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독일도 와인합니다

08.31 뤼데스하임에서

by 이원장

지나온 공간 : 뤼데스하임 기차역, 와인밭, 전망대, 동네 식당


“뜬금없이 독일에서 와인밭을 간다고?”


‘독일의 술’하면 다들 맥주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기차까지 타고 와인밭을 가는 게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독일은 맥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지만, 세계 10위에 해당하는 와인 생산국이기도 하다. 다만 한국에서 독일 와인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건 생산량 대부분을 자국 내에서 소진해버리는 와인 소비량(세계 4위!)의 공이 크다 (프랑스와 신대륙 와인에게 품질과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탓도 있다). 그리하여 많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와인 수출국보다 와인 수입국에 더 가깝다.


독일 와인의 특징

와인을 위한 포도를 재배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연조건은 춥지 않은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이다. 유럽에서도 따뜻한 중남부에 위치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가 와인을 생산하고 신대륙 중에서도 칠레, 미국(캘리포니아)이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인 건 위와 같은 자연적인 이유 때문이다. 영국만 해도 와인 산업은 전무하고 대신 맥주(에일)와 위스키가 발달했는데, 사계절 내내 흐리고 습한 날씨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거대한 땅덩어리는 와인 재배 북방 한계선을 포함하는 중북부 유럽에 속하기 때문에, 강을 중심으로 비교적 따뜻하고 일조량이 풍부한 서남부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해왔다. 독일 내에서는 나름 좋은 기후 조건이라고는 하지만 프랑스 부르고뉴, 보르도 지역에 비해 여전히 기후가 서늘하기 때문에 프랑스 와인에 비해 무게감과 향미가 떨어진다는 평이 많다. 레드 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 전체 생산량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현상이 이를 반영한다(20세기 중후반까지는 무려 90%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 와인은 대체로 무게감과 고상함을 조금 내려놓은 대신 포도에서 직접 올라온 산미가 주는 정제되지 않은 발랄함을 담고 있다. 보통은 갓 생산한 어린 와인이 그런 풋과일스러운 가벼운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다. 사실 나와 같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음식에 곁들여 마실 용도로 데일리 와인을 찾는 사람 입장에선 저렴한 어린 와인의 성격이 더 중요한데, 가벼운 발랄함을 더한 독일의 어린 와인은 어떠할지 걱정 섞인 호기심이 생겼다.



개도 더운지 찬바닥에 널부러졌다

한국으로 치면 무궁화호와 ITX 열차 정도 되는 독일 RB 열차는 좌석보다 사람이 많았고 내부는 너무 더웠다. 안타깝게도 에어컨 냉방은 기대하기 힘든 눈치였다. 혹시 싸늘할까 봐 입고 온 후드를 벗고 반팔만 입고 서있으니 그나마 버틸 만했다. 내 앞에 170 중반 정도로 보이는 수염 기른 외국인은 이 더운 날씨에 두꺼운 검정 바시티 재킷(야구 점퍼)을 입고 서있었다. 역시 아리아계 서양인은 몽골계 동양인과 체표면적과 물질대사가 달라 높은 기온에도 열 배출을 잘할 수 있는 걸까 - 는 무슨,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훌렁 후드티를 벗고 반팔로 있자 그도 재킷을 벗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으며 대화를 텄다.


“오늘 참 덥지요.”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는 네덜란드로 휴가를 간다고 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친구가 그곳에 있어 며칠 있다 함께 모여 차를 타고 해변으로 떠날 거라고. 얼마나 오랜 친한 친구들이길래 거기까지 가냐고 묻자, 실제로는 이번에 처음 보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응? 보통 국경을 넘을 정도면 매우 친한 학창 시절 친구들 아닌가?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인데, 화상이나 디스코드로 대화하며 친해져서 이번에 처음으로 만나서 놀러 가는 길이라 했다. 내가 너무 닫혀있는 사람인 건지, 유럽이 EU 국경만큼이나 열린 외향성을 지닌 지역인 건지. 해맑게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참 좋아 보였다.




그는 시리아 출신 난민이다.

6년 전 가족과 함께 나라를 탈출해 이곳저곳을 떠돌다 독일에 정착해 지금은 학교와 공장을 같이 다니고 있다고 했다. 서른 즈음은 되어 보였는데 학생이라길래 놀라 무슨 전공이냐고 물어보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데 건축을 희망한다 했다. 정말 다른 인종의 개인에 대한 섬세한 식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그도 내 나이를 듣고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동년배인 줄 알았다고 한다.

