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0, 아시아나 OZ0541편에서
지나온 공간 : 수원, 인천 공항, 아시아나 비행기
OZ0541, 아시아나 프랑크푸르트행. 카자흐스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키와 이닝 사이 상공을 지나가는 중이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상공을 지날 때 좌석 모니터에 대전이나 대구 지명이 뜨면 비슷하게 낯설고 난해한 기분을 느낄까. 불 꺼진 기내는 밀도 있게 모인 수백 명의 인간 군상에도 놀라우리만큼 조용하고, 나는 5시간을 넘게 찌뿌둥하니 버틴 시간보다 더 긴 비행시간이 남아있단 걸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 싫은 상태다.
한참 괜찮던 허리가 일만 미터 상공의 저기압을 증명이라도 하듯 디스크가 부푼 듯 지끈거린다. 이코노미 좌석을 뒤로 잔뜩 젖혀 기대고 싶다가도 뒷사람도 조명 키고 뭔가에 열중하는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기내식 먹고 노곤할 만도 한데 왜 안 주무시는 건지… 뭐, 내가 피곤하고 정신없는 게 저분 탓은 아니니까.
수원에서 인천 공항을 바로 가는 방법은 주로 버스다. 공항버스는 다양한 노선이 존재해서 각 번호별 배차간격이 매우 길고 정차하는 정류장도 달라 섬세하게 때와 장소를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이러한 정보를 출발 당일 아침 6시에 깨달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왜 카카오맵은 경기 공항 리무진의 시간표를 제공하지 않고, 하필 이날 아침엔 비가 그렇게 쏟아졌을까.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로 환승하려던 나의 투박한 계획은 하루 6대만 지나는 배차간격을 확인하곤 다른 정류장의 공항버스를 타는 것으로 급히 변경됐고, 막상 도착해서 타려고 보니 공항버스가 맞긴 하되 인천행이 아니라 김포행이란 걸 깨닫고는 심히 당황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다행히 내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기 때문에, 아직 이런 일시적 오류 정도는 택시 타고 다른 정류장으로 이동하면 괜찮겠다- 싶은 낙관적 심정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출근 시간 탓인지 시내 택시는 10분 넘게 불러도 오질 않았다. 비행 출발 시간 2시간을 남기고도 아직 '수원 한일타운 정류장'에서 발만 구르고 있던 시점, 드디어 속이 벌겋게 타들어가면서 에어비앤비 숙소 환불 가능 규정과 위약금이 자동으로 머리에서 계산되기 시작했다. 진작 그냥 택시 부를 걸 - 하는 안타까움은 일단 제쳐두고 택시 어플을 켜 인천 제1 여객 터미널을 행선지로 호출하였다.
다행히 수원에 계시던 한 서울 택시 기사님이 콜을 받아주셔 비행기 이륙 시간 40분 전 도착하는 7만 원짜리 택시를 Flex를 할 수 있었다. 꼬이던 일이 풀리려면 그래도 어찌어찌 항상 풀리는 것 같다. 대형마트에서 부모님 잃어버린 네 살배기처럼 버스 정류장에 서있던 빨간 캐리어 남자를 태워준 아이오닉 5 기사님, 감사합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항공 수화물 위탁은 1시간 전까지이기 때문에 40분 전 도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럴 땐 당황하지 않고 항공사 직원을 찾아 빠른 상황 설명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자신감은 몇 차례 촉박한 탑승 수속을 밟아본 경험 때문이요, 그럴 때마다 아무리 늦게 도착해도 언제나 내 뒤에 더 늦게 타는 승객이 있었기 때문이다(자랑 아닙니다). 직원 분은 급하게 전화를 돌림과 동시에 종이 티켓을 발권하며 뒷면에 ‘교통 약자 스티커’를 붙여주셨다. 이 스티커는 각종 탑승 수속을 단축시키고 대기줄을 생략해주는 에버랜드 프리패스 티켓 같은 효과를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실제 교통약자보다 나와 같은 지각쟁이(시간 개념 약자)를 구제하려 더 많이 쓰일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여유 있게 도착하여 제1여객 터미널 3층에서 국제면허를 발급받으려던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옆에서 항공사 직원 한 분이 함께 분주히 뛰어주시느라 눈치가 너무 보여 차마 “저기 혹시… 국제 면허 발급 좀 받고 가도 되나요.”라는 무엄한 말은 꺼낼 생각조차 못했다. 실리보다 인간됨을 선택한 것이 아직까진 그래도 후회되진 않는다. 원래는 파리부터 몽생미쉘까지 운전하여 로드 트립 느낌으로 작은 마을들도 들리며 여유 있게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승무원은 이륙 예정 시간 20분 전까지 반드시 31번 게이트에 도착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시고는 나를 출국장으로 인도했는데, 보폭이 큰 탓인지 이륙 30분 전에 게이트 앞에 도착해버렸다. 내 앞의 긴 프랑크푸르트행 아시아나 승객 줄을 바라보며 '그냥 국제 면허 발급받고 와도 시간 됐겠네'하는 생각이 떠오른 건 혹시 참 속없는 생각이었을까… 다시 한번 이 글을 빌어 아시아나 직원 분들께 사과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상기 과정을 거쳐 지금 평면 좌표 이코노미 25H 석에서, Z축 값 일만 미터 상공 성층권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마지막 한식이란 생각에 기내식은 소불고기 쌈밥을 먹었고, 마실 것으론 스페인 레드 와인을 골랐는데 입맛이 까다로워진 것인지 아무리 스월링을 해도 탁 치는 향이 거슬려 마시기가 힘들어 다 남겼다. 한 권이면 충분하겠지 싶어 기내 수화물에 담은 <심미안 수업>은 벌써 다 읽어버려 남은 일곱 시간이 막막하다. 옆 사람은 곽도원 배우가 교도소 가는 영화를 보고 있고, 왼 대각선의 사람은 오목부터 테트리스까지 온갖 게임을 두 시간째 하는 중이다. 기내는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간간히 우는 이쁜 애기의 옹알과 빼액 외에는 조용하다. 글을 쓰다 생각해보니 라거를 마신 지가 꽤 된 것 같아 마지막 한국 맥주를 부탁해 마시는 중이다. 가서 마실 독일 맥주 직전에 바닥 기준점의 기억을 설정해두면 더 빛나지 않을까? 물 타지 않았단 것이 선전할 거리가 되는 이 나라 대기업의 맥주 시장, 독일에서 맥주란 무엇인가 체험 좀 하고 와야겠다. 왠지 독일 맥주는 물 타도 맛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