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4 몽생미셸에서
지나온 공간 : 투어 버스, 에트르타(Etretat), 옹플레르(Honfleur)의 리커샵과 성당, 몽생미쉘(Mont Saint Michelle)
지금 시각은 이른 오전 7시. 어째 자꾸 모든 글을 아침 기상 시간으로 시작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또 그만한 도입부가 생각나지 않아 꾸준히 쓰게 된다. ‘새벽 개선문 도로를 회전하니, 낭만의 고장이었다’ - 설국 도입부라도 빌려야 할까. 오늘 기상은 5시였다. 어제 마지막에 마신 맥주 한잔과 그전에 물처럼 들이부은 와인을 조금 후회하며, 잠든 몸을 깨울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 뇌를 알람으로 두드리며 이번 여행 중 가장 이른 기상을 했다.
모든 여행에서 여유를 부르짖는 내가 새벽잠을 떨쳐낸 건 지금 타고 있는 06시 30분 개선문 출발 몽생미셸 투어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파리 근교 여행’이라고 치면 나오는 지역이긴 하지만, 막상 지도를 찍어보면 서울-부산 거리보다 먼 거리를 다녀오는 코스이다. 여유롭게 차를 렌트해 다녀올까 하다가도 고된 운전 피로에 대한 두려움이 지레 엄습하기 때문에, 운전에 능숙한 사람들도 시원하게 포기하고 편하게 투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파리 일정 내내 한 번 가야지, 가야지하며 기회만 엿보다 출발 전날 신청한 나와 내 친구도 물론 그중 한 사람이고.
몽생 미쉘 한인 투어는 40인승 규모의 버스를 대절해 가이드와 기사님을 동행해 이루어진다. 사실 몽생 미셸과 파리는 왕복 800km로 몽생 미셸 하나만을 바라보고 가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그래서 관광 회사에서는 보통 가는 길에 작은 마을을 몇 개 더 들리는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청인을 모집한다. 모네가 말년을 보냈다는 지베르니를 가기도 하고, 작은 항구 관광지 옹플레르를 들리기도 한다. 우리 투어는 코끼리 모양 절벽이 유명한 에트르타(Etretat)와 사과주가 유명한 작은 항구 마을 옹플레르(Honfleur),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두 해안 마을을 들리기로 했다. 투어를 시작할 때 개인별로 수신기와 이어폰을 나눠주어, 버스에서 이동하는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게 가이드 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바다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주저 않고 에트르타를 보여주겠습니다.”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알퐁스 카는 에트르타를 극찬하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고, 이 한 줄이 조용한 해안가 에트르타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센 뤼팽(괴도 루팡)을 창조한 모리스 르블랑이 머물고 사랑한 마을이기도 하며, 모네도 이곳에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희고 긴 자갈 해안과 그 양 옆에 위치한 코끼리 바위가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사진을 찍는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
프랑스를 두 번 와봤긴 하지만 전부 파리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취가 프랑스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낯설고도 편안했다. 길을 주욱 걸어 내려가며 가이드 님의 설명을 듣고 주변 주택들을 구경했다. 십오 분쯤 걸었을까, 코끼리 모양 절벽이 보이는 자갈 해안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린 탓에 생각만큼 아름답게 보이진 않았다. 가이드 님은 원래 노르망디 지역이 워낙 비바람이 많고 날씨가 안 좋은 지역이라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는 하긴 했다. 다만 나는 처음 바다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제주도를 데려갈 것 같다.
어쨌거나 한 달 만에 보는 바다였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바다는 바스티유 시장에서 석화로만 간접 체험했지 이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아본 적은 없었다. 바람을 느끼고 실려온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절벽을 걸었다. 에트르타의 바람은 짙푸른 바다의 깊고 짠 향보다 에메랄드 빛 바다의 청량한 향을 많이 실어왔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길게 자라 바람에 몸을 맡겨 뉘인 풀을 밟으며 점차 위로 올랐다.