(아, 독일은 참 열린 사고를 지닌 좋은 나라다.)


2015~2016년, 몇 년간 이어진 정부와 반정부 세력의 다툼 속에서 견디다 내전을 피해 나라를 떠난 수백만 명의 시리아 국민들. 당시 유럽은 EU와 공동체 가치 붕괴 현상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황이었고 난민 문제는 그 도화선이요, 가치를 지키려는 이와 혐오를 발판 삼아 물어뜯으려는 자들의 전쟁터였다. 난민들이 지나가는 길목의 민족주의 성향 강한 일부 동유럽 국가들과 이탈리아에선 반이민 정서가 거세졌고 극우/반이슬람 성향 정당이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유럽 국가들 중 하나였다. 공동체, 인도적 가치의 위기가 찾아온 그때,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국경을 열었다. 그는 2015년 '우리는 할 수 있다(Wir schaffen das)'는 구호를 내걸고 100만 명에 달하는 난민에게 '국경을 닫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원래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범 행위를 참회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다문화, 다인종을 포용하는 자세가 대중적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인 나라였다. 그러나 ‘몇십 년 해묵은 일 때문에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 하느냐’며 역차별이라 주장하는 일부 실용주의 젊은 세대들의 피해의식은, AfD(독일 극우정당)가 유로화에 반대하는 경제 자유주의 정당에서 극우, 이슬람포비아 집단으로 변모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AfD는 이후 선거에서 약진하며 1960년대 이래 처음으로 극우 의원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난민을 받아들인 정책과의 인과관계는 증명할 수 없지만,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와 이민자가 저지른 사건 사고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는 한국 이민자들의 제보가 있기도 했다. 보도되지 않는 혐오 범죄가 늘었고,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 국기를 든 극보수 단체 시위의 화살이 독일에서는 다른 문화와 외모를 갖춘 이민자를 향해 있다.


나는 모든 정치 성향의 저변과 그 논리의 밑바닥은 감성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주장의 근거를 파고 파고 내려가다 보면 결국 나오는 건 그저 그것이 '좋아서' 혹은 '싫어서'이다. 차별 금지법, 동성 결혼 법제화, 원자력 발전소 찬반, 코로나 방역 지침 등 - 각자가 말하는 논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 걱정을 하고 세계 평화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결론으로서 주장이 나온 과정이 아니라, 결론이 되는 주장을 미리 세워두고 그 후에 뒷받침할만한 논리를 가져다 덕지덕지 덧붙인 형태다. 주장 저 밑에는 철저하게 이유 없는 감성이 있다. 강아지가 불쌍해서, 원자력이 불안해서, 동성애가 꼴 보기 싫어서, 그도 아니면 그냥 나와 다른 것들이 싫어서.


나도 나름 감성 섞인 논리가 있지만 무엇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이건 모두가 <내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태도만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정답을 묻는다면 나도 자신 있게 할 말은 별로 없다. 다만 내가 만난 그 친구는 해맑은 미소와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그와 한 시간 정도를 함께 있으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도 내게 행선지를 물었다. 와인밭이 있는 뤼데스하임으로 간다고 하니 내게 술을 마시냐 묻고는 씩 웃으며 자기도 술을 참 좋아한다 했다. 자기 최애(Favorite)는 진(Gin : 40도 내외 증류주의 일종)인데, 종교적인 이유로 아버지 몰래 마신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은 무슬림이겠구나(이슬람 경전은 술을 금지한다.). 아직도 부모님 몰래 담배 피우는 내 친구를 떠올리며, 종교를 떠나 부모님 몰래 술담배 하는 건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그의 주변에는 25살 전에 빨리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몇년 안 남았네요?" 장난을 좀 쳤지만 그는 자리를 좀 잡고 서른 즈음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는데, 어딜 가나 요즘 젊은이들 생각은 비슷하나 보다.


간만에 영어로 유-머도 하나 구사했다. RB 열차는 따로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ICE(독일에서 가장 빠르고 비싼 KTX급 열차) 정도 되는 열차에만 에어컨이 있다고 말했다.


"So you mean only expensive train like I-C-E has air conditioning system, Right?"

