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의 맛, 당근라페 베이글
자신을 향한 감정적 거리 두기입니다
그녀는 베이글을 샀습니다
베이글은 강력 쌀가루 44.6%, 치즈와 블랙 올리브가 들어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동그랗고 통통한 빵은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이 나 있습니다
구멍이 주는 마음 씀은 골고루 잘 익으라는 의도라고 하네요
톱니 모양의 칼은 밀도가 낮은 빵 속을 잘 얼러서 부서지지 않게 잘라냈습니다
점점이 올리브와 치즈가 나타났습니다
녹은 체다치즈는 빵에게 살포시 안겼네요
빵 속은 점점이 치즈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시간을 지나가던 거친 말들이 어떤 온도에 녹았다면 그건 이해일까? 사랑일까?"
올리브 열매는 검게 익은 그대로였습니다
살짝 숨이 죽은 듯해도 기운은 반짝반짝 윤이 났습니다
그녀는 맛을 기억해 냈습니다
쫄깃할 거예요
녹아버린 치즈도 올리브도 간간이 종을 울릴 것입니다
방심하는 찰나에 뿌듯함을 터트릴 테니까요
그녀는 당근라페를 꺼냈습니다
어제 만들어 놓은 당근라페는 간이 잘 들었을 겁니다
필러로 얇게 깎아낸 당근을 소금에 절였다가
올리브오일, 식초, 홀그레인 머스터드와 후추를 넣고 버무렸습니다
꿀은 넣지 않기로 했지요
가진 게 없기도 했지만 재료가 빠지면 맛은 더 가벼워져서 좋습니다
당근을 믿는 무심함이기도 합니다
안팎이 다르지 않은 뿌리를 보니 눈이 맑아집니다
저며놓은 속살에서도 단단함이 느껴지네요
그녀는 베이글 위에 크림치즈를 발랐습니다
어색한 만남을 주선하는 명랑한 첫인사지요
그 위에 조심스레 당근라페를 얹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 심리학자 에밀 쿠에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상큼한 소리로 씹히는 당근에 이어 스며드는 크림치즈의 부드러움, 기다리고 있던 빵의 촉감.
'나'와 '너'를 보는 시선이 싱그러워집니다
'역지사지'를 해 본 사람만이 관점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Self-distancing은 캘리포니아대 Ozlem Ayduk과 미시건대 Ethan Kross 교수가 제안한 개념이라고 하는데요
방법은 3인칭으로 글을 써보는 거래요
행동이나 감정을 3인칭으로 묘사함으로써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거죠
자신을 향한 감정적 거리 두기입니다
머릿속에서 불만의 모양으로 굴러다니는 생각들이 때로는 이해하기 싫은 나의 못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1인칭 기술은 감정적으로 더 몰입하게 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던 디테일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저 제3자가 되어 글을 써 보는 것으로 나쁜 기억을 털어내는 시간이 되는 거죠
그녀는 이제 당근라페 베이글을 먹으며 3인칭의 맛이라고 씁니다
부정적 감정이 끼어들 수 없는 '너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