벤치에 앉아 친구와 투어에서 받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새벽, 서둘러 준비를 마친 나와 달리 K는 출발 예정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일어났는데도 느긋하게 자기 할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몇 차례나 내가 미리 깨웠지만 '5분만 더'를 줄줄이 사탕처럼 외치고 나서. 지각 사유도 별 것 없었다. 그는 전날 자정 넘어서까지 과음을 했다.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에 조급함까지 끼어버린 나는 잔뜩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날 새벽부터 그에게 성질을 부렸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 함께 앉아 대화를 하면서, 숙취에 시달리며 외출 준비를 하는 와중에 내 심술에 사과도 해야만 했던 그도 그대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소설 속 '조르바'라는 인물은 문명의 약속을 많이 벗어난 사람이다. 결혼을 미친 짓이라 정의 내리고 평생을 떠돌아다녔다. 출장을 보내놨더니 여자 때문에 자금을 탕진해버리고 돌아왔고, 함께 하던 사업이 무너졌을 땐 대뜸 바닷가에서 춤을 춰댔던 그다. K는 조르바를 닮아있다. 그의 번뜩이는 자유와 시선이 찬란하게 느껴지지만 주변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길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라면 더더욱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니 일곱, 여덟 번은 읽었을 <그리스인 조르바>가 새롭게 읽힌다. 한없이 자유로운 알렉시스 조르바보다 그런 그를 받아주고 자유를 지켜준 화자가 진정 대단한 인물로 느껴진다. 나는 아직 그만한 그릇이 못 되는 것 같다. 한두 번, 두세 번 참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는 있어도 반복되는 자극에는 결국 예민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또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지속적인 관계일수록 서로를 조심히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깨달았다.
한 시간 정도를 가이드 님의 라디오를 들으며 달려 금세 옹플레르에 버스가 정차했다. 짐을 챙기고 내리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왼팔 오금과 오른팔 삼두 쪽에 베드버그에 물린 흔적을 잔뜩 발견한 것이다. 베드버그와 모기 물린 곳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베드버그는 기어 다니면서 물기 때문에 물린 자국이 줄줄이 남겨져 있으며, 침대와 접촉할만한 팔, 다리, 목 위주로 물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9월 중순 파리에는 모기가 애초에 거의 없기 때문에, 상완-오금-전완 부위로 줄줄이 4군데가 선분으로 이어지는 이 자국은 베드버그가 원인임에 분명했다. 증거 사진을 찍고 이전 숙소에 메일을 보내며 정신없이 뒤처리를 하다 깜빡하고 오디오 가이드 수신기를 놓고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친구와 같이 일행들로부터 떨어져 맨 귀로 자유로이 둘러보았다. 오히려 이게 더 좋긴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인구나 규모에 비해 갤러리가 많았던 바닷가 마을, 옹플레르. 항구에 작은 배들이 정박해있는 마을 초입의 회전목마에서 시작해 성당이 있는 마을 중앙 주변까지 눈에 띈 것은 시드르(Cider), 깔바도스(Calvados) 등 사과를 이용한 주류를 취급하는 리커샵과 현대 회화와 조각이 잔뜩 전시된 작은 갤러리들이었다. 가이드 분의 설명에 따르면 꽤나 값이 나가는 미술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에 진행한 투어에서는 약 2억 5천만 원을 지불하고 작품을 사간 한국인도 있었다고 하는데,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몇 군데 갤러리를 둘러보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뱅크시의 풍선 날리는 소녀를 패러디한 작품, 키스 해링/미키마우스를 이용한 상업주의 작품이 보였고, 마레 지구의 갤러리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한 모자이크 작품도 있었다. 아마 복제품이거나,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었지 싶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유리 찬장에 숙성한 증류주를 전시한 리커샵이 보였다. 아마 지역 특산물인 깔바도스 종류일 테다. ‘왜 길가다 술병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느냐’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며, 방앗간을 발견한 한 마리 참새처럼 벌컥 가게문을 열었다. 봉쥬르!
와인은 포도로 만든다. 포도 품종마다 따뜻한 지중해 기후, 서늘한 분지 지형 등 최적의 재배 조건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꾸준하게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이다. 이것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심지어 독일 서남부까지도 와인을 생산하고 각자 유명한 지역이 있는 반면에 영국에는 와인 산업이 전무한 이유이기도 하다.