(그러니까 ICE 열차 같은 비싼 곳만 에어컨이 있다는 거죠?)

“Yeah, that’s it.”

(네, 그렇죠.)

“That’s why they have I-C-E(icy) air. LOL.”

(그래서 시원한 얼음(ICE) 같은 공기가 나오는군요. 하하하.)


그는 내게 주변 독일인 중 가장 유머러스하다고 했으니, 독일인의 무뚝뚝함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이 정도 유머로 방송이나 정치계에 입문하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자, 그의 질문이 좀 특이했다. 대뜸 내게 “디젤을 허용할 생각이냐?” 고 물었다(나름 그 지역에선 환경 규제와 관련해 중요한 정치적 사안인 듯 했다). 나는 그의 차가 무엇인지 물었다. “Diesel.” - 그에게 평생 쓰게 해 주겠다고 답해줬다. 선거 운동 없이 출마해도 한 표는 거뜬하지 싶다.


내가 먼저 내릴 때가 되어 짧았던 인연에 작별 인사했다. 진(Gin)을 샷으로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그가 음주 상태로 디젤차를 몰지 않기만을 바라며,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 뤼데스하임 역에 내렸다.



뤼데스하임 역에 막 내려 올려다본 풍경



오후 2시가 넘어 내린 뤼데스하임 역은 한국 시골 읍내의 시외버스 터미널보다 작은 크기의 간이역이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빠져나와 여행객들이 걷는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낮은 성벽 같은 잿빛 담이 마을을 두르고 있었고 그 위로 언덕 능선을 따라 비탈진 와인 밭이 펼쳐졌다. 등 뒤 마을 가장 낮은 곳에선 라인 강이 거대하고 잔잔히 흘렀다.





독일의 전통의상 드린들(Drindl)을 입은 여인

블로그 포스팅에서 얼핏 본 정보를 떠올리며 얕은 오르막인 마을 길을 따라 주욱 걸었다. 뤼데스하임에는 독일 소도시가 주는 안정감, 동화나 장난감 마을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꼭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나 오래된 고딕 대성당 같이 으리으리함에 경탄해야만이 좋은 건축물은 아니다. 낮고 아기자기하지만 잘 정돈된 주택들, 땅에 박힌 묵직한 마일스톤 대신 낡은 나무 표지판이 벽에서 가지처럼 삐죽 나와 방향을 안내하는 길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지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돌길, 적갈색의 주택, 세모로 뾰족뾰족한 지붕, 어깨 볼록한 흰색 셔츠에 체크무늬 식탁보 소재로 만든 앞치마 원피스(독일 전통의상 드린딜(Drindl))를 입은 여인이 맥주잔을 들고 다니는 이 동화마을이 정말 사람이 살고 일하는 곳이라니.



뤼데스하임의 골목


이 날 여행지인 뤼데스하임이 위치한 ‘라인가우’ 지역은 비록 연간 몇백 병 밖에 생산하지 않는 소규모 와이너리가 대다수이지만, 고급스러운 리즐링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생산지이다. 리즐링은 소비뇽 블랑, 샤도네이와 함께 3대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서 우아한 풍미와 매우 강한 산도로 높은 숙성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독일 와인의 자존심이라 불리며 전 세계 생산량 중 60%를 독일이 차지하고 있고 그 평가 또한 매우 좋다. 리즐링은 특히 귀부와인이나 아이스바인 같은 달달한 디저트와인으로 태어날 때 매우 귀한 취급을 받는데, 높은 당도와 산미로 달콤하면서도 복합적인 향과 맛을 뽐낸다. 리즐링 또한 다른 와인 품종처럼 떼루아, 즉 기후와 토양에 대한 독특한 감수성이 배어들며 향과 맛의 밑바탕이 된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리즐링은 산도 높은 사과나무 향을 낸다고 하며 잘 숙성시키면 독특하고 고급진 석유 향이 깃든다고 한다.



리슬링. 저녁에 마시다 중간에 찍은 사진으로, 200ml는 족히 되보인다.

