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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Sep 28. 2022

세탁기를 샀다.

전시되어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모델로. 

  세탁기가 말썽을 일으킨 것은 벌써 4~5년 전부터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는 지금 12살인 아들이 5살일 때 이사를 왔었는데 결혼하면서 샀던, 당시 7년가량 된 세탁기를 이전 집에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문제없이 사용했는데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점점 더 심해져 세탁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AS 기사님을 불러 세탁기에 고무 흡착판을 끼웠다. 많이 움직인 날은 저녁때 남편이 퇴근해 다시 수평을 잡아주기도 하였고, 세탁기 하단에 종이를 접어 괴기도 하였다. 세탁기가 놓인 곳은 베란다 내에서도 약간 층을 높인 곳인데 진동으로 세탁기 발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걸터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운행해놓고 장을 보러 갔다 오면 하단 벽에 고꾸라져서 안방 창문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있기도 했다. 탈수를 할 때 진동으로 움직이는 세탁기를 잡고 있노라면 내 몸속 수분이 탈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빨랫감과 헹굼물이 들어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세탁기가 더 무거워져 있을 때 양손으로 끙끙거리며 내려온 세탁기의 앞쪽을 들어 뒤로 밀어 넣고는 온 몸의 힘이 빠져 헉헉거리고, 어떤 날은 이런 세탁기를 쉽게 버리고, 쉽게 새로 사지 못하는 내 상황에 화가 나기도 했다. 


 매일 이렇게 힘들기만 했다면 진작 바꿨을 테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안정적으로 다시 두었을 때에 빨래를 조금씩만 넣어 돌리면 그래도 꽤 괜찮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세탁기가 말썽을 일으킨다 싶으면 내가 집에 있는 날만 빨래를 돌렸고, 또 몇 번 괜찮다 싶으면 외출하면서도 돌리는 식으로 세탁기와 밀당 아닌 밀당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퇴원 후 집에 계신 시아버님이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라고 전화하셔서 다음날 아침 일찍 시댁을 향했다. 세탁물이 몇 개 되지 않아서 이 참에 아들이 베개를 세탁해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세탁망에 넣어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시어른들을 뵙고, 마트 들러서 장을 보고 돌아왔다.  이미 세탁이 완료가 되었어야 하는데 11분이 남은 채 역시나 한 발은 한 단 아래로 내려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세탁기를 보고는 급히 조치를 취했다. 세워서 끙끙거리며 올려주고, 세탁 버튼을 눌렀는데 어떤 버튼도 듣지 않고, 세탁기 문도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안에 물이 차 있다는 거고, 물이 빠지지 않는 건 배수의 문제구나 싶어 배수구를 열어 물을 뺐다. 그 뒤 버튼은 작동하는 듯했지만 세탁기는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물을 먹어 무거운 빨랫감을 들고 민망함을 무릅쓰고 옆집 친구네 전화해 사정을 말하고 친구네 집에서 세탁물을 탈수하고 돌아왔다. 


 이틀 뒤 시간 여유가 있던 날 작동을 해봤지만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고, as접수 후 방문 전 전화상담에서 당장의 고장 부분은 부품 교체가 가능하지만 다른 곳 고장도 예상이 된다는 말에 새로 사기로 결심했다.

바로 세탁기를 주문할 요량으로 그간 가전은 인터넷이 가장 싸다고 들어서 인터넷 창을 켜고 살펴보았다. 큰 금액이 나가는 만큼 최저가로만 따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코스트코 온라인몰을 들어갔더니 배송기간이 이 주는 걸릴 수 있다고 한다. 

안 되겠다 싶어 다음날 바로 이마트 트레이더스와 코스트코를 갔다. 가격 비교하고, 당일 바로 살 생각으로 이마트 트레이더스를 먼저 갔는데 세상에 세탁기가 180만 원에서 만원 빠지는 금액이었다. 할인을 해서 16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 물론 더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국내 제조, 올 스테인리스, 저렴한 제품에는 없는 기능을 생각하면 가격이 그럴 법했다.  코스트코에서는 현장에서 구매해도 배송이 이 주가 걸릴 수 있다고, 그리고 같은 브랜드의 100만 원으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이 있었는데 그 전 주에 10만 원 할인하는 행사도 했었다고. 

