇼와초기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타이쇼낭만위원회를 발족하여 현대식의 아케이드를 철거하고 모던한 이미지로 재탄생되었다. 역에서 빠져나오면 쇼와에서 에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오랜시간동안 주민들의 강한 의지와 노력의 대가는 달콤했다.
그들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최근 도시재생의 키워드로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이다. 카와고에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 올때마다 변신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며 그것때문에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한다. 즉 이것은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다. 전통시장은 사람들이 방문함으로써 성숙한다. 카와고에는 수도권에 위치하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루동안 충분히 즐길수 있는 꺼리가 있기에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것이 건 납득이 간다.
세번째 스토리는 우동의 성지로 불리는 카가와현(香川県)의 타카마츠시(高松市)다. 인구 42만명이 살고 있는 카가와현은 중심지다. 한때(1995년) 하루 3만명이 왕래할 정도로 분주했는데 위기가 닥쳐 9000명까지 떨어졌지만, 발상의 전환으로 2만 5000명이 즐겨찾고, 거주인구도 5명에서 1000명(321채)으로 증가하고, 상가에는 157곳이 입주되어 빈점포율이 제로로 완전히 부활한 곳이 있다. 바로 타카마츠마루가메상점가다.
그들은 어떻게 부활했을까?
타카마츠시는 1588년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가 타카마츠성을 짓고, 성정문앞에 있는 마루가메성하로 상인을 불러모아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1970년대후반터 자동차보급화, 시민들의 요구에 따른 대형쇼핑몰들이 생기면서 상가에 발길이 줄어들게 되었다. 1988년 타카마츠성의 400주년에 맞춰 108일간 축제를 개최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성황리에 끝났다. 이때 500주년을 웃으면 맞을수 있도록, 향후 100년 앞을 내다보는 도시를 조성하자고 청년회를 중심으로 재개발 계획에 돌입했다.
1991년 상가를 A구역에서 G구역까지 7구역으로 나눠, 각 구역마다 개성이 다른 컨셈으로 정비하고, 미츠코시백화점이 붙어 있는 A존은 화려한 유럽거리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친근하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전문점과 도시자연 속에 윤택한 삶을 즐길수 있는 주택까지 넣는 컴팩시티를 추진했다. 상인회 대표인 후루카와상은 타카마츠마루가메상점가를 종합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대형유통업체를 절대 이길수 없다고 판단하여, 모두에게 이익되는 것이 무엇인지 수많은 시간을 드려 건물주, 임차인, 주민, 전문가들과 협의를 거쳐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땅주인 한사람 한사람을 설득시켜 토지를 62년간 무상으로 빌리고, 상가전체를 운영할 회사를 설립했다. 토지를 매입하고 상가를 재건축할려면 2000억원이 필요했는데,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로 비용을 1/3(700억원)로 줄일수 있었다. 둘째, 상가가 되살아나면 상인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낼수 있다고 정부를 설득하여 남은 사업비 700억원을 투자받았다.
드디어 2006년 A지구에 30개 상가가 재건축을 마무리하고 상권이 살아나자 다른 구역도 동참하면서 순식간에 상가 전체가 재생되었다. 건물만 번듯하게 세운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는건 아니기때문에 상인들은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상가전체를 하나의 회사로 운영했다. 상가운영회사에서 상가전체의 업종, 브랜드와 운영자를 지정하고 수익은 1/N로 공평하게 나눈다. 매출이 기대수익에 못미치면 점포운영자를 교체하고 상가의 덩치를 키워 이윤을 극대화하고 수익은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시스템이다. 참 신기하게도 이곳에는 유명 미츠코시백화점이 중앙상가에 명품브랜드를 입점시켰다. 서로 상생도 한몫했다. 이런 노력으로 10배가 넘는 세금을 납부하여 정부와의 약속도 지켰다.
타카마츠마루가메상점가는 “디자인”, “비즈니스”, “체계” 3가지의 조합을 강조한다.
첫째, 그 지역의 특징을 살리고, 개보수가 필요한 중심지를 괘적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재생시키고, 둘째, 전연령층에 필요한 서비스를 충실히 하는 동시에, 신성장동력 될수 있는 6차산업 같은 것에 의해 그 지역에 뿌리를 둔 사업을 강화시키고, 지역산업의 내적인 발전을 이끌어내고, 셋째, 재개발의 동력이 되는건, 그 지역에 뿌리를 둔 진취적인 회사가 지역개발과 관리를 맡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재래시장은 그 지역의 삶과 희로애락이 담긴 곳이다. 요즘은 관광자원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한국의 재래시장은 그 지역만의 컨텐츠가 부족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기보다는 정부의 의존도가 높고, 옛말에 사돈이 땅사면 배아프다고 하듯이 서로가 협업하기보다는 상인회가 편을 갈라 배가 산으로 간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한국의 전통시장이 살아남기 위해서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긴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하우를 습득하고, 세대교체를 위한 소통의 커뮤니티, 그 지역만이 할수 있는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한다면 100년 아니 평생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위기가 있었다.
희생하는 리더가 있었다.
주민들이 주체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애착이 강했다.
편가르지를 않았다.
긴시간이 걸렸다.
다음세대를 잇는 리더를 육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