와인 산지답게 가는 길 좁은 골목마다 와인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어찌 된 심경 변화였는지 한 잔 걸치는 일 없이 곧장 트레킹 길 초입으로 들어섰다. 지출을 줄이고 싶었던 건지, 맨 정신으로 좀 걷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는 매우 후회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가시게 되면 꼭 미리 한 잔씩 걸치시길 바란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라’는 인생 격언이 가장 잘 적용되어야 할 곳은 바로 여행지이다. ‘다음에 해야지.’라는 말 안의 ‘다음’도, ‘해야지’의 의미도 이내 곧 증발되어 사라지니까- 그게 또 여행의 묘미니까. 글라스로 테이크 아웃이 되는 와인샵이 하나 있었는데, 1-3년 된 리즐링이 한 잔 당 4~7유로 정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한국과 달리 거의 200ml 이상 잔 가득 와인을 따라주니 인심도 매우 넉넉하다. 뤼데스하임을 가게 된다면 달콤한 취기에 햇살구처럼 살짝 달아오른 눈빛으로 방금 마신 와인을 길러낸 포도밭을 거닐어 보는 게 어떨까.



독일은 원래 기후가 서늘하기 때문에 태양을 최대한 마주할 수 있는 남향 경사지, 특히 혹독한 기후를 완화시키는 수역인 라인 강과 모젤 강 지류나 계곡에 포도밭이 위치해있다. 이날 역에서 내려 언덕 꼭대기를 바라보며 걸어 올라가기로 마음먹은 뤼데스하임 포도밭 또한 라인 강을 내려다보는 비탈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 위 비탈면에 자리한 와인 포도밭


본격적으로 출발하려는데 초입부터 갈림길이 나와 나무 안내판 지도를 봐도 긴가민가 했다. 마침 내려오시는 미국인 노부부가 있어 (왜 굳이 미국인이라 확신하냐면, 너무나 미국식 억양이었고 일단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맞는지 물었다. 작은 안경을 쓴 할머니께서 “그래, 이 길로 쭉 천천히 올라가면 돼~” 하며 옆집 손주를 대하듯 알려주셨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려는데,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갑자기 주머니를 주섬주섬하시더니 ‘Secret present’가 있다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왼, 오른 바지 주머니에도 없는지 가방까지 뒤져 겨우 뭔가를 찾더니 ‘따라~’ 하는 효과음과 함께 내게 건네주셨다. 펼쳐보니 뤼데스하임의 포도밭 지도였다. 이런 걸 비밀 선물이라 하며 효과음까지 내며 주시다니, 미국 사람 유머다웠다. 나도 이에 질세라 “와- 이렇게나 귀중한 걸 저한테 주시다니요!” 하며 한국인다운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호호, 서로 'Have a nice trip' 이란 인사와 함께 길을 엇갈려 오르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지도 팸플릿은 구글 지도보다 훨씬 상세하게 나와있어 나름 큰 도움이 되었다. 올라가다 보니 양갈래 길이 나왔다. 내려오는 다른 행인에게 묻자 왼쪽은 완만하게 걷는 코스고, 오른쪽은 가파르지만 돌아가는 코스라 했다. 산보를 하고 싶지 등산을 하고 싶진 않아 주저 없이 왼쪽을 택해 걸었다. 펼쳐진 포도밭이 좋긴 했지만 엄청난 구경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그냥 천천히 걷고, 노래를 틀고, 친구와 전화를 하고, 혼자 노래를 불렀다. 아마 여기 포도들도 폴킴 노래는 처음 들어보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한국 노래를 들어본 적은 있으려나. ‘착한 말 양파, 나쁜 말 양파’ 실험이 생각났다. 청포도들에게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열 번은 불러준 것 같은데, 내 목소리가 좋은 떼루아가 되어 잘 자라길 빌었다.



햇살이 따뜻해서 그렇지, 꽤나 많이 걸은 것치곤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반팔 반바지에 백팩을 메고 걸으니 등에는 땀이 찼고, 높은 지대에 강바람이 불자 기분 좋을 만큼만 서늘했다. 한국 숲처럼 높은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지 않으니 비탈길을 걷는 내내 평온한 라인 강과 넓은 포도밭이 확 트여보였다. 화이트 와인이 강한 지역답게 거의가 청포도/백포도를 재배하고 있었지만 간간히 적포도도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적포도도 껍질을 벗겨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피라미드를 사선으로 올라가는 듯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중심 길이 있고, 사이사이 포도밭을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밭길이 줄줄이 나있었다. 사이 밭길로 걸어가면 포도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알은 작고 껍질은 투명했으며, 매우 동글동글 했다. 내가 아는 한국 포도와 바다포도를 섞어놓은 것처럼 앙증맞고 탱탱했다. 포도알을 가만 보고 있자니 아기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귀를 잔뜩 내리고 눈망울이 맑은 아기 고양이.