두 곳만 봐도 지쳤다. 정말 많이 보고, 고르고 골라 사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선택지가 많으면 머리가 아프고 힘이 부치는 것을 느낀다. 전자제품을 전문으로 파는 곳은 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두 가지 중에서 고민을 했다. 백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세탁기와 백만 원을 훌쩍 넘는 세탁기, 이번 달 재산세도 내야 하는데, 명절이라 양가에 인사하느라 부담도 컸는데, 내 교육비도 가외로 들어간 게 있었는데...... 그래서 약 60만 원의 차이에 자연스럽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그냥 전시되어 있던 것 중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우발적이었지만 가장 본심에 가까웠던 선택이었다. 

나는 내 여건이 허락하는 경제적 상황 안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철없이 굴어도 되는 어린 시절부터도 나는 나 자신에게 쉽게 허락한 적이 없었다. 참고 버티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사달라고 떼를 쓰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쪼개고 나누고 모으고 그렇게 살다가 돈을 써야만 하는 순간에는 따지고 따져서 싼 것을 샀다. 그래서 그동안의 나라면 코스트코에서 봤던, 유사한 기능의 100만 원 미만 세탁기를 사는 것이 가장 나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싫었다.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 나를 맞춰 넣고 싶지 않았다. 저건 너무 비싸니까 하고 저렴한 것 중에서 사면 돌아서서 내내 씁쓸할 거 같았다. 그 많은 기능을 안 쓸지도 모른다. 정작 큰 세탁기 사놓고는 건조기가 허락하지 않아서 이불은 또 세탁소에 맡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마음이 가는 '좋은 것'을 사고 싶었다. 익숙하지 않은 선택이라 다음날 아침 일어나 남편에게 "여보 내가 잘한 걸까?" 되묻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애쓰고 참으며 살기보다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나를 위험에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는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다. 


 그간 세탁기가 덜덜 덜덜 진동이 올 때마다 잡고 떨어지지 않도록 안쪽으로 밀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 혹시나 싶어 내가 있을 때만 세탁을 돌려야 해서 시간에 쫏겨 빨래를 꺼내고 건조를 한 후 저녁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빨래를 개며 보냈던 날은 또 몇 번인지. 마지막으로 세탁기를 테스트해본다고 빨랫감을 넣고 돌리다 세제물이 빠지지 않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거품이 가실 때까지 한 시간을 넘게 세탁하면서 내 몸이 덜 아프게 이렇게나 많이 도와줬던 세탁기인데 좋은 걸로 사야겠다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가의 세탁기가 더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나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좋은 것을 선택한 거였다. 


이것은 탕진일까? 플렉스? 아님 욜로? 호구 잡힌 거? 

무엇이 되었는 나는 나의 선택에 만족하며, 매우 흡족하다. 내게 무엇인가를 넘치게 허락해 본 적이 있었나. 누가 나서서 내게 매서운 말을 건넬까 봐 내가 먼저 나를 단속하고 할 수 있는 것에서도 '분에 넘치치 않는 것'을 골랐다. 마치 누군가 그릇 가득 과자를 담아 좀 드시라고 권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 중 조각나 가장 작은 것을 고르는 것처럼. 그리고 행복했다면 좋았으련만 가장 예쁘고 큰 과자를 집는 사람을 보며 이기적이라고 비난했었다. 다른 이들이 할지, 안 할지도 모를 비난에 지레 겁먹어 나를 챙길 용기를 못 냈던 것은 나면서.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약자로 밀어버리기도 했고, 타인에게 투사해 분노하기도 했다. 


좋은 것을 고르는데 익숙하지 않은 나는 세탁기가 들어온 날은 '내게 제시되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가장 비싼 것'을 고르는 생활양식으로 내게 자리 잡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참...... 걱정을 만들어서 하고 사서도 하는 타입이다. 

타인과 나에게 해롭지 않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좋은 것을 선택하자. 나부터 나서서 나에게 허락해주자. 충분히 내게 허락하고 넘치게 부어주면서 나 자신을 채워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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