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 8월 개봉 신작, 성장, 다양성, 퀴어 영화 추천]
개봉일 : 2020.08.13. (한국 기준)
감독 : 셀린 시아마
출연 : 아델 에넬, 폴린 아콰르, 루이즈 블리쉬르, 크리스텔 바라스
물 위로 떠오르는 불완전한 진주들
<워터 릴리스>는 올해 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이름을 알린 셀린 시아마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후, ‘우리가 뒤늦게 발견한 반짝이는 감독’이라는 호칭을 얻으며 많은 한국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관객들의 사랑에 힘입어 이후 5월엔 <톰보이>가 개봉했고, 첫 장편 연출작 <워터 릴리스>가 연이어 국내에서 개봉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워터 릴리스에선 다양성을 중심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설프고 여린 소녀의 욕망과 사랑을 담아냈다. <워터 릴리스>의 원제목은 <La Naissance Des Pieuvres>로 ‘문어의 탄생’이라는 뜻이다. 문어는 집념이 강한,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인다. <워터 릴리스>의 주인공인 세 명의 소녀들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다. 소녀들이 출렁이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언뜻 내비치는 욕망의 감정들이 이 영화 속에 내밀하게 담겨있다.
화려하고 강렬한 느낌의 영화는 아니지만, 잔잔한 일렁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금씩 깊어지고, 또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소녀의 감정을 가까이서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너한테 난 뭐야?”
싱크로나이즈드 선수 ‘플로리안’을 본 순간 ‘마리’는 덜컥 사랑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플로리안’은 모든 남성들의 선망을 받고, 남자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플로리안’의 모든 것이 알고 싶고, 갖고 싶은 ‘마리’. 한편, ‘마리’의 절친 ‘안나’는 수영부 남학생 ‘프랑수아’와 첫 키스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수영복, 강렬하고 진한 화장, 완벽하게 맞춰진 안무. 첨벙이는 물밑에서 끊임없이 휘적이고 있는 다리들. 마리는 안나를 보기 위해 방문한 수영장에서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수중발레 선수 플로리안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회갈색 눈동자와 깡마른 몸. 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은 인상을 가진 소녀 ‘마리’는 갑작스레 사랑이라는 감정을 맞이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마리와 우정을 유지했던 친구 ‘안나’는 수중발레 선수다. 친구들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큰 키를 자랑하는 안나는 자신의 몸에 콤플렉스가 있는 듯 보인다. 경기를 마치고 분주히 옷을 갈아입는 친구들 사이, 안나는 커다란 타월을 두른 채 앉아있다. “수영복만 마르면 갈 거야.”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던 소녀는 친구들이 다 사라진 후에야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마리에게 달려간다. 뚱뚱한 몸이 콤플렉스인 소녀 안나와 너무 마른 몸이 콤플렉스인 소녀 마리. 두 소녀는 번갈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함께 집으로 향한다.
플로리안은 수중발레팀의 주장이자 여러 소문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다. 남자아이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다는 소문, 코치님과 그러한 사이라는 소문까지. 플로리안의 미소는 없던 마음까지 새롭게 만들어 낼 만큼 묘하고 매력적이다. 마리는 플로리안의 묘한 매력에 이끌리게 된다. 플로리안을 처음 만난 날 저녁, 욕조 안에서 수중발레 선수들의 발장구를 따라 해본다.
마리는 플로리안을 따라 처음으로 수영장에 간다. 마리 역시 안나처럼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며 플로리안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는다. 플로리안은 수영장 밖에 앉아있는 마리에게 “물속이 더 잘 보여”라고 말하며 마리를 수영장 안으로 이끈다. 마리는 처음으로 수중 발레 선수들의 다리를 보게 된다. 일사불란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들. 마치 하늘에 떠있는 듯, 부력이 존재하지 않는 듯 힘차게 움직이는 소녀들의 몸에서 그간의 연습과 노력이 묻어 나온다. 착착 맞아떨어지는 소녀들의 움직임 속, 마리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우리 닮았어