줄줄이 난 포도밭길


밭길을 걷기만 해도 냄새가 향긋해 맛이 궁금했다. 저 멀리 한둘 씩 지나치는 관광객들이 손을 뻗어 따먹는 걸 봤지만 왠지 못 미더웠다. 혹시라도 독일 경찰 오면 어떡해. 조금 걸으니 큰 당산나무 아래 할머니 할아버지 한 분 씩 누워 쉬고 계셨다. 혹시 포도 알을 몇 개 따서 먹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훠이- 하시는 동작으로 보아 그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포도는 생각보다도 더 싱그러운 산미가 향긋하게 올라오고, 너무 달지 않아 좋았다. 바로 먹을 식용도 아닌, 와인을 만드려 키운 포도가 이렇게 맛있다니! 특히 씹을 때 터지며 입천장과 코 뒤로 올라가 퍼지는 향이 참 좋았다. 한국의 과일은 너무 당도(Brix)에 집착하느라 향과 산미를 잊는다는 글을 읽은 적 있는데, 매우 공감한다. 내가 단 걸 찾으려고 했으면 설탕을 뿌려 먹거나 아예 디저트를 만들어 먹지 않았을까? 한국도 당도에 집착하지 않고 식감, 과일향, 산미 등 해당 과일의 고유한 풍미와 개성을 북돋아 생산하는 농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후로도 좀 걷다 목이 마를 때 한두 알 씩 따먹었다.

청포도와 적포도. 둘다 맛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허락을 구한 그 노부부가 과연 농부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시라도 그들이 아무 권리가 없는 그냥 관광객이었다고 해도, 아무리 서리에 야박해진 세상이라곤 하지만 좀 봐줬으면 좋겠다. 비행기 14시간, 기차 2시간 타서 여기까지 한 시간 걸어 올라왔다. 그렇게 와서 겨우 내 손톱만 한 애들로 골라 열 알도 안 먹었다고.


배가 너무 고프고 시간이 늦어져 중간에 기념사진을 많이 찍는다는 전망대까지만 가는 걸로 목적지를 수정했다. 올라가다 보니 산 중턱에 뜬금없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찾아보니 숙박과 식당을 겸하는 곳으로, 구글 리뷰를 보니 '끝내주는 경관을 가진 야외 테이블에서 적당히 괜찮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고 적혀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내려올 때 잠시 들렀는데, 거의 다 먹어가는 손님만 몇 있고 종업원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민망한 어색함 속에 몇 분을 기다려봤지만 전부 퇴근한 건지 별 반응이 없었다. 아마 내 친구와 둘이 왔으면 무작정 자리에 앉아 더 기다려봤을 텐데, 아무리 낯섦을 무서워하지 않는 나라도 차마 혼자서는 그러질 못하겠어서 그대로 하산했다.


몇 차례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나라는 사람이 결코 홀로 단단한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내 옆, 내 뒤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나아가고자 하는 앞걸음을 자신 있게 내딛을 수 있는 든든한 이유가 된다. 실제 그 사람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도움은 하나도 없더라도, 그냥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이다. 내적으로 더 단단해지는 것도 성장이지만 주변인들을 더 사랑하며 함께하는 것도 그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여행을 같이 왔으면 좋았을 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돌아가면 잘해줘야겠다고 되뇌었다.


모노프테로스(Monopteros). 얼핏 정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측벽대신 기둥으로 지탱하는 형태의 작은 원형 신전을 칭하는 말이다.

전망대 부근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부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모노프테로스(Monopteros) 앞 벤치에 누워 신을 살짝 벗고 밭과 강을 바라보았다. 아래 기차역에선 긴 바다처럼 커 보이던 강이 실개울만 하니 보이고 알알이 따먹던 포도가 점묘화처럼 연둣빛 흐린 점으로 찍혀 그 크던 밭이 한 점 수채화같이 펼쳐졌다. 그 시작이 산인지, 강인지 모를 바람이 능선을 타고 발을 간지럽혔고 그 두 발로 이 고도에 올라왔다는 성취감도 느껴졌다.