몽생미셸로 향하는 서북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또한 마찬가지로 흐린 먹구름 낀 하늘이 기본인 지역이라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포도를 활용한 술인 와인과 코냑이 없는 대신, 사과를 이용해 만든 발포주 시드르(cidre)와 증류주 깔바도스(Calvados, 사과를 이용해 만든 브랜디)가 발달해있다.
리커샵에 들어가자 인심 좋은 인상의 여인이 우릴 반겼다. 가게 사장님이 영어를 잘 못하기도 했고, 무턱대고 영어를 쓰면 실례라는 가이드 님의 말이 생각나 최대한 프랑스어를 찾아가며 의사소통을 했다. 시음이 가능하다고 하여 저숙성 깔바도스부터 25년 숙성한 깔바도스까지 차례로 조금씩 마셔보았다. 전반적으로 깔바도스는 위스키에 비해 묵직하고 복잡한 질감은 덜했지만, 꼬냑보다도 화사하고 가벼워 식전주로 활용하고 싶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저숙성 깔바도스는 부드럽기보다 타격감이 있었고, 사과의 과실향이 여실히 묻어있었다. 25년 고숙성의 경우 오크향이 짙게 배어 있고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향이 났지만 어린 깔바도스에 비해 상큼함이 덜했다.
“그렇지, 머리로만 이러니 저러니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이런저런 설명은 필요 없어. 가격도 상관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싱글 몰트는 햇수가 오래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거든. 증류를 해서 더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덜해지는 것도 있어. 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아.”
-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무라카미 하루키
마음을 넓게 먹은 사람의 혀라면 햇수에 구애받기보다 각자의 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다. 시드르 시음이 가능하냐고 묻자 냉장고에서 시원한 새 병을 따서 따라 주셨는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기분 좋은 친절함은 구매를 부른다. 시음했던 것 중 마음에 들었던 시드르를 하나 사려고 한 병(une bouteille)을 달라고 프랑스어로 말하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앙’이 아니라 ‘엉’으로 발음해야 한다며 우리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손을 휘젓고 앙앙엉엉 대며 프랑스어를 써보려는 한국 청년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모양이다. 옆에 술을 사러 오신 프랑스 할아버지들도 우리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친구와 합동으로 메르시, 오 부아(Merci, Au revoir!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를 외치며 나가니 안에 있는 손님들도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작은 광장으로 걸어 돌아오니 마을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 있어 들어가 잠시 앉아 있었다. K가 자기는 성당에 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말에 그는 답했다.
“교회는 소원을 빌러 가는 곳 같은데 성당은 나를 고백하러 가는 기분이야.”
옹플레르 산책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버스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시작해 몽생미셸에 도착하는 길은 2시간 30분이 걸리는, 한 호흡으로 쉼 없이 달리기에는 꽤나 긴 여정이었다. 보통은 불편한 선잠을 자다 깨다 반복하며 몽롱하게 보냈을 법한 긴 시간. 우리는 미리 나눠준 수신기와 이어폰을 끼고서 가이드 님이 진행하는 ‘작은 라디오’를 들으며 갔다.
그전에 오는 길에도 중간중간 정차하며 생긴 짤막한 주행시간이 몇 번 있긴 했다. 그때마다 가이드 님은 다음 갈 장소에 대한 재밌는 설명으로 시간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지막 3시간 가까운 버스 여정을 한 개인의 수다로만 채우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번 라디오는 오픈 카톡방 링크를 하나 올려 사연과 질문, 신청곡을 받아 이를 읽고 대답해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연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파리에서 위험한 지역이 있을까요, 첫 유럽 여행인데 신나요, 파리는 어떤 식당이 맛있을까요, 오늘 버스에 예쁜 언니들 너무 많아요 등등, 각양각색의 메시지를 읽고 대답해주었다. 덕분에 자칫 지루, 피곤이란 단어가 떠다녔을 버스의 시공간이 차창 밖 풍경에 끼얹어진 사연과 노래로 산뜻해졌다.
몇 개의 사연과 질문이 지나고, 몽생미셸로 향하는 버스 우리만 듣고 있는 작은 라디오의 첫 곡이 흘러나왔다. 볼빨간 사춘기, 여행.
