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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Sep 03. 2020

내 별명이 재알디(JRD)가 된 사연 (하)

23년 밖에 안 쓴 몸인데 A/S 안 될까요 (3)

    입원은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은 아닐 테지. 태어나자마자 한 번, 신생아실에 입원했을 테고 그다음엔 유치원생 때 한 번, 어딘가 아파서 입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의 경험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이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한 입원이었다. 


    그렇게 입원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력을 보면 알 수 있는 게,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나는 줄곧 건강하기만 했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감기라든가 가끔 날뛰다 넘어지거나 하는 사고가 아니고는 병원에 갈 일도 거의 없었다. 나는 생전 코피 한 번 쏟은 적 없는 튼튼한 몸을 자랑삼아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코 파다 피난 건 논외로 치자)


    그러므로 '진짜' '종합병원' '병실'에 '입원'을 한다는 사실은 내겐 제법 생경하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난 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침울해 있는 와중에도 사실 조금은 흥미진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보라색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액과 진통제(모르핀이었던 것 같다)를 맞으며 누워있으려니 영락없는 환자 꼴이었다. 얼마 안 있다가 점심밥이 나왔다. 병원밥은 처음이었다. 자자한 악명대로 맛이 없더라. 게다가 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는 처지였으니 밥은 몇 술 뜨지 못하고 남겼다. 엉엉- 사람이 먹을 걸 제대로 못 먹으니 그제야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운 건 아니다. 그게 울 일은 아니니까. 


    입원을 하고 한두 시간쯤 흐르니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없고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친구들에게 입원 소식을 알렸다. 친구들은 처음엔 좀 걱정하는 시늉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턴 내가 쓰러지는 순간 알몸이었다는 점, 고작 재채기 한 번으로 허리를 삐었다는 점 등 사소한 디테일들을 들어 놀리기 시작했다. 참 좋은 친구들. 


    그러는 와중에 친구 중 하나가 내 프로필을 'JRD'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저장했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재.알.디.' 즉 '재채기하다가 알몸으로 디스크 터진 애'라는 뜻이란다. 그렇게 JRD라는 새로운 별명이 탄생했다. 별명이라기엔 무색하게 딱히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 순간에 날 그렇게 부르기로 결심한 친구의 마음씨가 사악하고 어이없어서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 시간이 흘렀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약효가 들어서 허리 통증이 덜해졌다. 어정쩡하게나마 앉는 것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할 때는 여전히 부축이 필요했지만 좀 살만해졌던 것이다. 4인실이었지만 입원한 환자는 둘 뿐이었다. 나 말고 아주머니가 한 분 더 계셨다. 얼마나 오래 입원해 계시는 건지는 모르지만 한시가 머다 하고 면회객이 들락였다. 


    한 번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일행인지, 목사를 대동한 대여섯의 면회객들이 와선 침상 주변에서 북적였다. 그러다가 별안간 시작한 찬송가 메들리. 미션스쿨을 졸업한 내게 익숙한 찬양이 간혹 섞여있었다. 아니 근데 왜 같이 쓰는 병실에서 별안간 ccm콘서트냐고요.. 그럴 거면 나도 내 친구들 불러서 브라운아이드걸즈 메들리 할 거라고요.. 이어폰을 챙겨가 다행인 순간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받은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도로 물리고 나는 잘 채비를 했다. 나도 이젠 얼은(adult)이니까!.. 혼자 잘 수 있다며 엄마 아빠를 한사코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홀로 병실에서의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좁고 딱딱한 침대가 싫었지만 난 딱히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므로 문제없이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면 좋았겠지만 알고 보니 난 까탈스러운 편이었나보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날 새로운 나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마냥 건강한 줄만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나, 그리고 무던하기만 한 줄 알았지만 다소 예민한 편인 나. 게다가 병실 안엔 미처 꺼지지 않은 형광등이 있어 잠을 청하려고 할 때마다 눈이 부셔 방해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끄기 위해 몸을 일으킬 자신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자는 수밖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옆 침대의 환자는 코골이가 심한 편이었다. 여러모로 길고 외로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MRI 촬영이 예약되어있었다. 난 MRI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도 몰랐는데, 상황이 닥쳐 그 자그마한 통속에 들어가고 보니 이게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좁은 통속에 갇혀있다는 생각에 숨부터 막혔다. 헉헉헉 가쁜 숨을 쉬는 와중에 주변에선 우주정거장에서나 날 법한 요란한 기계음이 들렸다. 3M 귀마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볼륨 100% 우주정거장 ASMR이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울렸다. 웅웅웅웅- 난 그 소음과 답답함을 잊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입속말로 레드벨벳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커지는 헡빝빝빝 빨라지는데 너답잖게 헡삐삐삐-' 


    한참을 웅얼거리니 징-하는 소리와 함께 누워있던 침대가 움직였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싶어 눈을 뜨려는데 MRI를 촬영해주시던 선생님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환자분, MRI 촬영 중에는 움직이면 안 돼요."


    몰랐는데 내가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몸도 같이 리듬을 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대단한 아이돌 연습생 나셨다. MRI 찍으면서까지 안무 연습. 와아- 역시 레드벨벳 제 6의 멤버.


    "환자분, 이번에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네-


    난 그렇게 들어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머릿속에서 '러시안룰렛'을 15번쯤 불렀을 때 다시 기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기억해둘 것: 앞으로 MRI 찍을 만한 일은 절대 만들지 말고 얌전하게 살자.'


    그렇게 어렵게 찍은 MRI 결과를 판독해보니 요추의 n번과 m번 디스크가 탈출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진으로 확인하니 정말 디스크 두 조각이 삐죽하고 튀어나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아직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별다른 시술과 수술은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다만 약을 먹어가며 두 아이가 저절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했다. 밤새 맞은 약에 하루 만에 몸이 가뿐해진 걸 보면 내 생각에도 그 정도가 충분하리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길로 난 퇴원 수속을 했다. 


    처음 들어올 때랑은 사뭇 다르게 가뿐해진 몸과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고작 하룻밤이었지만 꽤나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똑바로 살아야지-말 그대로 자세를 똑바로 펴고 살겠다는 뜻-. 다시는 여기 올 일을 만들지 말자. 그런 결심이 함께 따랐다. 


    하지만 그런 데서 얻은 교훈은 그 가치에 비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 나는 그 날의 지옥 같았던 경험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금세 다시 습관적으로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의사가 하지 말라던 요가도 다시 하게 되었고 몇 시간씩 가부좌로 앉아 가야금 연습도 하게 되었다. 여행에 가서는 3만 보 정도는 예사로 걸어 다녔으며 이번 겨울엔 프랜치 알프스의 유혹을 못 이겨 스노보드도 탔다. 물론 수차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말이다. 


    그런 내게 또다시 허리 통증이 찾아오는 게 부자연스러운 전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난 그날의 결심이 무색하게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병원을 재방문했고 아직까지도 간혹 약을 먹어야만 남들처럼 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긴 시간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건 여전히 불편하고 무거운 짐도 번쩍번쩍 들지 못한다. 척추는 몸의 중심이라니까, 디스크가 제자리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은 삶의 질을 수직 하강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난 허리 약 한 봉지를 까먹을 때마다 다시금 결심을 한다. '진짜 똑바로 살자. 다시는 JRD 될 일 만들지 말자.' 이런식의 결심은 유통기한이 짧은 만큼 수시로 상기해야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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