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장 Feb 17. 2024

내가 좋아하는 사람



순박하고 소박한 사람, 그러면서 자기 일엔 열중인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은 여러모로 조금 촌스러울 수도 있다. 작은 분식집을 하나 내면 이름은 기껏해야 ’소진이네‘ 정도로 할 것이고, 왠 활발한 손님이 와서 너무 맛있어요 외치면 머리나 긁적이며 고맙습니다를 더듬을 것이다. 저희 집은 국산만 써요, 특별한 방식으로 로스팅한 원두예요 -  그런 말로 포장을 덧붙일 줄 모른다. 그냥, 아, 제가 직접 한 거예요, 하고 말 것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망 같은 건 도통 없어 보이는 사람, 대신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람의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사람.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못 보던 도넛 가게가 열려있어 눈이 갔다. 내 팔 한 짝 정도 가로길이의 평범한 유리문이 하나 달려있고, 그 문이 세 개 남짓 들어갈 크기의 매장 입면이다. 밤 10시가 다 되어 불 꺼진 검은 상가 줄줄이 가운데, 한 살배기 입안에 젖니만 뽈록 나온 것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챙강-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매대엔 도넛이 몇 개 없다. 우유, 쑥, 누텔라(초코보다 누텔라라고 적는 게 철 지난 유행이다), 슈크림, 인절미 등등.

사장님 인절미는 남은 거 없나요 - 물으니 죄송해요, 이제 막 다 떨어져서...... 말끝을 흐리신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두건 쓴 사내의 반응은 사는 자와 파는 자에게 모두 아쉬운 상황, 그리고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장사 철학이 어설피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미간과 입고리엔 주름 잡힌 안타까운 미소가 끼어있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사장님이 말했다.


“그… 저희 매장 오픈은 아침 아홉 시에 합니다….! 다음에 꼭 오세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돌아서 딱히 궁금하지도 않은 우유와 쑥맛 도넛을 샀다. 그냥, 아마 나였으면 돌아서는 손님을 잡고 남은 재고를 떨이로 팔려했을 것 같은데, 이 남자는 수줍은 가게 안내 멘트를 던지고 있는 것이 괜히 마음이 가서. 대신 사장님은 뜬금없이 새로 개발하는 메뉴라고 매대에 없던 다른 도넛을 하나 넣어주셨다. 집에 돌아와 하나 먹고, 다음날 아침에 하나 먹었다. 딱히 특별하진 않았다. 다만 든든했다.


나는 순박하다기엔 약은 면이 있고 소박 하다기엔 자족할 줄 모른다. 스스로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같은 사람만 모아놓은 세상을 생각하니 아득하다. 세상에 단 하나의 유형만 남겨야 한다면 저 순박하고 소박하고, 또 책임감은 있어 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아야 하지 싶다. 누가 길을 가다 툭 부딪히면 욱하기보단 엇-하고 이내 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사정이 있어 돈을 좀 꿔줄 수 있겠냐는 친구의 부탁을 들으면 난처해하며 며칠을 고민하다 아내에게 말을 꺼내고 신나게 바가지 긁힐 것이다. 그러고도 ‘그래, 우리 집사람 말이 맞지’ 할 것이고, 몇 달 모은 용돈 몇백만 원이나 몰래 친구에게 보내주며 이것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 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돈을 갚는다 하면 자기가 빌려줘놓고서도 고맙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많은 것이 좋아서, 그래서 각박한 세상에 호되게 당하거나 가끔은 소극적인 자신을 탓하기도 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너만큼 많은 행복을 주고 누리는 사람도 없다고, 잘못 살고 있는 것 아니라고, 그래도 조금만 더 강해지고, 그래도 마음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손글씨로 팻말을 적어둔 집 근처 과일 가게에서 사과를 사고, 정갈하지만 약간은 심심한 한식 밥상을 내주는 서촌 골목 부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조금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강렬한 자극이 없는 사회일지라도 이런 사람이 많은 세상이 좋다. 무표정한 세상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아마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주 많이 웃을 거니까, 그들의 미소를 보면 나도 웃을 거니까.


오늘의 추천 도서,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바게트, 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