전주가 흘러나오자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던 승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돌려 자기 쪽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글을 쓰다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빨간 열매가 열린 내 키만한 나무가 짧은 풀로 덮인 능선 속에 올림픽 공원 나홀로나무처럼 박혀있고, 들판에 풀어져 한눈에도 건강한 근육을 갖춘 갈색 소들은 고속도로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진 목장에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흐린 것이 일상이라는 노르망디의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갠 채 푸르렀다. 구름은 하얀 결들이 뭉게뭉게 뭉쳐, 비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운 파랑을 채워주기 위한 섬처럼 떠다녔다.
우리는 스침을 바라보는 망부석처럼 앉아 그렇게 노르망디 A13 고속도로를 달렸다. 버스가 멈추고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와도 기다렸다는 듯 일어설 사람은 없었을 테다.
몽생미셸에 도착하자 사람이 정말 많았다. 바다와 갯벌 한가운데 우뚝 솟은 수도원은 아직도 수도사들이 머무르는 공간이라 했는데 이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수행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을 했다. 가이드 님의 설명을 들으며 내부를 구경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명의 프랑스인 가이드가 한 명 더 있었다. 몽생미셸에서는 해당 과정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딴 사람이 아니면 내부에서 가이드를 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한국인 가이드가 내부에서 오디오 장치를 이용해 설명을 하면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다만 한국인 가이드가 말하는 것이 허용될 때도 있는데, 바로 정식 가이드의 말을 통역해줄 때다. 사실 우리 투어 내내 프랑스인 가이드는 별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다니기만 했지만, 한국인 가이드는 그의 말을 통역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형식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몽생미셸은 그 야경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내부를 둘러볼 때는 특별한 감정이 들진 않았다. 한두 시간 정도 설명을 듣고 내려와 다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내 친구 K, 같은 한인 민박에서 온 같은 나이 또래 친구 둘, 폴란드로 출장을 간 남편을 기다릴 겸 혼자 여행을 다니는 두 살 누님 한 분 이렇게 총 다섯이서 저녁을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눴다. 알고 보니 내 친구의 회사 동료와 두 살 누님께서 서로 아는 사이여서 세상 참 좁단 이야기도 새삼스럽게 나눴다.
몽생미셸 자체도 괜찮았지만 섬에 위치한 수도원을 밖과 연결하는 모래톱 위 제방 다리를 걷는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육지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와 K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천천히 갯내음을 맡으며 걸어갔다. 항상 둘 혹은 그 이상으로 함께 다니게 되는 유럽 여행에서 오랜만에 드넓은 바다 위를 혼자 걸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니, 매 걸음마다 잡다한 생각을 헨젤과 그레텔처럼 조금씩 떼어내는 시간이라 해야겠다. 몸이 피로한 것도,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도 조금씩 바닷바람에 씻겨져 갔다.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고서 돌아가야 하는 길에는 여태껏 참아줬던 흐린 노르망디의 하늘이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로 일찍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괜히 인기척 없는 먼 쪽의 수풀을 보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일차원적으로 무턱대고 생각난 <비처럼 음악처럼>을 혼자 흥얼거리며 인적 드문 길을 걸었다.
버스로 돌아와 다시 파리로 향하는 길은 한 번의 휴게소 외에는 쉼 없이 달리는 네 시간 반짜리 긴 여정이었다. 물론 쉼 없이 달리는 건 우리가 아닌 버스 차체와 기사님이었지만, 놀러다닌 우리도 모두 지쳐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라디오도 휴식을 취했다. 글을 쓰고, 하루를 되짚고,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채 새벽 세시쯤이 되어서야 출발했던 개선문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아마 다시 못 볼 짧은 인연들에게 오늘 하루 고마웠단 인사를 했다. 낯선 곳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따뜻한 모습이 참 좋다.
옹플뢰르에서 몽생미셸로 가는 긴 여정을 막 시작했을 때, 나는 오디오 사연으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적어 보냈다. 가수 이승윤 씨의 노래 ‘달이 참 예쁘다고’가 배경으로 깔리며 가이드 님이 시낭송을 시작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
긴 여행에 하루쯤은 있어줘야 하는 알차고도 피로한 날, 몽생미셸을 거쳐 새벽 네시 파리에서.
[제 15화 산책하는 공동묘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