포토 스팟으로 보이는 장소 앞에서 가족, 부부가 서로 자세를 취하며 시끌벅적 사진을 찍었다. 그들에게 내 뒷모습을 찍어달라 부탁하려다 멈칫했다.



어쩐지 나는 별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기보단 가구 하나 없이 비워진 빈 집 같았다. 조용히 혼자 길을 걸을 때는 애써 자각하지 못했던 외로움, 그것이 부산함을 만나자 무심코 전등불을 켠 어두운 방에서 발견한 코끼리처럼 갑작스레 거대하게 다가왔다. 혼자일 땐 외로움을 모른다. 역시 고독은 군중 속에 있는 거였구나.


잠깐 누워있다 일어나 조금 더 걸으니 독일 통일(1871년 독일 제2제국 설립을 의미. 초대 수상은 그 유명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니데르발트 기념비(Niederwalddenkmal) 동상이 나왔다. 도무지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 와인밭 위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였다. 최상단에 서있는 승리의 여신상은 왼손엔 검을 쥐고 오른손으론 왕관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 길게 난간이 둘러진 전망대로 가 새삼스레 아래를 바라보았다. 쭈뼛쭈뼛거리다 키가 큰 독일 분께 사진을 몇 장 부탁드렸다. 나름 서로 장난도 치며 유쾌하게 찍었으나, 역시 결과물을 보자 사진은 한국인에게 맡겨야 함을 깨달았다(한국인 중엔 적어도 못 찍는 사람은 없다). 나를 이런 신체 비율로 찍는 사람은 당신은 처음이야, 라는 미소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하산했다. 가족 단체 대화방에 사진을 올리니 동생이 거짓과 과장 하나 없이 나를 놀려먹었다. “와- 형 진짜 동양인 같아”


한 시간쯤 걸려 아래 마을로 내려가니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듯 허기가 졌다. 직접 와이너리와 식당을 동시에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예약과 웨이팅이 많아 조금 고민하다 다른 곳으로 갔다. 사실 여긴 친구와 함께 왔으면 아무 빵이나 씹으며 기다리면서라도 들어갈 법했는데, 이날은 와인잔을 치켜들며 박장대소하는 손님들 속 혼자 침묵하며 자리를 기다리고 있을 나와, 바빠서 그런다고 믿고 싶어질만큼 무뚝뚝한 종업원의 눈빛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에너지가 없고 지쳐있었고, 아무래도 그런 몸은 마음의 여유를 담을 줄 몰랐다.


적당히 자리가 빈 식당을 찾아 안쪽 자리에서 슈니첼과 리슬링을 한 잔 시켰다. 다행히 리슬링이 먼저 나왔다. 글라스 한 잔에 6유로로, 그 양은 한국 파스타 가게과 비교가 안 될 정도여서 마치 생맥주를 시킨 듯 글라스 입구 근처까지 가득 따라주었다. 목도 축이고 식욕도 돋울 겸(이미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배고팠지만) 향을 머금으며 목으로 넘겼다. 2-3년 된 나이와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밸런스 좋고 튀는 알코올 없이 목 넘김이 좋았다. 산미 있는 특정 향이 톡 쏘았지만 튄다는 느낌보단 오히려 개성 있는 향기로 느껴졌다. 초록 선인장에 툭 튀어나온 가시가 아니라 하나 크고 노오랗게 핀 꽃처럼.


배고픔을 잊고 정취를 즐기며 바로 앞 거리와 행인을 구경했다. 같은 식당 야외테이블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지나는 행인마다 말을 걸고 있었다. 대강 내용은 이러했다. “어디서 왔소?” “스페인에서 왔는데!” “Hola, Senoritta(대충 스페인말)! 시간 있으면 여기서 같이 한 잔 할라우?” 이런 식으로 동년배 사람들에게 국적과 합석 의사를 물었는데, 그 덕에 나는 이 멀고 작은 독일 시골 마을에 미국, 북유럽, 스페인, 이탈리아 인까지 놀러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탑골 공원 뒤 포장마차 거리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저 헌팅 멘트가 통하는 게 더 놀라웠다. 내가 나갈 때쯤엔 8명 이상의 어르신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슈니첼과 리슬링! 슈니첼은 촉촉하고 양이 많고 맛도 괜찮았다.


