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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01. 2020

피사 - 모두가 슈퍼맨이 되는 곳

방구석 드로잉 여행 12

  출장을 다니다 보면 운 좋게도 주말이 끼어 있는 경우가 있다. 모처럼의 자유시간이니 호텔방에서 밀린 업무를 하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게다가 여기는 이태리가 아니던가. 어디를 가볼까 하다가 갈릴레오가 중력가속도 실험을 했었다고 알려진 피사를 가보기로 한다. 실제로 그런 실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이태리 사람들이 이것 저것 가져다 붙이는 걸 좋아하는 지라, 사탑과 갈릴레오가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후대에 조작된 느낌이 농후하다.


  토요일 늦은 아침이라서 그런지 기차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다. 유럽의 기차는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어떤 때는 수다쟁이 아저씨가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어야 할 때도 있고 운이 좋은 날은 예쁜 아가씨를 쳐다보면서 가야 할 때도 있다.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수다쟁이 아저씨 대신 통통하고 귀여운 볼을 가진 아가씨가 앞에 있다.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자세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태리 사람은 아닌 듯하여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니 미국에서 교환학생 과정으로 이태리에 왔단다. 주말이기도 하여 피사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길이란다.


  미국과는 다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더라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원래 토스카나는 그런 곳이다. 사람을 잡아끄는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럼 빨랑 이태리 남자를 하나 꼬드겨서 눌러 앉으라고 하니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까르르 웃는다.


  게다가 스페인어와 이태리어는 많이 다르지 않아서 언어장벽에 대한 문제없이 금방 꼬드길 수 있다고 오히려 한 수 더 뜬다. 엄마가 스페인계라서 자기에겐 스페인어가 모국어(엄마 언어)라고 한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매혹적인 피부와 눈동자를 가지게 된 것이구나 하고 칭찬을 해주니 너무 좋아한다.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방인과 같이 가고 있으니 여행하는 기분이 제대로 난다. 친구 집으로 바로 가기 전에 피사의 사탑을 같이 가보면 어떻겠냐고 하니 원래 자기도 그럴 계획이었다며 마침 잘 되었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다.  


  피사의 사탑이 유명하긴 하지만 이태리 관광을 하러 오셔서 일부러 피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가시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너무 유명하고 놀이동산 같은 곳에 가면 모조품도 많아서 안 봐도 꼭 본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곳이라서 그럴까. 실제로 피사라는 동네에 볼거리라곤 초록의 들판에 기울어진 사탑과 그 옆의 성당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구글에 PISA라고 검색해보면 OECD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이라는 결과가 보일 정도이다. 이태리 사람들조차 사탑 외엔 볼 것이 없다고 가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여행지를 소개하면서 가지 말라고 하니 좀 이상하다)


  이렇게 홀대받고 있는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피사는 한때 지중해를 주름잡던 해양 도시국가였다. 지금도 이탈리아 해군은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의 국가문장을 섞어 놓은 깃발을 사용하고 있다. 바다와 인접해 있던 이 네 개 국가의 해군은 잘 훈련된 정식 군대이긴 했지만 때로는 용병으로 때로는 해적질로 명성이 높았다. 그 당시엔 해적과 해군의 차이는 뭐랄까? 깻잎 한 장 차이 정도라고 해둘까. 해적질로 유명해지면 함대 사령관으로 스카웃되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괴멸시킨 영국의 드레이크 사령관도 유명한 해적출신이다.                



< 이태리 해군 깃발 그림 >     


  피사에 가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넘어져 가는 피사를 받치고 있는 모습, 아이스크림콘에 사탑을 올려놓고 한 입 베어 무는 모습, 발로 걷어차는 모습,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사진 속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그녀도 갖가지 포즈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 특유의 환한 미소로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진 듯하다. 내가 보기엔 통통한 펭귄이 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사진을 찍어주면서도 한참을 웃었다.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이제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뒤뚱거리는 펭귄이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차오, 해브 어 굳 타임'을 외치고 그녀는 원래 계획했던 그녀의 시간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간다. 나도 다시 여행자가 되어 천천히 발걸음을 되돌려 원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기울어진 탑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기적의 들판 Campo dei Miracoli'이다.


  기울어진 사탑을 보면서 피사에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영화를 뒤로하고 점점 기울어져 가는 도시와 사탑. 언젠가 사탑이 그 수명을 다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마저 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지겠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아쉽고 아련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탑은 굉장히 오래 갈 것이다. 잠깐 상상을 해본다.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울기 시작한 탑을 두고 기술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겠지. 이태리 사람들의 특성상 쉽게 결론을 내지 않고 무수한 말들이 오고 간 후에 괜찮을 것 같으니 계속 진행하자로 되었을 거다. 기울어진 채로 공사를 하다니 파격이었지만 참 알 수가 없는 것이 세상일이다.


  이 파격으로 인해 기울어진 탑이 유명해졌으니 말이다. 우리 인생하고도 비슷한 것 같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해보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곳도 가보고 조금의 파격이 훨씬 더 인생을 다채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인생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변에 친구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일상의 단조로움 대신 조금의 파격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기울어졌지만 수 백 년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피사의 사탑을 보면서 나도 끄떡없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말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아이가 유모차를 끌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유모차안에 누가 있나 싶어 힐끗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다. 아마도 아이의 유모차인 듯하다. 엄마 아빠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 알 수 는 없지만 꼬마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해서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있는 눈치이다.


  그래 아이들이 가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릴 때가 있지. 딸아이도 자기가 직접 유모차를 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밀고 다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유모차에 올라타고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어 버리곤 했다. 어이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엄마 아빠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본다.


  아이는 나중에  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 잠재 기억 저편에 남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한 사람으로 커갈  있기를. 내가 딸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소망했던 것을  아이에게도 소망해본다. 차오, 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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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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