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얼큰한 파리의 시장

09.11 파리에서

by 이원장

지나온 공간 : 보쥬 광장, 바스티유 시장, 마레 지구


오전 10시, 숙소 옆 마레 지구 보쥬 광장의 벤치에 앉아 글을 쓴다. 날씨는 캐리어에 물방울 떨구던 어제 비구름과 달리 청명하기 그지없다. 하늘은 단색의 옅은 쪽빛만으로 메워진 캔버스이고 낭만을 찾는 여행객을 담은 비행기가 그리는 제트 구름만이 유일한 스케치선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 중 하나인 보쥬 공원은 정말 시민의 공간이었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 사각형 광장 주변을 여러 갤러리가 둘러싸고있고, 골동품 판매상들이 연도 미상의 그릇과 잔, 작자 미상의 유화를 진열해두고 있다. 웃옷을 벗고 광장 모서리를 따라 조깅하는 할아버지, 그 뒤로는 바게트 봉투를 왼팔짱에 끼고 베이지 맥코트를 걸친 채 시바견을 산책시키는 프랑스 여인.


네 부분으로 나뉜 잔디밭 한 구석에선 아이들이 바스켓에 물을 떠다 퍼 나르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배시시 웃으며 달리고, 바로 앞 잔디밭에 곱슬머리 여학생은 분수대를 한번씩 올려다보며 스케치를 하고 있다. 3단 분수대 제일 아랫단에 비둘기가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신다. 얼핏 어렸을 때 비둘기는 닭처럼 한 모금마다 고개를 들 필요 없이 빨대처럼 주욱주욱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읽은 책을 떠올린다.


떨어진 활엽을 주워 벤치에 묻은 빗물과 모래를 슥슥 닦고 앉았다. 글을 쓰다 다리가 간지러워 슬쩍 보니 아까 주운 나뭇잎에 붙어있던 검정 무당벌레다. 햇살 내리는 날 그늘 아래 벤치에서 굳이 굳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길게 늘여 적어보았다. 이게 내가 있고 싶던 파리니까.


오늘 아침에도 창밖 햇살을 알람 삼아 여유 있게 일어났다.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지만 않으면 따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8-9시쯤 깨게 된다. 주말에도,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호스텔에서 조식을 챙겨 먹기엔 최적인 바이오 리듬 아닐까. 9시에 친구를 깨우자 15분 뒤에 내려가자고 해서 그 틈에 아침 샤워를 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20계단쯤 되는 단을 세 번 내려가야 도착하는 지하 식당이었다.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답게 은은한 빛의 벽전등이 돌벽을 비췄다. 왠지 부르봉 왕가 시절엔 전등 대신 횃불이, 그 옆엔 철갑을 두른 경비병이 지키는 지하 감옥이었을 것만 느낌이었다. 따로 챙겨 보진 않았지만 <왕좌의 게임>에 나올 법한 용을 가두는 감옥이 이런 곳이었겠지.

중세 시대 수용자가 된 느낌

특별할 건 없었던 호텔 조식이었지만 요거트와 라떼, 유제품이 기억에 남는다. 옅게 굳어 처음엔 마치 푸딩이라 착각할 법한 요거트는 식감뿐 아니라 고소함, 당도도 훌륭했고 표면이 매끈하게 가라앉아있어 요플레 답지 않게 뚜껑에도 전혀 묻지 않았다. 대강 내려준 것 같은 라떼는 우유 자체가 워낙 신선하고 좋아 고소하고 그윽한 향이 매우 일품이었다. 무료 조식이어서가 아니라 국내에서도 저 정도 라떼는 5-6000원을 주고서라도 사 마실 용의가 들 정도로. 한국에 있을 땐 한 커피 가게에서 파는 ‘인생 라테’라는 메뉴가 고소하여 참 좋아했는데, 그것보다 한수위였다. 역시 음식은 뭐가 되었든 원재료의 힘이 가장 중요함을 느낀다.



이날은 친구 K와 오후 1시쯤 바스티유 시장으로 가 낮술을 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동안 보쥬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며 햇살을 잔뜩 받은 나무 아래서 글을 썼다. 신선한 굴과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마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불편한 공중화장실에서 어찌어찌 몸을 좀 비우고선 더 가벼워진 몸으로 친구와 합류해 시장으로 향했다.



몇 차례 길을 헤맨 끝에 바스티유 시장의 시작점을 찾아냈다. 식기, 기념품 등을 파는 잡화상들이 먼저 눈에 띄었지만 그곳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었다. 좀 걷다 보니 드디어 우리가 찾던 ‘안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Gambas라 적힌 회색빛 생새우, 해산물 뷔페처럼 쪄서 차게 보관한 주황색 새우, 길게 필렛을 떠놓은 광어와 기타 생선들. 그 옆으로는 요즘 한국에서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탄 납작복숭아와 과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포도와 복숭아의 향긋한 향이 어우러져 별일 안 하고 킁킁대기만 해도 즐거웠다. 옆 치즈 가게에는 서양인 특유의 암내와 치즈 냄새가 섞여 숨을 쉬기 답답할 정도로 코를 찔렀다.