뜨거워서 입천장을 덴 슈니첼을 호호 불어 식혀 삼키며, 여기 오는 사람들은 참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했다. 평균 연령이 60대는 되고도 남을 것 같은 백인 관광객들이 대다수였다. 우리가 목어 달린 산속 절이나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마을을 찾는 것처럼 은퇴한 노부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쉴 겸 들리는 마을인 듯했다. 다른 도시들을 돌다 보면 가끔씩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녀라도 하나 둘 보이던데 이곳은 어림도 없이 다 백발이 성했다. 까만 머리 동양인은 정말, 정말 없었다. 나를 제외하곤 딱 2명을 더 발견했다. 기차역 뒤편 강가를 걷다 마주친, 고즈넉한 일본 마을 전원주택에 사실 것만 같은 단아한 중년 여성 2분이 그분들이다. 그들이 나긋하게 내딛을 땅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걷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으면, 마치 <슬램덩크> 속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시골 기차역의 짭조름하고 청량한 공기가 맡아지는 듯했다.


말 한마디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분들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짧은 시나리오를 써보자면 -


그들은 여고 동창 사이였다. 스즈미와 하루히. 반도, 동아리도 달랐지만 그 둘은 겹치는 친구 없이도 친하게 지냈다. 학교가 일찍 마치는 날이면 함께 학교 도서관으로 가 잔잔한 수다를 떨고 책을 나눠 읽는 게 둘만의 소중한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은 스즈미가 하루히에게 펼쳐진 독일 여행 에세이를 보여주며 말한다.


"여기 보여? 뤼데스하임,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이래. 나중에 졸업하면 같이 여기에 가보자!"


하루히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스즈미는 졸업 후 도쿄로 건축 공부를 하러 대학에 진학했고, 하루히는 고향에 남아 어머니의 식당을 도우며 근처에 꽃가게를 열었다. 그렇게 거리가 멀어진 그들은 항상 '다음에 꼭 만나자'는 말로 마무리 짓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추억에 대한 그리움만 남은 사이로 지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뜸해진 편지와 몇 번의 이사 끝에 소식이 끊기고, 가끔씩 다른 동창을 통해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는 안부만 전해 들으며 결국 서로를 조금씩 잊는다.


20년 쯤 시간이 더 흘렀을까, 건축 사무소를 연 스즈미는 사무실에서 독일 건축 책을 읽다 문득 예전 약속을 떠올린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하루히의 번호를 찾지만, 막상 번호를 찾자 서로 달라진 모습에 실망하게 될까 봐 전화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 함께 번호를 찾아준 딸이 찾아와 주저함을 떨쳐내라고 말한다. 어렵게 첫사랑을 다시 찾았지만 주저하다 기회를 놓칠 뻔한, 지금은 남편이 되었다는 딸 아이의 개인사를 들으며 후회하지 않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스즈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고, 아직 고향에 있다는 그녀와 반갑게 약속을 잡는다.


삼십 년 만에 만난 그들은 그리웠던 얼굴이 이제 많이 달라져있음에 놀란다. 동그란 안경을 썼고, 항상 양갈래로 땋던 머리는 단발이 되었고, 그 시절의 친구보다 서로의 집에 놀러가면 반겨주시던 친구 어머니를 더 닮아있다. 그러나 말문이 트이자 그 속은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시절의 친구임을 느끼게 된다. 이내 옛날 이야기와 서로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고, 어렸을 때 함께 읽은 별 유명할 것도 없는 독일의 작은 마을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와 아무도 연박을 하지 않을 법한 작은 시골 마을 뤼데스하임 와인밭 중턱에 위치한 숙소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 날 저녁과 와인을 먹은 그들은 함께 먼 곳을 바라보다 어쩐지 자기들 고향 해안 마을을 닮아있는 강변을 발견한다. "우리 그 때 그 길로 함께 하교하던 것 기억나?"는 말로 추억을 회상하며 마을로 내려온 그들은, 며칠을 계속해도 밀려있는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뤼데스하임의 강변 길을 걷는다. 세월은 흘러 야속하기보다 쌓여 포근하고, 그들은 서로가 그저 고맙다.


나는 그랬을지도 모를 두 삶을 마주친 것이다.



