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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선 - 잃어버린 길

보통날의 시선 55

by 호랑
보통날의 시선55 - 잃어버린 길.jpg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있는 길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한다.


어릴 적 무수히 걸었던 길이거나 한때 지겹도록 다녔던 길일 수도 있고, 이제 더는 그 길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길도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길이 아끼는 길이 되어서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호사를 누리는 길도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아끼던 길 하나를 잃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인가. 지역 어디쯤에서 구절초꽃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채비했다. 지금이야 간단하게 마실 물과 과일이라도 챙겼을 텐데, 그때는 그저 꽃 하나만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길고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오르는 동안 먼지가 일어 목이 칼칼했고, 다글다글 쏟아져 내리는 초가을 햇살은 따가웠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휙 지나가는 숲의 다람쥐와 청설모를 보며 더위도 잠시 잊었다. 그렇게 꽃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통기타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주변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여기며 걷고 또 걸었다.


꽃길은 끝이 없을 듯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모퉁이를 돌면 하얗게 피어 있는 꽃밭, 눈을 돌려 옆을 보면 또 다른 등성이로 이어지는 구절초꽃은 환상적이었다. 도대체 누가 처음 이 산등성이를 꽃으로 메울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것도 하얀 구절초꽃으로 말이다. 낮은 산과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걸으면 나타나고 돌아서면 또 저기 꽃길이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문득 꽃이 핀 산등성이가 뭉클함으로 다가왔다. 풋내 섞인 국화 향이 걷는 내내 코끝으로 올라와서일까. 아니면 더위와 먼지에 지쳐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서 하얗게 핀 꽃밭에 눕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릴 적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지 않고 뛰놀던 드넓은 들과 산이 떠올라서였을까. 아무튼 인증 사진 찍듯 구절초 핀 산등성이를 마음에 꾹, 담았다.


그 길이 여전하기를 바라며, 언제든 또 가야지 하며, 십여 년을 훌쩍 보내버렸다.


십여 년 만에 오른 산등성이에 꽃이 없다. 아니, 꽃은 있는데 그 옛날의 풍경이 아니다. 잘 다듬어 놓은 길과 계단, 길을 내느라 없어진 낮은 숲을 찾아 빈 눈을 허둥거렸다. 편리함과 바꾼 옛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로 잰 듯 반듯한 꽃길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비로 인하여 구절초의 상태 또한 좋지 않아 군데군데 물러져 있는 꽃들 보기가 안쓰러웠다.


익숙한 것이라야 비로소 제 몸에 맞는 정서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세월 따라 온전히 지켜지는 게 갈수록 줄어드는구나 싶었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몸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감을 이곳에서 느낄 줄이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디 그 길뿐일까. 마음도 잃고 정서도 잃고 세월도 잃은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편리하게 다듬어진 길과, 전에 없던 백일홍 꽃밭을 가로지르는 형형색색의 꼬마열차가 있는 가을 풍경은 볼만하였다.


잃으면 잃은 그만큼 다시 얻을 수 있는 이치를 새삼 생각한다. 비록 뭉클함으로 다가와 끝없이 이어지던 나만의 산등성이 구절초 꽃밭은 여기 두고 오지만, 어쩌면 오늘 이 꽃밭 풍경도 세월이 흐르면 누군가의 가슴 뭉클한 장소와 풍경으로 오래 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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