치즈 가게마저 지나치니 드디어 정육점이었다. 생고기와 훈제 소시지를 위주로 파는 가게(Boucherie 부쉐리 / Chaircuiterie 사퀴테리)와 로스트 치킨/포크를 파는 가대(Rotisserie 호티세리)가 번갈아 나왔다. 아, 배고픈 나에게 기름지고 향긋한 고기 냄새라니! 지하철 역에서 델리만쥬 냄새를 맡게 되었을 때 풍기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확산성 좋은 그 향으로 인해 뇌에서부터 군침이 흘러나왔다.


지하철 델리만쥬와 바스티유 시장 로스트 치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는 차마 못 사고 지나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번뿐이라는 여행을 핑계로 얼마든지 사서 입에 넣을 것이란 점이다. 11유로를 내고 튼실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을 하나 골라 나왔다.



도무지 신뢰를 안 할 수가 없는 날것 그 자체의 느낌

이제 함께할 와인을 살 차례였다. 여러 종류의 와인을 세워두고 파는 제법 큰 와인샵들이 줄줄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이가 많이 빠진 할아버지가 펴둔, 작은 나무 테이블 상 하나만 펼쳐둔 가게였다. 피노누아 하나, 샤도네이 하나 - 레드와 화이트 한 종류 씩만 놓고 팔고 계셨는데,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큰 손으로 와인병을 꺼내 직접 스티커 라벨을 붙이고 계셨다. 가게 앞에 붙어 와인 밭과 착즙기를 배경으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 할아버지 사진은 마치 "이거 내가 농사 지어 만든 와인이야! 껄껄껄." 소탈한 웃음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 느낌이 사실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날것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할아버지의 웃음보다 더 생생한 즐거움은 없는 걸. 고를 것도 없는 그의 가내 수공업 와인 중 척 봐도 어린 피노누아 한 병을 저렴한 가격에 집어왔다.



역에서 시작하는 바스티유 시장 초입에서 4분의 3 정도 걸어오면 즉석에서 굴을 까 레몬을 올려 플레이팅 해주는 집이 하나 있다. 굴의 크기와 산지에 따라 한 접시에 9~18유로 까지 가격대가 다양했다. 우리는 여러 크기가 섞인 15유로 플래터를 골랐다. 가게 옆에는 노량진 수산 시장처럼 스탠딩 테이블이 붙어있어 방금 사 온 술과 음식을 펼치고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로스트 치킨과 피노누아 와인, 추가로 사 온 식빵을 곁들여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자꾸만 언급하게 되는 조르바가 또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 싣는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 육체에도 연료를 넣어줘야 해요, 두목!"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역


프랑스 석화를 생으로 몇 차례 먹어보니 내게는 좀 짜게 느껴졌고 바닷물을 약간 덜어내고 레몬즙을 한 두 방울 떨어트리자 제일 맛나게 느껴졌다. 시작으로 중간치의 굴을 먹었는데 한국에서 솥 째 쪄먹는 것에 비해 좀 덜 통통할지 언정 아주 향긋하고 신선했다. 이곳의 석화는 알이 잘고 갯내가 짙었다. 원래 석화를 생으로 먹을 때 굴 가장자리에 껴있는 물때를 꼭 제거하고 먹는 편인데, 프랑스의 굴은 애초에 물때가 거의 없어 그런 섬세한 손질까지 기대하기 어려운 시장에서도 나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진짜 안전한 지는 내일의 내 위장만이 알겠지만.


빵과 고기, 굴을 먹다 보니 어느새 와인 한 병을 다 비워 급하게 한 병을 더 공수하러 떠났다. 미소만 믿고 마신 피노누아가 기대 이상이라 다시 한번 그 할아버지 좌판대로 향했다. 달아오른 얼굴로 다가가 메르시와 쎄시봉, 봉주르를 섞어가며 이번에는 화이트 한 병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내게 울랄라-울랄라를 섞어가며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가슴으로 이해한 그의 언어는 대강 이러했다.


“어이 젊은이들 소풍 나와서 즐겁지? 이야, 참 재밌겠네. 화이트 와인 이 녀석이 사실 내 자랑거리야. 그런데 이 녀석을 가져갈 거야, 아님 바로 마실 거야? 바로 마신다고? 그러면 이 상태로는 안 돼. 저기 생선(Fish) 장사한테 가면 정리하다 남은 얼음이 많아. 같이 가서 봉투에 얼음 좀 달라고 해서 칠링(chilling)해서 먹자. 이 녀석은 그래야 맛있어.”


이것이 내가 흰 비닐봉지에 생선 비늘 섞인 얼음에 둘러싸인 샤도네이 한 병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이유다. 일부러 남겨놓은 특대 사이즈 굴을 발라 먹고 얼음 담긴 시장 봉투에서 뽑아낸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목에 들이부었다. 조르바를 닮은 내 친구는 옆에서 연신 중얼거렸다.