느긋하게 7시가 넘어 기차역으로 왔지만 어김없이 예매한 열차는 지연됐고 어디 라인 강바닥에서 솟아올라왔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 내에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몇몇은 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있고, 손주인지 막 걸음마를 뗀 아기가 주변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재롱을 떨었다. 몰래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더니 아기는 입에 넣고 있던 손을 빼 당찬 옹알이와 함께 흔들어주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망울의 촉촉한 무해함과 침범벅된 손가락을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뿌- 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몰렸다. 독일은 추가금을 내야 지정석에 앉을 수 있는 시스템 탓에 짐이 많은 경우가 아니면 입석으로 타 빈자리에 앉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날은 마치 만원 지하철처럼 승객이 많은 탓에 자리에 앉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타고 문이 닫혀 출발하려 할 때쯤, 다시 문이 열리며 역무원이 다가와 손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치웠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잠시 뒤 휠체어를 탄 할머니 한 분이 기차 안으로 들어오셨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어나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자리로 가 손잡이를 잡았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일행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함께 떠들었다. “그걸로 되겠어? 먹을 거라도 주면서 고맙다고 해야지! 하하하!” 이런 일 때문에 생기는 열차 지연이라면 어느 정도는 감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사소한 불편함이 조금씩 모여 누군가의 일상이 될 수 있다면.


지친 다리로 서서 버틴 지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앞에서 누군가 한국말로 "저기 자리 앉으세요!" 하는 게 들렸다. 처음에는 나를 향한 말인지 잘 몰랐다. 짧은 머리에 덩치가 크고, 옷도 딱히 한국인처럼 입고 다니질 않아서 척보고 내 국적을 알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넬 뿔테 안경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지 않나. 다만 갑자기 들린 한국말이 신기해 책을 내려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내 앞사람이 나와 눈을 맞추며 재차 "저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이 확실했다. 고맙단 말과 함께 반대편 빈자리로 가 앉으려는데 옆자리에 있던 다른 외국인이 자기가 거기로 가 앉겠다면서 그냥 이 분 옆자리에 앉으라 했다. 아마 일행인 줄 알았나 보다.


옆자리에 앉아 내가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아, 들고 계시던 책 제목이 한국말이던데요?" 으이그, 멍청하긴.

아- 맞네요, 하며 각자 어디를 다녀왔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어디로 갈 건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유럽에서 새로운 한국인을 만나면 직업, 나이, MBTI보다 먼저 이런 여행 질문을 물어본다. 곧 뮌헨을 거쳐 베를린으로 떠난다는 그는 놀랍게도 나와 같은 시간-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놀랍게도 수원(!)에서 출발한 사람이었다. 새삼 세상 좁다는 걸 다시금 절감하며, 낯선 이에게도 친절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찾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9시가 다되었다. 대강 씻고 옷을 입어 밤공기를 마시러 나섰다. 유로스타를 지나고, 젊은이들이 노래를 틀고 춤추는 공원을 지나고, 뢰머 광장을 지나고, 프랑크푸르트 성당을 지났다. 성당 앞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가 독일 첫 생맥주를 시켰다. 돌이켜보니 첫 도시 프랑크푸르트의 마지막 밤이었다. 나름 기회를 준 이 도시는 내게 괜찮았었나. 도시를 자주 옮기게 되는 유럽 여행에서 매 도시마다 마지막 밤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곳이 싫지 않았고 그 사이 정도 많이 들었다. 벌써 이 거리가 익숙해져 지도 들여다보는 일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었다.


Paulaner am dom


식당은 <Paulaner am dom>. 바이에른 지역 맥주인 파울라우너 양조장의 맥주를 파는 곳이었다. 바이저(Weissbier, 밀맥주)와 필스너(Pilsner)를 한잔씩 시켜 들이켰다. 바이저의 상큼하고 부드러운 맛도 좋았으나 필스너의 씁쓸하면서 청량하고 묵직한 맛이 일품이었다. 원래 Paulaner는 밀맥주가 유명하다고 하던데, 이날은 어쩐지 필스너가 마음에 찰떡인 날이었을 테다.



집에 오니 열한 시가 다 되어있었다. 세수를 하고 누워 사진첩을 정리했다. 그래도 꽤 찍었다 생각했는데 모아보니 그렇게 많이 남진 않았다. 내 사진은 거의 없었다. 친구와 같이 왔으면 서로 몰래 많이 찍어줬겠지 - 하는 생각이 잠깐 들며, 내일 아침을 위해 휴대폰을 멀리 충전시켜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 외로운 와인밭을 잔뜩 걷고 돌아온 첫 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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