마리와 플로리안의 관계는 일방적인 형태로 시작된다. 플로리안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마리를 이용한다. 마리는 플로리안의 경기 일정을 함께하고, 머리를 정리해준다. 플로리안은 마리와 함께 가기 위해 사촌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메달을 마리에게 걸어주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진 않는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관계가 지속되던 중, 말없이 플로리안을 기다리던 마리가 “이젠 안 기다릴 거야.”라며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표현한다. 그 순간, 처음으로 플로리안이 마리를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 자신과 같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마리가 부럽다는 진심. 마음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플로리안과 마리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다른 듯, 닮은 두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침대에 함께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마음을 털어놓은 플로리안과 마리가 가까워지는 사이, 마리의 또 다른 친구 안나는 마리에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매일같이 안나가 드나들던 마리의 집 마당의 울타리에 플로리안이 드나들고, 안나의 짝사랑 상대 프랑수아는 플로리안을 좋아한다. 안나는 용기를 내서 프랑수아에게 목걸이를 선물하지만, 프랑수아는 그 목걸이를 플로리안에게 선물하고 플로리안은 자신의 목걸이를 마리에게 준다. 돌고 도는 마음속, 안나를 향한 마음은 없었다. 영화의 초반부, 안나는 파티에서 프랑수아와 키스를 하려고 했으나, 플로리안과 키스를 하는 프랑수아의 모습을 보고 커튼 뒤로 숨어버린다. 타월로 자신의 몸을 숨기듯 완전히 몸을 숨긴 안나의 모습이 쓸쓸하고 연약해 보인다. 반대로 마리는 플로리안을 처음 만난 날 저녁, 샤워 커튼 뒤에서 목욕을 하다가 욕조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얼굴 반쪽을 드러낸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커튼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마음을 숨기는 것, 커튼 밖으로 몸을 드러내는 것은 욕망과 마음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마리는 플로리안과 시간을 보내며 안나와의 관계에 소홀해진다. 마리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자신의 처음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마리는 플로리안의 손을 뿌리쳤지만, 유리창 너머에 찍혀있는 플로리안의 입술 자국에 자신의 입술을 대며 플로리안의 제안을 다시 생각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플로리안과는 너무도 다른, 여전히 해피밀 세트를 모으는 친구 안나에게 “네가 너무 지겨워”라며 절교를 선언한다. 푸른빛의 수영복을 입은 안나를 건너편에 두고, 붉은빛의 수영복을 입은 마리와 플로리안이 지나간다. 두 소녀는 한 샤워기 아래서 웃음을 나눈다.
프랑수아가 플로리안의 집에 간 저녁, 안나는 자신의 속옷을 벗어 프랑수아 집 앞 마당에 묻어놓는다. 자신의 처음이 프랑수아였으면 하는 안나의 진한 바람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그날 밤 프랑수아가 안나의 집에 찾아온다. 안나를 찾아온 이유는 ‘플로리안과의 관계를 거절당했기 때문’이었지만 안나는 프랑수아를 받아들인다. 안나는 사랑과 진심, 키스 없이 프랑수아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다음날, 마리에게 찾아가 우리는 함께 있어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며 다시 한번 우정을 확인한다. 안나는 다시 자신을 찾는 프랑수아에게 침을 뱉어주고, 파티장을 나가자며 마리를 찾는다. 마리는 플로리안이 자신을 기다린다며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안나는 다른 남학생과 이야기하는 플로리안의 모습을 보며 마리에게 “너를 기다리는 것 같아?”라고 묻는다. 마리는 안나의 말을 듣지 않고, 플로리안의 옆으로 향한다.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입을 맞추고 “이제 알았지? 그렇게 어렵지 않지?”라며 가볍게 질문을 던지고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보며 립스틱 자국을 지운다. 플로리안은 이상한 놈이 꼬이면 전처럼 구하러 와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파티장으로 돌아가고, 마리는 플로리안의 입술자국을 지우지 못한 상태로 수영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시작됐던 장소인 수영장의 물로 남은 입술자국을 씻는다. 뒤따라 수영장에 들어온 안나와 마리는 물 위에 누워 얼굴을 맞댄다.
두 소녀는 사랑을 경험하고, 실수를 맛본다. 마리는 첫사랑을 바랐고, 안나는 첫 키스를 바랐고, 플로리안은 첫 관계를 바랐다. 프랑수아를 좋아했던 안나는 진심이 없는 첫 경험을 했지만, 첫 키스는 아직 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위로한다. 마리는 좋아하는 플로리안과 첫 키스를 하고, 플로리안의 첫 관계 상대가 되었지만 플로리안의 첫 키스는 마리가 아니었다. 바라던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욕망의 감정을 좇던 두 소녀는 잠시 서로의 존재를 멀리했지만 욕망이 시작되었던 장소 수영장으로 돌아와 다시 서로의 손을 잡는다.
소녀들의 힘찬 발길질에 수영장 안에 담긴 물이 끝없이 출렁인다. 소녀들은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수영복을 입는다. 수면 위로 보이는 소녀들의 모습과 표정은 완벽하고 화려하지만, 수면 아래선 끝없이 움직이는 다리와 숨을 참기 위해 구겨진 표정을 볼 수 있다. <워터 릴리스>는 수면 아래에 있는 소녀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가감 없이 욕망을 드러내고, 실수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포장되지 않은 사랑의 민낯이 출렁이는 수면 위로 반사된다. 그리고 그 수면 위로 완벽하진 않지만 반짝이는 진주 같은 소녀들의 욕망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