“이게 파리지, 이게 파리야!"


먹다 보니 한국에서 굴을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 앞에 있던 수산 시장에선 꼭 만원에 하프 쉘 열몇 개가 담긴 널찍한 스티로폼 접시를 팔았는데, 퇴근하여 한 번씩 들릴 쯤이면 칠, 팔천 원까지 떨이로 넘기고 정리하려는 시장 상인분들이 계셔서 한 접시 씩 집어오곤 했다.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할 때도 애용하는 술안주이기도 했다.


나는 알맹이를 먹고 남은 굴 껍데기를 샷잔 삼아 위스키 아드벡(Ardbeg)을 따라서 호록 마시는 것을 참 좋아했다. 싱글몰트는 향을 모아주는 잔에 마셔야 한다느니, 어설프게 마시다간 다 흘린다느니, 뭐가 중요한가. 아드벡은 그렇게 친구들과 마실 때 가장 맛있었다.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온다면 피트향 가득한 아드벡을 한 병 사 들고 와서 마셔야지.


모든 경험과 감정이란 것도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렇게 시장에서 낮술을 하며 시끌벅적한 바람과 발랄할 햇살을 번갈아 맞는 기분은 글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나마 만나서 말을 하면 손짓 발짓 표정으로 무언의 ‘무언가’가 그나마 전달될 텐데. 절정에 비슷한 순간은 글로 전달하기가 불가능하단 걸 새삼 느낀다. 알렉시스 조르바가 환희를 느낄 때 벌떡 일어나 춤을 춰대던 것은 이러한 이유였을까.



들뜬 몸으로 다시 보쥬 광장으로 걸어오니 아침보다 사람이 세 배는 많아 보였다. 잔디밭 사이 중앙 흙밭에서 웬 아이들이 열 명씩 편을 지어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가운데에서 심판을 보던 보쥬 어린이 운동회 개최자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였을까.


얼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서 찬찬히 숙소를 향해 걸어오는 길에 친구가 Merci(마레 지구에 있는 유명 감성 소품 가게)에서 자기 회사 사람들에게 줄 기념품을 좀 사가자고 했다. 친구보고 구경하고 오라고 하곤 나는 가게 앞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한참 기다리며 맥북을 두들기고 있는데 1미터 왼쪽에서 노숙자끼리 영문 모를 싸움을 벌였다. 사실 나는 큰 소리가 나는 것만 인지를 하고 무슨 일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나타난 친구가 툭툭 치며 ‘야, 너 자리 옮기는 게 좋겠는데’라고 하여 옆을 봤더니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몇 차례 고함과 완력 다툼 끝에 영역 싸움에서 이긴 듯한 노숙인 한 명이 자기 구역이 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지휘를 하듯 팔을 몇 차례 휘저었는데, 대충 “내 말이 맞아! 다들 저 자식이 갑자기 끼어드는 거 봤잖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옆 벤치에 앉아있던 나를 보더니만 "Asian is my friend"라고 하며 나에게 주먹 인사 (Fist high five)까지 청하기도 했다. 주먹을 마주쳐주긴 했지만 글쎄… 나는 그대를 내 친구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친구를 먼저 숙소로 보내고 나는 조금 더 밖에 있다 갈 요량으로 피카소 박물관 옆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공원에는 유독 한국 커플 여행객이 많았다.


벙거지 모자를 쓴 남자와 잎식물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여인 한 쌍이 걸어 들어왔다.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는 대뜸 멈추더니 쪼그려 앉아 꽃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것도 모른 채 살랑살랑 몇 걸음을 걷다가 문득 뒤따라 오지 않는 남자의 인기척을 느꼈나 보다. 그녀도 멈춰 서 뒤를 돌아보고서야 꽃구경에 정신 팔린 남자를 확인했다. 여자는 뒤 쪽으로 다가가더니, 꽃을 바라보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몰래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남자는 커다래진 눈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꽃을 보고, 여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배시시 올린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름도 나이도 모를 그들의 연애가 참 예뻐 보였다. 옆 벤치에 앉은 둘은 다정히 함께 셀카를 찍었다.



하루 종일 와인 두 병만 마신 것 같지만 사실 중간중간 생맥주와 병맥도 몇 잔씩 마셨다. 잔뜩 졸릴 만큼 알코올이 올라와버린 K는 숙소로 들어와 때 이른 저녁부터 잠을 잤고, 나도 공원에서 숙소로 돌아와 로비에서 글을 좀 쓰다 일찍 잠들어버렸다. 3인 1실의 방에서 나머지 한 명은 파리로 놀러 온 부지런한 독일 청년이었다. 대낮부터 술 마시고 해가 지자마자 침대에 뻗어있는 두 한국 청년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햇살보다 얼큰하게 사람 냄새 물씬 풍겼던 하루, 하늘의 누런빛이 다 가시지 않은 이른 저녁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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