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밖에 안 쓴 몸인데 A/S 안 될까요 (2)
지난겨울 난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비록 예기치 않은 코로나의 깜짝 등장으로 두 달을 채 채우지 못하고 마무리한 여정이었지만,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그 준비과정만큼은 6개월을 머무는 남들 못지않게 철저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가장 먼저 구비한 준비물은 비자도 보험도 아니었다. 바로 나의 영원한 동반자: 허리 약.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가 한동안 해외에 머물게 된 사연과 더불어 넉넉한 분량의 허리 약을 처방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결과 난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린 약봉지를 트렁크 한 켠에 소중히 넣은 채 출국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허리 약'이라는 초라한 세 글자가 아닌 더 전문적이고 의학적인 명칭을 가지고 있는 약물일 테지만 내겐 '허리 약'이라는 간단한 호칭으로 통용되는. 징글징글하지만 없이는 살 수 없는. 둘둘 말린 약봉지 부피가 얼마나 크던지 가져가려던 후드티셔츠 하나를 포기하고 나서야 공간이 생겨 담아갈 수 있었던 나의 허리 약.
그런 허리 약과 나의 인연의 시작점을 생각해보면 2년 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난 대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겨울방학을 맞이해 주말마다 스키장에 놀러 가는 한량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스키장에 가면 나는 늘 스노보드를 탔다. 보드를 타면 슬로프 위에서 꼭 한 번 씩은 넘어지기 일쑤였는데 나는 그걸 스노보드의 묘미라고 말하면서 꽝꽝 부딪혀 멍든 엉덩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뿐인 몸 아까운 줄 모르고 혹사시키며 몸소 YOLO를 실현하고 지내던 어느 날 디스크가 터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여느 때와 같은 오전 시간이었다. 종강을 한 뒤인지라 여유 있게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간단히 물기를 닦은 뒤 샤워부스에서 나왔을 때였다. 따뜻한 샤워부스를 벗어나자 계절이 계절인지라 욕실엔 한기가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온도차에 재채기가 튀어나온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재채기는 시발점이었다. 재채기를 함과 동시에 아래쪽 척추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난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허리가 짜자작-하고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바닥을 짚고 엎드린 나는 다시 일어나 보려 힘을 주었지만 힘을 줄수록 허리의 고통이 심각해지기만 했다. 혼자 힘으론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집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 일이 있었을 때 집에 있는 사람이 나 혼자였다면 이야기는 더 복잡했을 테지만 그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나는 거실에 나가 계시는 엄마를 불렀다. 마침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던 엄마, 웅장한 청소기 소리에 내 하찮은 외침이 묻혔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소리 높여 구조요청을 한 뒤에야 엄마가 놀란 안색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난 여전히 욕실 바닥에 꼴사나운 모양으로 엎드린 채로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 나 재채기하다가... 내 허리가... 아니... 도와줘..."
엄마는 바닥과 한 몸이 된 나를 일으켜 세우려 내 팔을 부축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 보려는데 순간 입에선 절로 비명이 샜다. 아 이건 아니다. 난 지금 절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직관이 들었다.
"엄마, 추워..."
당장 일어나긴 글렀으니 옷가지부터 챙겨 입는 게 우선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와 함께 불어 들어온 차가운 공기에 피부엔 소름이 돋았다. 이 상황에 재채기라도 한 번 더 한 다면 그땐 어쩌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난 대역죄인처럼 엎드린 꼴로 옷에 대충 팔다리를 걸었다. 차라리 눕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기 때문에 자세를 바꿀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상하의를 갖추어 입은 뒤에 난 다시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켜 보았다. 동생을 시켜 바퀴 달린 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그걸 휠체어 삼아 앉아보려 했다. 단말마적 비명을 몇 번 더 되풀이 한 뒤에야 겨우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난 동생을 시켜 날 내 방까지 옮기도록 했다. 얼른 대강 나갈 준비를 하고 병원에 가야 했다. 평소의 나는 엄살이 심한 편이다. 주변에서도 그렇게들 말하고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평소엔 몸이 조금만 이상증세를 보여도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날 깨달았다. 사람이 병원을 가야 할 때가 되면 저절로 알 수 있는 법이다.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ㅈ되겠구나'하는 동물적인 직각이 찾아온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하면서 맞은편에 걸린 전신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잘 보니 상의를 뒤집어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걸 도로 고쳐 입을 힘도 내겐 없었다. 그렇게 꼼짝도 못 하면서 멍청한 회전의자에 앉아있는 꼴이, 슬프다기 보단 웃겼다. 거울 너머의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하고, 꼴사납고, 바보 같고, 황당하고, 그리고 너무너무 웃겨서 웃음이 나는데 웃을 때마다 척추로 진동이 가서 또 한참 고통스러워하고, 그 사실이 어이없어서 또 웃고... 아,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어.
아무튼 그렇게 웃음과 슬픔이 점철된 복잡한 해학의 심정으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이르는 길에 과속방지턱이 그렇게 많은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잇단 과속방지턱의 등장에 요동치는 차체, 요동치는 요추.
마침내 도착한 병원에선 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이상한 자세로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는 30분 남짓되는 시간 동안 난 평소의 생활습관을 곱씹으며 탄식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아, 엄마가 다리 꼬지 말라고 할 때 바로 앉을 걸. 아, 고3 때 아무리 졸려도 책상에 엎드려 자지 말 걸. 아, 그때 그 가파른 슬로프, 내려오면서 다섯 번 넘어진 슬로프, 올라가지 말 걸.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이 없었다. 그때 내 이름이 불렸다.
CT촬영이 우선이었다. CT실에서도 난항은 이어졌다. 촬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촬영용 침대에 눕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고난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 부축하며 모든 과정을 함께한 엄마. 아마 내 육중하면서도 모순적이게 연약한 몸이 그날 엄마에게 끔찍한 근육통을 선사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순조롭지 못한 CT 촬영을 마치고 마침내 들어간 진료실에서 비로소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날 진찰대에 눕히고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 양발을 번갈아 들어보고 발끝을 당겨보고 등등. 몇 가지 더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정밀 검사를 위한 입원과 MRI 촬영을 권했고 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평소 내 생활을 되짚어 함께 원인을 찾아보려고도 했는데 걸리는 점이 많았다.
가장 먼저 걸리는 건 헬스장에서 자주 했던 레그 레이즈 운동. 그때 내가 한 동작이 허리에 무리를 주는 잘못된 동작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재미 붙여하고 있던 요가도 무리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 동아리 연주회를 준비 중이던 나는 가야금 연습을 하며 가부좌를 한 채 지내는 시간이 제법 길었는데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유력한 건 스노보드를 타며 수시로 넘어진 충격이었다. 결국 내 허리 통증은 위와 같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낸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즈음부턴 내가 아픈 게 더는 웃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허리가 아파서 내 힘으로 바로 서지도 못하는데, 앞으로 평생 이런 상태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덮쳤다. 순식간에 침울해진 분위기 가운데 - 엉덩이에 주사 한 대(엄청 아팠음) - 그리고 입원을 위한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4인실로 들어섰다.
<계속>